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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NL 사람들 Sep 27. 2023

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들

인문계열 이지혜

에디터: 맹호


테마곡 : Jean Sibelius - Valse triste


  “Rock Will Never Die!” 처럼,

  죽지 않을 것이라는 외침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이 아른거리기 때문에 터져 나온다.


  락과 클래식 음악, 그리고 철학. 세 가지의 공통점은 ‘죽지 않고 살아있음'에 있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을 뒤로하고 잠잠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들이다. 오늘날 락과 클래식은 장르 자체로 주목받지 못하고 주류 음악 장르에 옅은 흔적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인문학에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철학은 문학과 역사가 가진 일종의 상품성마저 갖추지 못해 심연과 같은 무관심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것들이 그저 ‘살아있다’ 말하지 않고 ‘죽지 않고' 살아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죽음의 향기가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지혜 양은 그 세 가지를 좋아한다. 죽어가는 것들을 움켜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책을 많이 보기도 하고, 모으기도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책을 고르는 나만의 기준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철학 책을 고를 때와 철학 책이 아닌 것을 고를 때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먼저 철학 책을 고를 때는 관심이 있는 철학자가 쓴 원전을 사는 걸 좋아합니다. 특정 철학자의 사상을 재구성하거나 재생산한 다른 학자의 해설서 혹은 개론서는 굳이 사지 않아요. 따지자면 철학 사상서를 사는 겁니다.


2차 자료보다는 1차 자료를 모은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일종의 철학자 굿즈를 모으는 거라고 봐도 될 것 같습니다.


  철학 서적 이외에 다른 책을 고르는 방법에는 두 가지 정도가 있을 것 같아요. 첫 번째로는 관심 분야나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의 모임을 찾아서, 그 모임에 속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책의 리스트를 탈탈 텁니다. 그 리스트를 받아서 읽을 책을 찾으면 대체적으로 나의 취향을 만족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렇게 탐색을 합니다. 이 방법이 아닌 경우에는, 마음에 들었던 작가의 책을 대부분 다 읽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매번 색깔이 바뀌는 작가보다는 쓰던 대로 쓰는 작가가 좋아요. 책에 있어서 ‘취향을 수집한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철학 책이라는 게 사실 굉장히 다양한 주제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혹시 특별히 관심이 있는 주제가 있으신가요?


  실존주의죠, 아무래도. 실존주의는 제가 철학에 관심을 갖게 만든 계기입니다. 일단 실존주의의 사전적 정의는 ‘개인으로서 인간의 주체적 존재성을 강조하는 사조’입니다. 학계 어른들께서 반박하실 수도 있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실존주의의 핵심적인 주제 중 하나는 죽음입니다. 덧붙이자면 존재에 대한 고통 그리고 그에 이어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정신질환이 실존주의의 주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에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기 이전의 관심사는 정신질환이었습니다. 그래서 죽음 혹은 정신 이상, 행동 이상을 다루는 책을 좋아했습니다. 이 관심사가 실존주의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 철학뿐만이 아니라 문학에서도 위와 비슷한 주제에 끌립니다.


  저는 슬픈 이야기를 다루되, 사회와 시대가 맞물려서 사람이 어떠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과정을 탁월하게 써낸 작품이야말로 최고급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슬픈 것이어서는 안 돼요. 저는 슬픔에도 급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슬픔의 급을 나누는 데 있어서 슬픔의 배경을 조성하는 환경이 중요한 것인가요, 아니면 그런 배경이 만들어낸 결과로서 슬픔의 농도가 중요한 것인가요?


  둘 다가 될 것 같네요. 우선 제가 생각하기에 구체적인 기준을 말씀드리자면, 첫째로 그 감정이 저 자신에게 얼마나 합당한지가 중요합니다. 그 다음으로, 이성적인 보통의 사람이 그 상황을 보았을 때 대부분의 사람이 납득할 만한 이유로 슬픔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 이유가 합당한 만큼 슬픔이 오래 지속되어야 합니다. 즉, 슬픔이 저의 특수한 맥락에서 와닿기보다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와닿을 수 있는 거라야 고급인 겁니다.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책이 많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기쁨보다는 슬픔이 이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하기가 쉬워요. 제가 문학을 읽는 이유는 일상에서 얻지 못하는, 단순하지 않은 감정을 느끼기 위함입니다. 일상을 살다 보면 ‘짜증난다', ‘힘들다', ‘기분 좋다', ‘재미있다' 등으로 말할 수 있는 간단한 감정들밖에 못 느끼잖아요. 문학을 통해서 간단하지만은 않은 감정을 느끼고 싶고, 이런 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드린 ‘고급의 슬픔'은 그것의 일종이고요.


좋은 문학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제가 읽고 난 다음에 ‘사랑은 미쳤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 있습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책입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독서를 강조하셔서 어린이 문학 전집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때 어린이용 베르테르 이야기를 읽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랑은 미쳤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문학 자체에 대한 애정이 생긴 계기가 된 책이 이 책이기도 하고요.


  친구의 아내와 사랑에 빠지는 스토리라서 뻔하고 비도덕적이기까지 하지만, 그 상황이 어쩔 수 없이 주인공 베르테르로 하여금 깊은 우울감에 빠지게 하여 끝내 그가 사랑했지만 사랑할 수 없는 여인 로테에게 받은 총으로 자살을 하는 장치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이후로는 서술에 쓰이는 장치, 그리고 서술 방식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후에 제가 주기적으로 외치고 다니는 책이 또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작가 마누엘 푸익이 쓴 <거미 여인의 키스>입니다. 몰리나와 발렌틴이라는 두 인물이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상태에서 몰리나가 발렌틴에게 영화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책의 대부분입니다. 몰리나는 동성애자로, 청소년 보호법 위반 혐의로 수감되었고 발렌틴은 사상 범죄를 이유로 수감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발렌틴이 사상범이기 때문에 감옥에 가두어 놓고 정보를 캐낼 목적으로 교도소 소장이 몰리나를 발렌틴 곁에 둔 것입니다. 몰리나는 발렌틴을 사랑하게 되었고, 몰리나가 교도소 밖으로 나가게 되었을 때 발렌틴으로부터 부탁을 받게 됩니다. 자신의 정치적 활동을 밖에서 대신 수행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몰리나는 공범으로 몰릴 수 밖에 없는 이 부탁을 들어주게 되고, 이 사실이 발각되자 감옥에 있던 발렌틴은 고문을 당하게 됩니다. 고문을 당해 제정신이 아니게 된 발렌틴은 환상을 보게 되는데, 이때 책에서 아주 길고도 지루하게 설명되었던 영화 이야기 속 장면들이 뒤섞여서 환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이 장면에서 책의 내용이 아름답게 집약되는 것을 보면서 저는 문학적 장치의 효과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느꼈습니다.


그렇다면 취향이 아니라 가치관에 영향을 미친 책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혹시 겹치나요?


  가치관과 취향은 좀 다르니까, 겹치지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건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품들이고요. 영향을 가장 많이 미친 책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입니다. 제가 철학의 길을 걸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책입니다.


어떤 대목에서 그런 결심을 하셨나요?


  특별한 대목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저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소설이 철학과 관련될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괴테의 작품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말입니다. 이방인을 다 읽고 난 뒤에 역자분께서 책의 말미에 쓰신 작품 해설을 읽으면서 실존주의라는 사상에 의해 소설이 작용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생의 부조리와 인간의 실존에 관한 글이었는데, 이걸 읽으면서 철학적 사상과 작품이 긴밀한 연결 관계를 가진다고 느꼈습니다. <이방인>이라는 소설이 카뮈 사상의 기다란 예시처럼 보인다고나 할까요.



  우리가 세상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매체에 책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진도 그 일종이다. 인터뷰이를 둘러싼 세상을 알아보기 위해서, 사진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고자 했다. 인터뷰 전 사전 만남을 하면서 이지혜 양이 사진을 일상적으로 많이 찍고, 또 대부분의 사진을 확대해서 찍는 특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 사진이 무엇인지 질문하고자 한다.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한 폭에 담지 않고, 특정한 피사체 하나를 확대해서 찍는 이유는 뭔가요? 또 어떤 대상을 주로 찍고, 그걸 왜 찍으며, 그걸 찍겠다는 생각을 어떻게 하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처음부터 팍 식는 대답일 수 있을 것 같네요. 제가 사용하고 있는 아이폰 13프로의 경우 후면에 세 개의 카메라 렌즈가 있습니다. 0.5배 광각 카메라, 기본 카메라, 3배 이상 줌 카메라입니다. 기본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 뿌옇게 나와서 가까이 있는 것이라도 조금 뒤로 가서 줌해서 찍는 겁니다. 그래야 깨끗하게 나와요.


  그리고 줌 인을 해서 찍으면, 사진에 심도가 생깁니다. 제가 카메라 용어로써 심도를 말하는 건 아니고, 사진 자체가 지닌 깊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부분만 선택해서 찍으면 담고자 하는 대상이 명료해지고 그 사진을 해석하기가 훨씬 수월해집니다. 무얼 찍는지 명확해져야 사진에 맥락이 생기기도 하고요. 이런 점에서 저는 확대해서 찍는 것을 통해 사진에 깊이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포괄적인 질문에 답을 하자면, 오늘따라 유달리 예쁜 하늘, 노을, 강아지처럼 생긴 구름이 있으면 무조건 찍어주는 게 인지상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들이 잘 갈고 닦여진 상태일 때보다도, 꾸미지 않은 일상적인 순간인데 그들이 아름다워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의 모습을 찍는 것을 좋아합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사진을 찍을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포인트는 그들이 웃지 않는 것, 포즈를 취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부모님의 사진을 그래서 많이 찍습니다. 제가 기본적으로 모두를 귀여워하다 보니 사람들의 사랑스러운 특성을 사진으로 남기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찍은 사진 중에 자주 꺼내보는 사진은 어떤 사진인가요?


  지금까지 가장 많이 다시 본 사진은 중학교 2학년 수학여행을 갔을 때 밤에 불을 꺼놓고 친구들과 플래시를 터뜨려서 찍었던 엽기 사진입니다. 그것을 볼 때마다 참을 수 없는 웃음의 가벼움이 찾아와요. 우울할 때마다 그걸 꺼내봅니다. 추억팔이를 특별히 결심하지 않는 이상 딱히 옛날 사진을 보지는 않습니다. 사진을 찍어놓고 안 본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아요. 이래서 사진을 많이 찍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애정하는 사람의 특정한 모습을 기록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것인가요?


  맞아요. 사실 사진을 다시 보지 않으니, 여행을 갈 때 사진에 초연해지고자 마음을 먹곤 합니다. 기억에만 남기고 싶어서요. 그렇지만 정말로 사진에 초연해지기 어려워서, 그리고 언젠간 사진 찍지 않은 것이 아쉬워서 후회할 것 같아서 결국 사진을 찍습니다. 정말 담고 싶었던 장면을 담으면 그것은 그 장면으로 기억에 남는 듯해요. 굳이 꺼내보지 않아도.


  기억에 남는 촬영의 추억이 있습니다. 녹음이 푸르른 초여름의 어느 날이었는데, 제가 속해 있는 사고뭉치반의 학부생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커튼이 다 올려져 있어 햇살이 너무 잘 들어오는 거예요. 그때 갑자기 두 선배님께서 들어오셔서 창가 쪽 책상에 앉으셨습니다. 서로를 마주 보고 앉으셔서 여유로운 자세로 철학적 논의를 시작하셨던 때가 있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운 겁니다. 그래서 사진을 찍었던 게 기억에 남아요. 제가 인상 깊게 바라본 피사체를 변동 없이 찍었을 때 눈물이 납니다.


남아있는 결과물로서의 사진이 아니라 사진을 찍는다는 그 개념 자체가 의미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맞아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긴 합니다. 제가 애정하는 대상에게 사진 찍음이라는 행위를 했다. 이런 느낌.


그러면 사진과 사진에 담고 싶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고, 지혜 씨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봅시다. 본인이 바라는 자신의 모습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되고 싶은 인간이 무엇인지 말할 때 어떤 사상이나 커리어상의 목표를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아요. 뚝심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우선순위로 둔 무언가가 있으면 남이 제시하는 게 무엇이든 간에 흔들리고 싶지 않아요. 특히 인간관계 속에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관심이 생기는 유형의 사람들은 전부 자기만의 것이 너무나 확고해서 남이 옆에서 ‘이게 좋다, 저게 좋다’ 아무리 얘기를 해도 오히려 그 사람들을 비판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험한 말을 하지, 흔들리지는 않습니다. 1학기 때는 좀 줏대 없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반사회적으로 보일 수 있어도 제 걸 지키면서 살고 싶어요. 나만의 무언가를 가지고 그 대상에 대해 열정을 품은 채로 두려움 없이 달려 나가는 제가 되면 좋겠어요.


그런 목표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내가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매 순간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무언가를 번복하는 일이 많아요. 그래서 일상 속에서 벌어지는 저의 결단을 통해 나아짐을 느낍니다. 우선 이 인터뷰 직전에 모든 소셜미디어 계정에서 탈퇴를 했습니다. 정신을 혼란스럽게 한다고 생각했어요. 평소에 흔히 경험하는 결단이라면, 안 읽을 걸 알면서 산 책을 한 두 페이지라도 읽어보는 것, 그리고 새로운 언어를 배워보는 시도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물론 진정한 갓생러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하찮은 것들이겠지만, 이런 결단들이 ‘내가 적어도 후퇴하고 있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게 해 줍니다. 설사 이 도전들에 실패해도 그 실패가 원동력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후퇴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상태에 대해 말하자면 목적지에 도달한 건 전혀 아닙니다. 도달하면 사회로부터 고립될 것 같아서 도달하지는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만의 것을 확고하게 지키려는 와중에도, 사회적인 관계, 특히 대화를 통한 사람들과의 상호작용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가치관이나 신념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의식한다는 건, 결국 가볍지 않은 주제들에 대해 대화를 평소에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이런 진지한 대화는 왜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진지한 대화, 혹은 소위 ‘진대'는 무엇인가요?


  제가 보기에 ‘진대'는 사실 이용당한 어휘입니다. 그 어휘가 많은 사람들에게 ‘정신적 혼란스러움 표출'의 대체어로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진대’라는 어휘가 갖고 있는 진짜 의미와 실제로 수행되는 ‘진대'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저도 과거에는 그런 류의 진지한 대화에 집착을 많이 했고, 그것을 홍보하고 다녔습니다. 지금은 집착하지 않아요.


  누군가 서로 배울 점이 있는 사람들과 궁금한 점이 있는 사람들이 만나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대화가 진정 진지한 대화일 텐데,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진대를 하자!’ 이렇게 했던 건 그저 누군가를 더 알고 싶다는 욕구였던 것 같아요. 진짜 진지한 대화는 끝나고 나서 찝찝함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인터뷰처럼요.


그렇다면 대화 참여자로서 이지혜 양은 어떤 사람인가요?


  우선 말을 적게 하는 편이 아닙니다. 남의 말 듣는 걸 잘 견디지 못해서 자꾸 끼어들려고 합니다. 저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대화가 있습니다. 하나는 친목형 대화입니다. 이때 저는 일상적인 말과 풍부한 리액션이 반반씩 섞인 발화 방식을 채택합니다. 다른 하나는 내용이 있는 대화인데요, 이럴 때 저는 그 사람에게서 최대한 많은 걸 얻어내기 위해 질문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관심 주제가 나오면 주체할 수 없이 말을 하기도 해요.


대화할 때 머릿속에 담고 있는 생각이 있나요? 예를 들면 이런 게 있을 수 있습니다. 제가 요즘 제일 많이 하는 건 ‘상대가 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까?’라는 질문입니다.


  저도 그런 생각을 굉장히 자주 합니다. 그걸 많이 두려워하기도 하고요. 그래서 애당초 서로가 서로의 말에 상당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과 자리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건 대화에서 사상적 교류를 함으로써 가능합니다. 사상적 교류라는 걸 하면 서로의 말에 관심을 안 기울일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 얘기를 듣고 빨리 나도 반박을 해야 되니까. 좋아하는 부류의 사람들과 1대 1로 만나서 주로 쓰는 방법입니다.


이제까지의 답변들에 영향을 미쳤을 이지혜 양의 대학 생활에서 힘들었던 기억과 좋았던 기억은 무엇인가요?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모두 인간관계에서 왔습니다. 저는 제가 그린 그림대로 관계가 진행되지 않아 그걸 신경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게 싫습니다.


관계를 원만하게 하고 싶은 욕구가 그만큼 커서 신경을 안 쓰고 싶어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그렇죠. 그런데 웃긴 건 즐겁고 행복했던 경험 또한 다 인간관계로부터 왔어요. 인간관계가 주는 기억의 색깔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쓰나미로부터 오는 것 같습니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라는 건 기복이 크다는 거잖아요. 그게 밑바닥에 있을 때는 가장 힘들었던 경험이 되는 거고 그게 가장 정점을 찍었을 때는 또 가장 즐거웠던 경험이 되는 거라고 생각해요.


인터뷰가 막바지에 다다랐습니다. 무겁고 큰 이야기가 아닌 일상적이고 작은 이야기들을 해보죠. 춘천이 고향이신 걸로 아는데, 이지혜 양에게 고향 춘천과 타지 서울은 어떤 곳인가요?


  저에게 서울은 최대한 빨리 뜨고 싶은 곳입니다. 저는 대도시에서 인간 문명의 이기를, 그것의 정점을 경험하면서 그것을 한 번에 보는 동안 금방 지구가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겠다는 감정을 계속 느끼거든요. 저는 춘천이 훨씬 더 편한 것 같기는 해요. 왜인지 모르겠는데 그런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는 사람이 너무 많고 보기 힘든 모습들을 너무 많이 봐요. 즐길 것도 많고. 결국 뭔가가 많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한 공간에 그렇게 많으면 안 되는 것들이 꽉 들어차 있어서 발생하는 문제가 너무 많은 것 같아요.


학업에 있어서 목표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내년 즈음에 ‘SNU in the World’ (해외 학점 이수 프로그램)로 프랑스에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프랑스어 자격증을 빨리 따고 싶고요, 철학 공부의 면에 있어서는 어떻게 목표를 세워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이번 2학기에 수업을 최대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잘 이수했으면 좋겠습니다. 장기적인 목표를 말하자면, 아주 슬픈 소설을 써보고 싶습니다.


요즘 사는 맛은 뭔가요?


  음, 사실 없습니다. 단순하게는 리코타 치즈를 먹는 것도 사는 맛입니다. 마르크스가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본질을 실현해야 된다고 얘기했잖아요. 그래서 최근에 전투 헬기를 조립하려고 사 오긴 했는데, 마르크스가 이야기하는 건 그런 좁은 의미로서의 노동이 아닌 걸 알고 있습니다. 사실 이건 장난감을 사기 위한 핑계거든요. 어찌 되었든 계속 추상적인 생각만 하지 말고 직접 내가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활동을 하면 삶의 의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여러 가지를 조립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진짜 사는 맛은, 미래에 대한 계획을 짜고 내가 어제보다 조금 더 나아진 인간이라는 확신을 얻으려는 데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이지혜 양에게 실존주의는 죽지 못해 살아가는 삶의 부조리에 관한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최고로 꼽는 문학은 현실의 벽을 마주해 힘없이 스러졌으나 그 숭고함이 영원한 역설적인 사랑을 담고 있다. 그에게 촬영이란 아름다운 순간을 자신의 기억 속에 사진의 형태로 인을 치는 작업이다. 대화에 있어서, 인간관계에 있어서, 그리고 스스로를 가꾸어 감에 있어서 그가 소개한 방법들은 줏대가 흔들리게 만드는 폭풍을 만났을 때 난파선이 되지 않기 위해 차근히 자아를 축조해 온 자의 아성이다. 기세가 어떠하든, 지속되는 것들이 있다. 부조리한 삶이 그러하고, 베르테르와 몰리나의 사랑이 그러하고, 사진 속에 담긴 기억이 그러하고, 연약하고도 세심한 일상의 처세술이 그러하다. 오늘도, 그는 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들에 둘러싸여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


플레이리스트 : Rock Will never die


이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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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인문계열 23학번이자

LNL 2A 반의 구성원

서울대학교 철학과로 전공 진입 예정

사고뭉치반 23학번 학번 대표

전) 문학 창작 동아리 ‘창문’ 소속

현) 사격동아리 및 자유전공학부 연극동아리 ‘리버액트’ 소속

사고뭉치반 소속 철학 학회 ‘거대한 하품’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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