철학과 맹호
에디터 : 박영민
철학. 무엇이 떠오르는가? 철학에 문외한인 많은 사람들은 유명한 그림인 아테네 학당이 떠오르고, 현실 세계와 동떨어져 구름 위에서 신선들이 추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필자도 인터뷰를 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터뷰를 통해 맹호 군이 하는 일들이 모두 철학과 연결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며, 어떻게 그렇게 철학을 좋아할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철학도가 과학도에게 알려주는 이야기를, 철학이 왜 감동적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철학과를 다니고 계시는데, 어떻게 철학을 전공하게 되셨나요?
재밌어서요!
철학에 재미를 느끼게 된 계기가 따로 있나요?
저는 국제고를 나왔어요. 국제고에서는 1학년 때 배우는 게 똑같아요. 1학년 때는 선택 과목이 없어서 지리 시간에 지정학을 배우고, 일반 사회 시간에는 선생님들이 자기 세부 전공을 가지고 오셔서 세 분이 인권사 같은 걸 가르쳐주셨어요. 그래서 학교에서 일반 사회 지리도 따로 공부하고 도시 지리도 따로 공부하고 그랬는데, 이런 것들에서는 되게 구체적인 사회 문제들을 다루잖아요?
지정학이라는 것도 지금 진짜 일어나고 있는 외교 관계에 대해서 다루는 문제고, 도시 지리학도 사실은 진짜 구체적인 수치, 매년 바뀌는 수치를 다루는 학문이에요. 그렇다 보니 그 과목에 대한 보고서를 쓰다 보면 항상 해법을 제시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어요. 저에게 유의미한 보고서는 어떤 그 현상에 대한 밀도 있는 분석보다는 항상 “내가 이거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러한 해법을 내어봤다!”라는 거였던 것 같아요.
솔루션을 제시를 해줘야 된다는건가요?
네. 그러니까 공학도 마인드인 거죠. 그래서 되든 안 되든 간에 제가 어떻게든 해법을 찾으려고 노력했는데, 그런 일을 하다 보니까 실제 데이터 갖고는 한계에 부딪히는 거예요. 일단 데이터가 주어져 있으면 제가 그걸로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자료를 많이 찾아봤자 제가 제시할 수 있는 해법이라는 게 한정적이잖아요? 그러면 결국에 제가 그런 해결 방안을 제시하기 위해서 알아야 하는 건 정치사상이라든가, 사회 이론이라든가, 그런 근본적인 규범을 다루는 일이어야 하는 거잖아요.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취약계층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수치 자료가 있으면 제가 그걸 보고서 “이 사람들이 잘 살면 좋겠어”라는 생각을 하는 건데, 그 데이터에 대해서 조금 더 의미 있는 이야기를 하려면 예를 들어 최대 다수의 최대 이익이라는 원칙에 대해서 제가 알고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럼 결국에 그런 해법을 제시하려면 제가 도착해야 하는 지점은 어떤 사회학 연구나 지리 연구 같은 것이 아니라 “더 근본에 닿아 있는 정치사상과 사회사상에 대해서 내가 알아야 하는 거구나”라는 생각을 그냥 어렴풋하게 고 1때 했어요.
이제 그런 동기로 고 2때 신청한 수업이 '현대사회와 철학'이라는 수업이었어요. 거기에서 사회 이론 수업들을 들으면서 감명을 받았죠.
제가 공대 수업을 듣다가 자연대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경로랑 굉장히 비슷하네요. 현상에 대해 활용하는 것만이 아니라 근본적인 원인을 알고 싶어서 물리학을 복수전공하게 됐거든요.
근본을 모르면 해법이 너무 붕 떠 있어요. 그리고 미봉책이 되는 것 같고. 사실 남들 다 하는 얘기를 안 하고 싶어서 하고 싶었던 것도 있습니다. 당연히. (하하)
그렇군요. 고 1때는 이런 일이 있었는데, 고 2때는 어떤 일이 있어서 철학에 빠진 건가요?
고 2때 제가 '현대사회와 철학'이라는 수업에 경도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일단 아주 사소하지만 중요한 첫 번째 이유는 선생님이 아주 매력적이었어요. 뭔가 눈빛이 되게 날카로웠는데, 분위기는 먹구름이 낀 분위기인데 눈은 번개가 나오는듯한 게 엄청나게 멋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분이 평소에 그냥 걸어다니실 때는 되게 무기력하게 계시는데 수업을 할 때는 정말 너무 눈빛이 빛나는 거예요. 그래서 “진짜 멋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을 수 있지?” 막 이런 생각을 하면서 일단 그분에 대한 동경이 첫 번째였고요.
두 번째는요?
뭐라고 해야 하지? 내용은 정확히 기억이 안 나요. 그 수업이 그냥 방과 후 수업 같은 거였고 더 중요한 건 내신 공부여서 복습을 안 해서 기억이 안 나는데, 대충 비판 이론이라는 조류에 대해서 배웠어요. 그러니까 칸트부터 시작해서 마르크스 이후에 후기 마르크스까지 이어지는 비판 철학의 흐름을 좀 배웠는데, 비판 철학은 기본적으로 견제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어요. 일단은 마르크스는 너무 유명하니까 아시겠지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뭔가 사회를 곱게 보지는 않잖아요? 뭔가 근원적인 구조를 뭔가 파악하려고 하고 사회 문제에 대해서 자기만의 개념과 형식을 도입해서 그거를 되게 날카롭게 지적하는 그런 설명 방식이 되게 흥미로웠던 것 같아요.
뭐 굳이 비유하자면 수식을 잘 쌓아 올리는 거죠. 자기만의 그런 사례를 해석하는 수식을. 근데 그게 너무 간결하고 감동이 있는 거예요. 어떤 하나의 문장 안에 너무나 많은 그런 함축된 의미들이 담겨 있는데 그게 설명력이 너무 높은 거죠. 근데 그 설명력이 너무 높은 걸 보고서 “어쩜 이럴 수 있나...” 하고 감동을 받았어요.
이거 완전히 물리네요. 저도 물리학 복수전공을 하면서 너무나 복잡해 보이는 상황을 단 하나의 수식으로 아름답게 설명하는 것을 보고 감동을 받았거든요.
맞아요. 너무 설명력이 높아요. 그래서 “이거는 내가 어디든 적용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됐죠. 정말 사소한, 친구들과의 대화에서부터 당시에 제가 관심이 있던 신산업 기술, 즉 AI 기술과 같이 곧 오게 될 시대에 나타날 법한 문제들까지 그 사람들의 철학이 적용될 수가 있겠다. 정말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저는 모든 것에 관한 이론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물리학에서의 모든 것의 이론(인터뷰어 주: 전자기력, 중력, 약한 핵력, 강한 핵력을 통합하여 설명하려는 꿈의 이론. 아직 상상의 영역이다.)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하)
그런데 이게 너무 재밌으니까 그 설명력을 제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막 철학자들이 했던 이야기와 비슷한 사례를 막 갖고 와서 이론 적용하고 분석해 보는걸 2학년 2학기 때 계속했어요. 3학년 때까지도 계속 했던 작업이었고요. 3학년 올라왔을 때부터는 하나의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그게 이 작업의 정점을 찍은 거였어요. 그때 베버의 관료제 이론을 학생회에 적용을 해서 학생회를 둘러싼 학생 사회의 갈등 상황을 관료제 이론을 가지고 분석을 했고, 그에 더해서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이론도 적용했는데 그게 그 수업 때 배운 비판 철학의 흐름에서 되게 중요한 이론들이었어요. 이 이론들이 지금 우리 학교 학생 사회에서도 적용될 수 있음을 보이고.
그냥 추상적인 이야기인 줄만 알았던 철학이 실증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는 이야기네요.
네 맞아요. 그게 사실은 철학 연구까지는 아니고 사회학 연구인데, 이 활동을 하면서 느낀 거는 “내가 진짜 관심 있는 거는 어떤 사회 현상 자체에 대해 논의하는 게 아니라, 내가 그거에 해법을 적용하기 위해서 도구로써 필요로 했던 그런 철학적 사유들이구나”, “그게 내가 진짜 관심을 가지고 감동을 느끼는 부분이구나”라고 생각했어요. 그걸 하기 전인 2학년 2학기 때까지는 '나는 뭔가 사회학과나 아니면 그냥 정해진 게 없으니까 그냥 자유전공학부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3학년 1학기 때 그 연구를 마치고 나니까 “내가 가야 되는 길은 철학인가 보다” 라고 생각을 하고 지원서를 썼습니다.
이제 대학교에 입학하시고 지금까지 많은 일들을 겪으셨을 텐데, 많은 정보를 접하면서 이전과는 생각이 바뀌었을 것 같아요. 어떤 변한 점이 있었나요?
제가 아주 충격적이라고 생각했던 부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어쨌든 그 높은 설명력에 대한 어떤 환상이 있으니까 철학을 좋아한 거잖아요? 물리에 빗대서 설명하면 물리 법칙에 대해서 저희가 열광을 하는 이유는, 그게 너무나 아름답다고 느끼는 이유는 물리학에서 나오는 수식들이 너무 설명하는 바가 많고 그 간결함 속에 담겨 있는 그 복잡성이 너무 절묘한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잖아요. 근데 그렇게 물리학자들이 꾸는 꿈, “우리가 세운 이 과학적 지식을 통해서 모든 것에 대한 이론을 세울 수 있겠지!”라고 하는 물리학자들이 지향하는 것이 있잖아요. 물리를 공부하는 사람들도 결국에는 내가 정말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어떤 희망 속에서 그런 작업을 하고 있는 건데, 마찬가지로 저도 “내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 온전하고 완전한 진리에!”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저는 철학을 통해서 그걸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1학년 1학기 때 철학 학회를 하면서 칸트의 원전을 읽으면서 느낀 것이 그럴 수 없다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진리에 도달하는 것. 그 온전하고 완전한 진리에 도달하는 것 자체는 우리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애초에 그 진리가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모른다는 거였어요.
뭔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생각나네요 (인터뷰어 주: 수학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공리계가 모순이 없다면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정리).
불완전성 정리는 제가 아는 게 없어서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비슷한 것 같아요.
물리학에서도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경제학에서 애로우의 불가능성 정리, 컴퓨터공학에서 튜링의 정지 문제 등 학문마다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뉘앙스의 정리(Theorem)들이 있어서 말씀하신 칸트 이야기와도 굉장히 일관된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인터뷰어 주: 각각 입자의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어느 정도 이상의 정확도로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회의 후생 수준을 적절하게 평가할 수 있는 바람직하고 민주적인 선호 체계가 존재할 수 없다/ 주어진 프로그램이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가 해결 가능한지 말해줄 수 있는 일반화된 알고리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정리)
그러니까 칸트가 했던 얘기는 뭐냐면 칸트는 본인이 하는 철학을 초월 철학이라고 그러거든요? 되게 오만한 워딩이라고 생각하긴 하는데... (이거 안 돼요. 이거 안 돼요.)
이거 누가 보면 욕 먹는다.
이거 보면 이제 저 대학원 못 가요. (하하)
그러니까, 칸트는 우리가 어떤 온전하고 완전한 진리에 대해서 논의를 하기 이전에 그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그 수단으로써 우리의 오성(인터뷰이 주: 감성과 지성과 이성을 포괄하여 말하는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신뢰할 만한 도구인가? 라는 것을 먼저 검토해야 한다고 말하거든요?
오성은 우리의 모든 총체적인 능력이라는 느낌이네요.
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어떤 감각 능력과 그 사고 능력 포함해서 전반을 봤을 때, 목적지에 다다르려면 목적지에 관한 수단이 정말 온전한지부터 검토해야 한다는 말이에요. 근데 그거를 검토하는 게 이제 칸트가 썼던 세 가지 책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인데, 그 학회를 하면서 책을 읽었을 때 느낀 점 중 학회의 모두가 동의했던 점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칸트의 검토를 우리가 따라가 보니까 우리 이성에 있어서 신뢰할 수 있을 만한 부분들이 정말 극미하다는 점이었어요. 그리고 우리 인식 너머에 있는 진리라는 것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는 애초에 우리 인식이 해석할 수 있는 그 범위 너머에 물자체(인터뷰이 주: 즉, 우리 인식 너머에 있는 무언가)라는 개념이 있다고 한다면 그 물자체가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어떤 임의적인, 우리만의 그 사고 틀에 희석돼서 그 진리가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애초에 우리는 그 온전하고 완전한 진리를 온전히 인식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어요.
그러면 그걸 보고 저는 허탈한 거죠. 나는 모든 것에 대한 이론을 원했고 정말 극도로 높은 설명력을 주는 어떤 철학적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서 이 과에 왔는데, 그럴 수 없다는 게 이미 판명이 나 있는 거예요. 근데 저도 딱히 그걸 반박할 만한 여지가 없는 거죠. 그래서 그때 한동안 절망감에 빠져 있었어요. 왜냐하면 '내 자체가 뭔가 박물관이 되고 싶다' 뭐 이런 야망이 있잖아요. 내가 모든 걸 알고 싶다는 야망. 그런데 그때 또 들었던 생각은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또 “철학이 뭔가”라는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애초에 철학자들이 꿈꾸는 게 저랑 다 똑같거든요? 모든 것에 대한 설명을 우리가 주고, 그거를 개념화하고, 그거에 정의를 줘서 어떤 하나의 이론을 온전한 이론을 만들어내는 걸 목표로 하는 게 철학이고, 그럼으로써 완전하고 온전한 진리를 만들어내는 걸 목표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애초에 그건 도달할 수는 없는 것일뿐더러 그거에 도달하는 순간 사실 철학은 필요가 없거든요.
그렇죠. 이제 더 남은 할게 없으니까.
맞아요. 왜냐하면 그거에 대해서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논쟁하는 게 철학인 건데, 그거에서 결론이 딱 나버리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질문할 필요도 없고 더 이상 논의할 필요도 없잖아요. 그럼 본질적으로 철학이 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게 사라지는 거니까요. 이거에서 제가 느낀 게, 철학은 그 목표상 본질적으로 자기 파괴적
인 활동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철학이 다른 학문과 조금 다른 점은 모든 기초를 의심하는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사실 논의 속도가 되게 느리다는 점이에요.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에 수학이나 물리학 같은 그런 근원적인 자연과학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지점은 어떤 공리(인터뷰어 주: 수학이나 논리학 등에서 증명 없이 자명하게 옳다고 받아들이는 명제. 공리를 기반으로 하여 이론을 전개하고 증명한다.)에 있어서 어떤 것들은 자명하다고 여기고 그건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넘어가는 부분이에요. 철학에는 그런 부분이 없으니까 계속 맴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맞아요. 자연과학에서는 관측된 사실들을 기반으로 해서 귀납적으로 알게 된 F=ma 같은 수식들을 공리로써 받아들이는데, 사실 “F=ma가 성립하지 않는 일이 이 우주 어딘가에 있을 수 있는 거 아냐? 우리가 아직 찾지 못한 것일 수도 있잖아?”라는 질문에는 그냥 믿자고 하고 넘어가잖아요.
그런 공리가 있다고 가정한 상태에서 쌓아 올려 가면 그거가 진실이라고 믿는 한 우리가 할 수 있는,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래서 뭔가 가시적인 연구 성과들이 자연과학 쪽에서 계속해서 나올 수 있는 것 같아요. 우리 그 ZFC 공리계(인터뷰어 주: 현대 수학의 가장 밑바닥이 되는 10개의 공리들) 배울 때 ZFC 공리계도 어쨌든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인 거잖아요? 제가 사실 수학과 전공과목인 집합과 수리논리를 들은 이유가 그거예요. 과연 수학은 얼마나 믿음직스러운 기초를 가지고 있길래 저 사람들은 그 기초 위에 쌓아 올린 성벽, 그 체계라는 그 성벽 안에서 노는 것인가라는 생각을 하는 거죠. 근데 사실 그런 태도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는 생각하긴 했어요.
현실적으로요?
현실적으로 그렇죠. 왜냐하면 어차피 인간의 한계를 인정해버리는 순간 그게 나쁘지 않은 거예요. 그러면 이제 또 ‘그러면 왜 철학을 해야 되냐?’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갖고 들어온 목적이라는 걸 잃어버렸는데...'라는 생각을 저도 한 거예요. 그런데 지금 요즘에 관심을 갖고 있는 건 뭐냐면… 어떤 진리에 대한 태도의 측면에서 수학과 물리학 하는 사람들과 태도가 아주 비슷한 영미 분석 철학자들이 있어요. 기호 논리학 하는 사람들이죠. 근데 그 사람들도 어떤 공리라고 부르는 것들을 자기들이 만들어 놓고, 그 위에서 논증을 해서 철학적 논의를 하는 집단이에요. 그런 사람들은 진리가 있다고, 그들이 그런 방식을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진리가 있고 그 논리학적인 틀 안에서 우리가 논의했을 때 충분히 유의미하고 종합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저는 그쪽 사람들의 생각과 작업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는 거죠. 왜냐면 앞서 말씀드렸듯이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요.
그렇게 한 것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일이라는 말이네요?
그것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제 학문한다는 것 자체에 있어서 엄청 우월한 의식을 갖게 되지 않은 것 같아요. 애초에 그런 뭔가 우리의 인식을 넘어선 그 진리에는 도달할 수 없고, 그 아래서 노는 약간 그런 느낌인 거예요.
내가 정말로 진리에 도달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렇게까지 대단한 걸 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네요.
네. 그러니까 원래는 학문을 하면 초월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생각했기 때문에 철학을 했다면, 이제는 “아니다. 애초에 초월 인간이라는 거는 모순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고서 “정말 내가 재밌어하는 게 뭘까?” 뭐 이런 걸 생각하는 중이에요.
그래서 이제 구체적으로 뭘 할지에 대해 고민중이신가요?
근데 그런 생각은 뭐 시험 기간은 아닐 때 하는 거고(하하) 지금처럼 시험 기간일 때는 막상 해야 되는 거에 집중해서 지내고 있죠. 그런데 사실 저는 그런 거에 몰입하며 살아가는 것도 되게 즐거워요. 뭔가 크게 생각 안 하고 지금 당장 주어진 거에 열심히 하면서 내가 그 안에서 빈틈없이 해나가는 것. 그 자체도 너무 즐거우니까요. 사실 그런 점에서 논리학 공부하는 것도 재밌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게 진짜 맞는 말이야 틀린 말이야?”라는 생각을 하기 이전에 일단 이 사람들이 무슨 논리를 펼쳤는지 내가 완전히 이해해 보고자 하는 목표가 단기적으로 있으니까 그거에 몰입하다 보면 그걸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것 같아요. 어차피 감동을 추구해서 철학을 한 거면 뭐 그런 재미를 느끼는 것도 대체품으로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까 불확정성 원리 이야기가 잠깐 나왔는데, 말씀하신 게 또 다른 학문과 닮은 면이 있는 것 같아요. 물리학에는 하이젠베르크 불확정성 원리가 있어서 어떤 입자의 운동량과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는 내용이 있는데, 방금 말씀하신거에 대응해서 얘기하자면 그 절대적인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거겠죠?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현실적인, 분석 철학 쪽 방법론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던 것처럼 물리학자들도 마찬가지로 양자역학을 사용해서 정확히 모르니까 그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한번 관심을 가져보자! 하고 그 불확정성에 맞게 현실 세계를 기술하는 방법을 찾는 방향으로 갔잖아요.
그리고 수학 같은 경우에도 괴델의 불완정성 정리가 있는데 이를 받아들이고 ZFC 공리계 위에서 이 이론들이 어디까지 가나 한번 보자~ 하고, 경제학에서 불가능성 정리를 받아들이고 이제 경제학 하는 사람들이 그러면 어떻게 해야 사회 전체의 효용을 증가시킬 수 있는지 찾으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면이 있잖아요? 그런 면에서 여러 학문들이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신기하게도 온갖 근본적인 학문에서 튀어나오는 문제와 그 대책이 똑같네요.
그러니까 저는 차라리 그래서 제가 중세 학자였다면 너무 좋았을 것 같아요.
이것저것 다 하게요? (하하)
네. 그런데 제가 너무 철학의 한 분야만 이야기한 것 같네요. 저는 어떤 진리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분야에만 관심을 가져서 이런 이야기만 계속 했는데, 사실은 만약에 제가 사회철학을 한다고 하고, 그리고 정치철학을 한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면 근원적으로는 그것도 인간학이라든지 미리 사람들이 정리해 놓은 어떤 공리에 기대지 않을 수는 없겠죠. 아무튼 그런 근원적인 문제와는 되게 멀어져 있는 실존철학들은 사실 그 유용성이 확실하게 보이기 때문에 굉장히 할 만한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약간 느낌이 이공계 중에 수학 같은 순수학문과 재료공학 같은 응용학문의 관계 같네요.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미지를 갖게 된 게 있는데, 수학에서 ZFC 공리계를 바탕으로 해서 아주 정교하고 복잡한 기계 부품을 하나하나 다 끼워 맞추는 것처럼 수학의 탑을 쌓아 올리듯이 철학에서도 마찬가지로 진리같이 뭔가 완전한 거는 없고 어떤 기본적인 가정 같은 걸 세우고, 거기서 퍼즐을 끼워 맞춰서 기호 논리학이라는 퍼즐을 사용해서 이제 뚝딱뚝딱 쌓아나가는 면이 있는 것 같은데, 이런 이미지가 맞나요?
네 맞아요.
궁금한 게 있는데, 철학에는 왜 감동이 있고 왜 할 만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철학에 감동이 있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 것 같아요. 첫 번째는 설명력이 높다는 거예요. 설명력이 높다는 거는 저는 철학의 감동을 갖게 된 우리의 철학과 학생들의 공통적인 계기인 것 같은데,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면서 어렴풋하게 생각했던 어떤 것들이 있잖아요? 말로써 우리가 언어화하지 않은, 그냥 머릿속에 잡다하게 들어 있는 생각들이요. 그런 생각들을 우리가 철학 서적을 읽었을 때 똑같은 생각인데 철학적으로 너무 잘 정리해 놨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말이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놀랍도록 맞고요. 그래서 그런 논의들을 딱 꺼내 놨을 때 이게 맞는 말이라고 동의하게 될 때 감동을 받는 것 같습니다. 또 지금까지는 어떤 설명과 어떤 개념과 서로 관련이 없다고 생각해 왔던 일상 속의 경험들이 있는데, 우리가 철학적 개념들과 설명을 배웠을 때 전혀 관련 없어 보이던 현상이 이 개념과 연결되어 있는 걸 보면서 그 연결에서도 또 놀라움을 얻는 것 같아요.
철학하는 사람들이 공부하는 걸 보면 말씀하신 머릿속의 애매모호한 이 개념을 정의할 때 굉장히 정교한 단어들로 엄밀하고 어렵게 정의하잖아요. 이렇게 하는 게 그 단어들을 명확하게 딱 꺼내오기 위해서인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거를 정말 명료하게 말하는 게 중요한 것 같고요. 딱 매치를 하는 게 중요한 거니까요
해석이 갈릴 여지가 전혀 없이 말이죠.
그런데도 이제 많이 갈리죠. 제멋대로 해석하니까 그런 거고… 또 특히 옛날 책들은 이 사람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 단어를 썼는지도 이제 모르니까요. 사실 근데 그거는 수학 기호들도 똑같은 것 같아요. 오늘 제가 그리스 기하 수업을 듣고 왔는데 합동 기호 있죠? 그거를 처음 고안한 사람은 라이프니츠인데 라이프니츠는 그 기호를 비슷하다는 뜻에서 s라는 기호를 썼대요. 근데 그 기호가 영국에서는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는 기호로 쓰였대요. 이런 기호의 역사를 보더라도 합의되지 않은 어떤 개념들이 있는 것 같고 그거는 그냥 학문의 특성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수학이 특수하다고 생각합니다.
수학 전공 과목들을 들으면서 느꼈던 게, 수학을 할 때도 정의를 할 때부터 굉장히 엄밀하고, 추상적이고 일반적으로 탁 정의를 해놓고 가잖아요? 철학과도 이런 면에서도 비슷한게 많은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같아요.
정교한 부품을 굉장히 잘 깎아서 부품들이 딱딱 맞물리게 해야 하는데 이게 잘 맞물리지 않으면 이게 다 무너져 버리니까요. 그럼 철학이 감동적인 두 번째 이유는 뭔가요?
두 번째는 위안을 준다는 거예요. 위안을 주거나 혹은 절망을 주거나. 실존철학은 좀 어느 정도에서는 위안을 주는 것 같아요. 실존철학에는 니체, 사르트르, 하이데거, 야스퍼스... 이런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하는 말 중 하나가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말이에요. 예를 들면, 빗자루는 존재하죠? 빗자루라는 건 존재하는데 빗자루의 본질은 뭔가요? 빗자루의 본질은 쓰는 거예요. 근데 빗자루가 만들어질 때부터 애초에 그 기능을 수행하도록, 본질이 정해져 있는 상태로 만들어지는데 인간은 그렇지 않다, 본질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 실존주의자들의 입장인 거예요. 그러니까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거죠.
그래서 인간은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이고 무슨 본질을 가졌는지를 스스로 정의해야 하는 존재라는 얘기를 하는 거고, 그렇기 때문에 자아 탐구를 하면서 본인이 겪는 어떤 그런, 비규정성에서 오는 근원적인 불안감이라던가 그런 것들을 논의하거든요? 근데 그런걸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걸 우리가 보고, 또 그거에 대해서 그 실존 철학을 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 스스로를 그런 휩쓸림 속에서 굳건하게 세웠는지를 보면서 우리도 그렇게 자기 심지를 굳게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가 실존철학은 잘 모르지만요.
위안을 준다는 것은 이런 이야기였고, 반대로 철학이 이런 위안을 주는가 하면 절망을 주는 것도 있는 게 있거든요? 저는 오히려 그 절망에서 되게 큰 감동을 느꼈던 것 같아요. 아도르노가 쓴 『계몽의 변증법』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서 제가 되게 감명을 받았어요. 아도르노가 거기서 무슨 얘기를 하냐면, '계몽은 신화로 퇴보한다'는 말이에요. 그게 무슨 말이냐면, 계몽주의라고 하는 건 우리가 역사와 신화를 분리시키고 사실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을 분리시켜서 우리의 이성의 영역으로서만 우리가 다스릴 수 있는 부분이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거잖아요?
르네상스네요.
네. 그러니까 계몽주의 시대의 대표적인 사람들이 이제 데카르트나 칸트 같은 사람들인데 데카르트가 대수기하학의 창시자잖아요. 이 사람을 보면 실제로 수학자이면서 철학자였고 어떤 수학적인 사실들을 연구하면서 그런 수학적인 논리적 사고 방식 자체를 자기의 철학적 사유에 적용을 해왔고, 그런 식의 엄밀성을 가진 사유라면 내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그 사람은 계몽주의 사조에 있던 사람인 거죠. 칸트도 아까 제가 말씀드렸듯이 자신의 철학을 초월 철학이라고 하면서 그 인식 자체가 얼마나 우리가 믿을 만하고 타당성이 있는지를 정초한 사람이란 말이에요. 그런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인간의 이성적인 능력을 최대한 발휘해서 우리가 궁극적인 진리에 도달하고자 했던 노력을 했던 사람들인데, 아도르노는 그런 이성 자체가 가지고 있는 체계적인 사고 능력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다, 폭력성을 낳을 수 있다는 주장을 해요.
근데 그 폭력성을 낳는 이유는 우리가 어떤 이성에 대한 맹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거예요. 이성이 체계화를 해놓은 결과물에 대해서 그것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분명히 있는데 그 아까 말했던 그 오성에 있는 다른 부분인, 특히 감성적인 부분들은 놔두고 이성으로만 모든 걸 생각하려고 하니까 우리가 말도 안 되는 주장들에 대해서도 그게 뭔가 논리적 근거가 있다고 생각하면 직관적으로 그게 틀린 말인데도 그걸 믿게 된다고 주장하거든요.
근데 그렇기 때문에, 어떤 이성으로 세운 성 자체가 일종의 신화가 됐다고 말하는 거예요.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에 빗대어 설명을 하자면, 예를 들어서 이성적인 사고에 맞춰서 생각했을 때 어떤 과학 이론이, 예를 들면 천동설이 그 안에서 내적 정합성을 갖고 있다는 게 이성적으로 우리가 납득할 수 있으면 그냥 그건 맞는 말이 되는 거고, 그 자체가 어떤 교조주의적인 신앙처럼 되어버리면서 천동설이 사실은 틀린 말인데도 그냥 우리는 그게 맞는 말이라 생각을 하고 천동설에 맞지 않으면 그걸 무조건 배제해 버리려는 폭력성을 가진다는 말이에요.
과학이 신앙이 됐다는 말이네요.
네. 과학이 신화가 돼버렸다. 그러니까 결국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 이성을 활용해서 자꾸 우리가 추구하려고 했던 그 계몽이라는 것이 결국엔 신화로 퇴보해 버렸다는 겁니다. 우리는 신화에서 벗어나려고 계몽을 했던 것인데, 계몽 자체가 신화가 돼버린 것이다는 말을 하거든요. 근데 이제 아도르노는 되게 비관적인 사람이에요. 그거에 대해서, 그거는 영원히 우리가 어떻게 바꿀 수 없는 역사의 원리 같은 거라고 말해요.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그런 계몽이 신화로 퇴보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이런 지적하는 거에 대해서 자기가 이런 지적을 문제 제기를 하고서 이걸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할 수 없다고 말해요. 이거는 그냥 문제로서 남아 있는 거라 고질적이고, 해결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제 자기가 일단 문제 제기를 했던 거에 대해서 앞으로 사람들이 뭔가 알아주기를 원하면서 “내가 이 책을 쓴 것은 저 넓은 바다에 나의 이 책을 편지에 써서 이 병 속에 담긴 편지를 내 바다에 띄우는 것이다. 누군가는 해안에서 그 병 속에 담긴 편지를 받기를 바라면서” 뭐 이런 식으로 말하거든요.
되게 감동적이지 않나요? 그런 식의 말을 하는 걸 봤을 때 그 사람의 전반적인 생각과 기조 자체는 되게 절망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유하는 사람이 갖고 있는 사람,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놓지 않는 철학자의 모습을 봤을 때 그 사유가 아무리 절망적이더라도 그게 되게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 절망이라는 게 방금 신화로의 퇴보 이야기도 그렇고 인간은 이제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도 그렇고, 이런 내용들을 보면서 이제 절망적이면서 그 안에서 또 감동이 있다는 게 아주 잘 와닿는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제 실제로 철학은 왜 할 만한가, 왜 도움이 되는가에 대해서도 알고 싶습니다.
저는 되게 철학의 효용을 크게 느꼈던 것 중 하나가, 칸트가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말한 내용들을 가지고 그거에 대해서 롤스가 쓴 논문이 있어요. 최소 수혜자의 최대 이익을 주장한 사람인데, 칸트의 인간학에서 시작을 해서 롤스는 자기가 분배해야 하는 것이 정말로 뭔지에 대해서 얘기를 했어요. 그리고 롤스가 말했던 그 분배 대상에 대해서 쓴 논문을 보면서 미국의 정치 철학자인 낸시 프레이저와 독일의 아까 말씀드렸던 제가 배웠던 그 비판 철학 조류의 현대의 거장인 악셀 호네트가 논쟁을 했어요. 롤스가 해석한 칸트의 인간학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거에 기반했을 때 우리가 진정으로 복지 국가에서 분배해야 하는 것은 어떤 형태여야 되느냐는 얘기를 하거든요?
굉장히 실제 세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주제네요.
네. 그래서 사실 롤스 자체가 되게 실천적으로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 철학자잖아요? 지금 사회의 복지국가라는 그 모델, 이념적인 틀을 만들어준 사람이 롤스에요. 롤스의 이론에 대해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떤 것을 사람들한테 주어야 하느냐는 논의를 했을 때 후대의 철학자들이 위로 거슬러 올라가서 칸트에서부터 시작해서 자기 논의를 끌고 내려와서 무엇이 정말 사람들이 원하는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서 철학에서 다루는 이런 원리적인 논의가 근원적인 수준에만 머물러 있는 게 아니라 정말 우리 생활과도 맞닿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사회철학과 윤리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것뿐만 아니라 사실 인식론적인 논의 자체도, 논리학을 활용한 논의 자체도 학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앞서 말씀드린 거는 학문하는 사람이든 아니든 그냥 지구 공동체의 중요한 일인 것 같아요.
보통 철학이라고 하면 굉장히 추상적인 것에 대해 다룬다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은 현실과 굉장히 직접적으로 연결이 돼 있다는 말씀이네요.
네. 가지를 뻗어나가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게 일단 첫 번째고 두 번째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학문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계속해서 의심하고 질문을 던지는 작업은 그래도 누군가는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뭔가 수리 철학자들이 하는 논의로 예로 들면, 정삼각형을 작도할 때 그 반지름을 공유하는 두 개의 원의 교점과 반지름의 양 끝점을 가지고, 즉 두 원의 중심을 가지고 작도해야 한다고 말을 하는데 수리 철학자들이 하는 말은 그 교점이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하느냐는 질문을 하거든요? 근데 이제 그런 질문은 사실 되게 중요한 질문인 거잖아요.
지금 그게 결론이 나든 안 나든, 그 질문을 던지는 시점에 있어서는, 그 어떤 무한이라는 개념과 그런 원이라는 도형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속성으로서 점의 자취라는 그 개념들에 대해서, 한 걸음 떨어져서 생각해 보고 그거에 대해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들은 늘 필요한 것 같아요. 그게 아무리 수학이라는 학문적 논의에서 되게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런 도전들이 계속 있어야 해요.
그런 근원적인 의심을 해결해야 확신을 가지고 안심하고 사용할 수 있으니까요.
네. 그리고 만약에, 아주 만약에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그런 어떤 공리들이 마치 천동설 같은 거라면 반드시 무너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상 과학에 대한 도전은 언제나 필요한 것 같거든요. 그러니까 그 정상 과학에 대한 도전으로서 철학의 그런 삐뚤어진 태도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믿고 있던 사실이 신화라면 반드시 깨야 한다는 거네요.
네 그게 맞아요. 그래서 그런 식의 시도는 유용하지 않아 보이더라도 거시적으로 봤을 때 필요한 것 같아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걸 하는 사람, 그런 부류의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자기 생애는 그 효용성을 못 느끼고 죽겠죠?
하지만 그 위대한 작업에 동참했다는 그 뿌듯함이 있죠.
그렇죠. 역사가 나를 알아준다는.
멋있네요.
그렇습니다.
혹자는 철학이 뜬구름 잡는 소리라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맹호 군이 말해주는 이야기를 들었다. 살아오며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고, 그 믿음이 무너지고. 믿음과 부서짐의 반복, 그럼에도 왜 철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들. 그리고 우린 철학이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님을, 정말로 철학에는 감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어떤 학문을 하든 신화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태도, 머릿속의 흐릿한 생각을 명확하게 꺼내는 것을 훈련하는 철학의 태도는 꼭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아닐까?
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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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철학과 23학번이자 LnL 7A 반의 구성원.
철학 학회 '거대한 하품'에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