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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준 David Kim Apr 15. 2024

[도성한담]  미국의 대통령들  Ep4

죠지 워싱턴 - 4 of 6 : 독립전쟁 1775.6.19-1783.12

“2024년 甲辰년 원단 힘차게 인류를 감싸며 하늘을 치솟아 오르는 청용(靑龍)의 웅장한 자태를 마음으로 상상하며 도성한담(賭城閑談)의 주제로 ‘미국의 대통령들’이라는 제목의 시리즈를 선정했다.

초대 죠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대통령을 시작으로 46대 조셉 바이든(Joseph Biden) 대통령에 이르는 긴 여정이다.  1789년 건국한 이래 235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미국 및 세계를 이끌어 온 46명의 대통령을 대상으로 한 분 한 분의 삶을 되살려 보고자 한껏 욕심을 부려본다.  

  지루하지 않도록 글을 읽는 분들과 함께 대화하면서 진행하려 하니 주저 없이 소통해 주기를 바라고, 짧지 않을 시간 끝까지 아낌없는 격려와 지원을 희망한다.  대부분의 대통령에 대해서 1~2 편으로 정리하겠지만 초대 죠지 워싱턴과 16대 에이브러햄 링컨 그리고 32대 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 등 3인에 대해서는 그들의 막대한 역할에 비례해 여러 번에 걸쳐 소개하게 될 것이다.

  진행하는 과정에서 인명과 지명 그리고 중요한 고유명사의 경우 참조를 돕기 위해 영어표기를 첨가할 것이며, 한글 발음표기는 현지발음으로 표기하여 한국에서 사용하는 것과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양해 바란다. ”






[桐熏]  버지니아 주로 은퇴해서 부인과 함께 농사짓고 주위사람들과 평온한 생활을 즐기던 죠지에게 영제국이 취한 여러 조치가 가져 올 풍파가 걱정이 되네요.

[해월]  풍파정도가 아니지.  죠지의 인생이 바뀌는 역사가 시작되었잖아.  '강압법'이 발표되자 식민지 13개 주에서는 결의안을 체택하면서 앞으로 닥쳐 올지도 모를 무력충돌에 대비해 민병대 훈련에 돌입하기 시작했어. 메사추세츠 식민 주정부가 폐지되자 소위 말하는 애국지사들은 임시정부를 만들고 민병대 조직을 갖추기 시작했고, 영국정부는 이를 반란이라 규정하고 진압군을 편성 비밀작전을 펼치게 되었지.  영국군과 식민지 민병대 간에 벌어진 '독립전쟁'의 첫 전투는1775년 4월 19일 메사추세츠 주 미들섹스 카운티의 랙싱턴(Lexington)과 콩코드(Concord )라는 작은 마을에서 발생되었어.  민병대가 승리했다고는 하지만 양쪽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이곳에서의 전투를 겪으면서 민병대는 보스턴을 잠시 장악하게 되고 이어서 독립을 외치며 벌어지는 8년간의 애국독립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지.


[동훈]  독립전쟁의 첫 전투가 벌어질 때 죠지는 그곳에 없었네요?

[해월]  버지니아에 있던 죠지는 전투 소식을 전해듣고는 드디어 올것이 왔다면서 1775년 5월 4일 황망히 마운트 버논을 떠나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2차 대륙회의'(Second Continental Congress)에 버지니아 주 대의원 자격으로 합류하게 돼. 

 

[동훈]  대륙회의의 성격이 약간 이해하기 어려운것 같아요, 선생님.

[해월]  맞아.  회의라기 보다는 정부라고 번역해야 할 것 같지만 역할 면에서는 의회와 정부를 합한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편의상 회의라 부르고 있어.  처음으로 13개 주를 아우르는 조직이 만들어졌고 오래전부터 대표자들의 모임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해 왔기 때문에 '회의체'라는 뜻의 Congress를 사용했던것으로 보여.  후에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후 헌법을 만들고 정부구성을 하면서 소위 삼권분립을 뜻하는 행정, 입법, 사법부를 구성함에 있어 입법부를 뜻하는 용어가 되었지.  


[동훈]  무슨 뜻이든 대륙회의에 모인 각 주의 대의원들이 무언가를 결정하면 그것이 바로 법이 되고 집행이 된다 그런 말씀이시지요?

[해월]  정확한 해석이야!  1775년 6월 14일 열린 대륙회의는 식민지 13개 주를 대표하는 임시정부에 해당하는데 이 조직이 정식 정부가 출범한 1789년 직전까지 정부의 역할을 하지.  이 임시정부에서 '대륙군' (Continental Army)을 창설했고, 메사추세츠 주 대의원인 ‘쟌 에덤스’(John Adams)가 죠지의 군경력을 인정해 그를 대륙군의 '총사령관'(Commander-in-chief)에 추천하자 대륙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그를 임명하게 되었어.  6월16일 대륙회의에 군복 정장을 하고 나타난 죠지는 총사령관 직책을 수임한다는 연설을 하면서 급료는 받지 않고 무보수 봉사하겠다고 천명했지.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죠지 워싱턴 1776


[동훈]  네?  급료를 사양해요?  않받겠다고요?  허 참!

[해월]  그렇다니까!  허세였을까?  아니면 충정심의 발로였을까?  이제 막 만들어진 새로운 정부에게 금전적 부담을 주고싶지 않은 땅부자의 배려였을수도 있고.  어쨋든 6월19일자로 대륙의회는 그를 '식민지연합' (united colonies)이라는 새 국가의 ‘4성 장군 겸 총사령관’ (General and Commander-in-Chief)에 정식 임명하였고, 6월 22일에는 그의 첫 임무로 ‘보스턴 탈환’ 이라는 명을 내렸어. 동시에 '아테마스 워드' (Artemas Ward) 소장, '호라티오 게이츠'(Horatio Gates) 부관, '찰스 리'(Charles Lee) 소장, '필립 슈러' (Philip Schuyler) 소장, '나타나엘 그린'(Nathanael Greene) 소장 등을 주요 참모로 발령내 주었지.  이때 함께한 부관 중에는 '핸리 낙스'(Henry Knox.  후에 포대장으로 진급됨) 총무와 '알렉산더 해밀턴' (Alexander Hamilton.  후에 비서실장 역임)이 있어 전쟁수행에 지대한 공을 세웠지.


[동훈]  귀에 익숙한 사람들이 있네요.

[해월]  죠지는 영국군과 달리 초기에는 자유인이든 노예든 흑인들을 대륙군에 입대시키지 않았어.  반대로 영국은 흑인들에게 영국군에 입대하면 자유를 준다고 약속했지.  흑인입대를 거부했던 죠지는 1777년 말에 이르러 전략을 바꾸게 돼.  병사들이 전장터에서 전사하거나 부상당하고 고용계약이 끝났거나 도망가는 전투병이 많아지자 죠지는 마지못해 흑인을 받아들였지.  독립전쟁이 끝나가는 1783년 죠지는 종전협정체결 과정에서 영국군이 해방시켜준 흑인 노예들을 흡수해서 다시 노예상태로 돌려보내려 했어.  이를 위해 1783년 5월 6일 종전 당시 영국군 북미 총사령관이었던 '가이 칼턴 경'(Sir Guy Carleton)에게 흑인병사들을 인계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칼턴 경은 오히려 3,000 명에 달하는 흑인병사들에게 ‘자유증명서’(freedom certificate)를 발급해주고 그들이 자기가 뉴욕시를 떠날 때 같이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  이 사건은 나중에 두고두고 양국간 문제로 남게 되었어.


[동훈]  죠지가 농장주로서 많은 흑인노예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만해도 흑인들을 소유물 정도로 생각했었을까요?  아쉬운 마음이 드네요.

[해월]  아뭏든 영국에서는 '토마스 게이지'(Thomas Gage) 장군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반란상태에 있는 보스턴에 진격시켜 시를 불침범의 요새로 바꾸어 놓고 있었어.  애국의 상징이 된 죠지는 보스턴 인근 '케임브리지'(Cambridge)에 사령부를 세우고 오합지졸인 장병들을 재훈련시키면서 예전에 자기 상관이었던 게이지장군에게 투옥된 민병대 장교들을 석방시켜줄것을 요청했어.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영국정부는 게이지 장군을 해임하고 '윌리엄 하위'(William Howe) 장군으로 교체했지.  

1776년 1월에 짧은 계약기간으로 전체 병력이 겨우 9,600명 밖에 되지 않자 주위 여러 주 소속 민병대로 병력을 보충한 죠지는 지대가 높은 '도체스터 하이츠'(Dorchester Heights) 언덕에 핸리 낙스 대령이 어렵게 가져온 대포들로 포대를 만들고, 3월 9일 밤 전격적으로 보스턴 항에 있던 군함들에 포격을 가했지.  그때까지 전혀 보지못한 독립군의 대규모 집결과 전투력에 보스턴 방어가 어렸다고 판단한 영국군은 독립군의 공격이 있자 3월 17일 보스턴을 포기하고 떠나기 시작했지. 미리 준비한 120여척의 선박에 영국군  9,906명과 추종세력들을 포함해 1만 1,000여명이 나눠타고 보스턴을 탈출했고, 죠지는 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진입해 보스턴 시를 탈환하는데 성공했어.  그는 보스턴을 점령한 병사들에게 약탈행위를 금하는 한편 완전 탈환을 확인한 뒤 바로 시정치를 민간인에게 이양했지.  퇴각한 영국군이 뉴욕시로 갈 것이라 판단한 그는 바로 뉴욕을 향해 떠났어.

1776년 3월 영국군 보스턴 탈출 모습 by William James Aylward


[동훈]  보스턴 탈환이라는 첫번째 큰 전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으니 인기가 대단했겠지요?

[해월]  목숨이 언제 날아갈지 모르는 전장터에서 인기가 무슨 대수겠어.  다만 참모들과 대화를 잘한 장군으로 알려진 그였으니까 안전한 승리를 거두기만을 바랄 뿐이었겠지.  문제는 당시 보급상황이 참담한 상태라 늘 걱정이었을거야.  1776년 7월 4일 대륙회의가 ‘독립선언문’(Declaration of Independence)을 채택했다는 소식을 들은 죠지는 전군에 “식민지연합이 이제는 자유로운 독립국가인  미합중국”이 되었음을 알리고 전군을 독려했어.  이 때 영국군은 캐나다에 주둔하던 지원군과 '독일용병대'(Hessian auxiliaries)를 합해 모두 3만 2,000명에 달했고, 뉴욕시에 진을 친 미국군은 2만3,000명이었지.  이때부터 미국 독립전쟁의 중심지는 뉴욕이 담당하기 시작했고 1783년 뉴욕에서 전쟁의 끝을 맞이하지. 

 

[동훈]  뉴욕에서 대치한 미국군의 힘이 어째 딸리는것 같네요.  게다가 용병까지 있다니요?

[해월]  동훈이 말처럼 힘이 모자랐는지 죠지가 이끄는 독립군(독립전쟁에 참여한 미국군)들은 뉴욕에 도착한 이후로는 연전연패를 하게 돼.  뉴욕의 '브루클린'(Brooklyn) 남쪽에 진을 친 워싱턴은 1776년 8월 27일 전개된 ‘롱 아일랜드전투’(Battle of Long Island.  브루클린 전투라고도 함)에서 영국군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하고 8월 30일 야밤에 주력부대와 함께 맨하탄(Manhattan)으로 퇴각했어.  곧 이어 맨하탄 북부에 영국군의 북진을 막기위해 지어놓은 '워싱턴 요새'(Fort Washington)에서  11월 16일 전투가 벌어지고 요새를 지키던 3,000명의 독립군은 참패하고 말지.  뉴욕시 북쪽의 '화잇 프레인즈'(White Plains) 지역에 자리잡았던 본진은 영국군에 쫒겨 다시 '허드슨 강'(Hudson River)을 건너 '리 요새'(Fort Lee) 지역으로 쫒겨 났어.  뉴 저지(New Jersey) 주 북부에 영국 지지자들이 많이 살고있음을 확인한 죠지는 크게 실망하면서 매서운 추위와 궁핍한 보급품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데다가, 고용이 만기가 되어 떠나거나 사기가 떨어져 도망치는 사람들이 많아져 독립군 수도 겨우 5,400 여명 밖에 되지 않은 가운데 펜실베니아 주로 철수할 수 밖에 없었지.

    

[동훈]  저런!  시작부터 연속 패전의 아픔이 다가왔네요.

[해월]  준비않된 독립군의 모습이었어.  처음부터 급조한 군대로 막강한 백전노장 영국군을 상대했어야 했으니 여간 힘들지 않았을거야.  게다가 신생국인 식민지연합 미국의 재정은 그야말로 바닥이었어.  임시정부가 재정을 확보할 법도 없었고.  전쟁터에서 식량이 없어 먹지도 못하고 매서운 추위에 떠는 군인들이 군화도 신지못하고 맨발로 싸웠다니 사기가 일어나겠어?  그런 부하들을 다독거리며 전투를 해야하는 지휘관들의 입장이 어땠을까?  전투경험이 그리 많지 않았던 죠지의 두 어깨가 얼마나 무거웠을까?  짓누르는 스트레스로 죠지의 이빨은 하나 둘 빠져나가기 시작했지.


[동훈]  아이쿠!  제가 그럴줄 알았어요.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이라는데 왜 아니겠어요?  죠지의 이빨이 나중에 하나도 없었다면서요?

[해월]  이빨 얘기는 나중에 다시하자!  어쨌든 죠지가 이끄는 독립군이 끝내 독립전쟁에서 승리하고 독립을 맞이했으니 늘 패전만 한것은 아니겠지.  승전고를 올리기 시작한것은 독립군이 펜실베니아로 후퇴하는 와중에 영국군의 독일용병들이 뉴 저지 주 '트랜턴'(Trenton.  현재 주 수도임) 지역으로 진주하면서지. 

 

[동훈]  전투가 남쪽으로 내려갔네요.

[해월]  1776년 12월25일 크리스마스날  밤중에 조용히 군인들을 이끌고 '델라웨어 강'(Delaware River)을 넘어 펜실베니아로 탈출한 죠지는 군을 재정비해 트랜턴으로 진격, 뜻밖에 쳐들어온 적군을 맞이해 혼비백산한 독일 용병을 항복시키지.  적장 ‘요한 롤’(Johann Rall)을 포함해 수십명이 사망하고 900명 이상을 포로로 잡은 이 전투의 여세를 몰아 뉴 저지 주 '프린스턴'(Princeton)에 주둔하던 영국군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말아.  영국군은 바로 뉴욕시로 철군하고 그곳에서 근 일년이나 칩거하게 되.  겨울을 맞이한 죠지도 뉴 저지주 '모리스타운'(Morristown)에 본진을 구축하고 천연두 전염병을 대비해 전군에 예방약 투여를 실시하지. 


  

Washington Crossing the Delaware River by Emanuel Leutze


[동훈]  두번의 전투에서 연속 승리하면서 독립군의 사기도 살아났겠지요?

[해월]  임시정부도 때맞추어 지원책을 발표하면서 독립군의 사기가 살아났을 뿐아니라 독립전쟁 자체의 운명도 틀이 바뀌게 되었지.  독립군 승전소식이 1777년 2월에는 영국에도 전해지게 되었고 독립군의 위세가 영국으로부터 무조건적 독립을 요구할 만큼 커졌음을 알게되는 역사적 사건이 되었던거야.

 

[동훈]  그래서 영국이 독립군 승리를 인정하기 시작했나요?   

[해월]  웬걸!  당시 캐나다에 주둔하던 영국군이 1777년 7월 뉴욕 주 북부에 있는 '사라토가'(Saratoga)로 쳐 내려오고, 뉴욕시에 주둔하던 영국군은 당시 미국정부의 수도였던 '필라델피아'(Philadelphia)로 진주했지. 죠지는 프랑스지원군과 함께 남쪽으로 처내려온 영국군에 맞서  1777년 9월 '브랜디와인'(Brandywine)과 '저먼타운'(Germantown) 두 곳에서 전투를 벌였지만 모두 패하고 말았어.


[동훈]  북쪽 사라토가 전투도 패했나요?

[해월]  아니지!  다행히 죠지가 보낸 지원군에 힘입은 독립군이 영국군을 막아내고 항복을 받아냈어.  그러나 수천명의 병사들을 이리저리 잃고 식량과 의복 그리고 막사도 없이 추운 겨울을 다시 맞이한 죠지는 필라델피아 북쪽 '벨리 훠지'(Valley Forge)에 주둔하면서 1778년 2월 뜻하지 않은 도전을 받게 되었어.  어려운 전장환경에 불만이 찬 장교들 사이에서 반란의 기미가 보이는 가운데 앞서 전투에서 패한것을 빌미로 정부에서 죠지를 해임시키려는 시도가 일어난거야. 잠시 심각한 것같던 이 시도가 주위의 지지파들이 들고일어나면서 가라앉게 되었고, 시찰단이 죠지의 본진으로 나와 현지사정을 살피게 되었어.  죠지는 식량 및 물자공급이 태부족함을 설명하고, 현장을 파악한 정부는 또다시 신속한 지원을 약속하게 되었지.  


[동훈]  그래도 다행이네요.  전투에 이기고 지는것은 兵家之常事라 하던데요…

[해월]  동훈이가 문자썼네!  맞아!  당시 전투하는 모습은 주식시장하고 똑 같아.  항상 지거나 항상 이기는것이 없으니말야.  사라토가 전투에서 독립군이 사력을 다해 싸우는 모습에 감동한 프랑스는 드디어 미국의 요청에 응하면서 정식 '군사동맹'(Treaty of Alliance)을 맺고 공식으로 미국의 독립전쟁에 가담하게 되었지.  이 때 스페인과 네델란드도 유럽에서 영국의 영향력이 줄어들기를 바라면서 이에 동조하게 되었어.  1778년 2월 16일 군사동맹을 체결한 프랑스는 미국에 지원군을 파견하고,  프랑스군 지휘관의 지도로 제대로 된 군사훈련을 다시 받은 독립군은 새로운 각오로 전투에 임하게 돼. 

죠지의 독립군 사기가 올라가자 필라델피아에 있던 영국군은 뉴욕으로 다시 퇴각하기 시작하고, 죠지는 1778년 6월 퇴각하는 영국군을 쫒으면서 뉴 저지 주 '몬머스'(Monmouth)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서 영국군과 마지막으로 북부에서의 전투를 치르게 되.


Battle of Monmouth and George Washington  by Emanuel Lutze


[동훈]  마지막 북부전투라 하심은 그후부터는 전투가 남쪽에서만 일어났나요?

[해월]  그런얘기지.  1778년 5월 새로 부임한 ‘핸리 크린턴’(Henry Clinton) 영국군 총사령관은 그해 말 3,000 명의 군인들을 뉴욕에서 남쪽 죠지아 주로 보내 남부침공을 시작했어.  이곳에서 독립군과 프랑스 해군을 물리치며 승전고를 울렸지.  게다가 영국지지자들에게 포섭당한 '이러코이'(Iroquois) 인디언 족이 6월에 펜실바니아 주 북부지역에 사는 식민지 사람들을 수백명이나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지지.  이에 화를 참지못한 죠지는 1779년 중반 군사를 동원해 이들 이러코이족을 멸족시키려는듯 공격을 감행해 수많은 이러코이족을 살해하고 이들 대부분은 케나다로 도망을 치고 말아.  이 일로 죠지에게 ‘민족말살’을 감행했다는 불명예가 씌어지기도 했지.


[동훈]  영국군과의 전투에 왜 원주민들이 끼어들었을까요?  빠졌으면 좋았을텐데요.

[해월]  그들의 삶이 그렇게 어느쪽에 붙어야 이어갈 수 있을 만큼 힘이 없었다는 얘기겠지.   독립군을 도와 영국군에 대항하던 원주민 부족도 있었을테니까.  죠지는 1779년 겨울 또다른 시련에 봉착해.  모리스타운에 진을 친 독립군에게는 뉴욕항이 얼어붙는 혹독한 추위가 몰려오지만 쌓이는 눈속에서 떨어진 식량으로 주린 배를 움켜쥐며 지내야 하는 어려울 삶 뿐이었어.  이 때를 놓치지 않고 1780년 1월 영국군 주력부대 1만2,500명이 사우스 케롤라이나 주 '찰스 타운'(Charles Town)을 침공, 지역 독립군을 물리치고, 6월에는 버지니아 주 '피드몬'(Piedmont) 지역도 점령해 버렸어.

  

[동훈]  한국동란이 일어난 1950년 겨울에 한국이 그렇게 추웠다던데 미국 동부에도 겨울에는 많이 추운가봐요?

[해월]  미국 동부에서의 겨울은 마치 한국의 50-60년대에 느꼈던것 처럼 참으로 추웠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아. 1980년 워싱턴 디씨에 있는 '죠지타운대'(Georgetown University) 대학원에 유학하던 시절을 생각해보면 겨울이 왜 그리 추웠던지 잊혀지지가 않아.  눈도 많이 오고.  눈이 쌓인 언덕길이 너무 미끄러워 여러번 차를 언덕 아래 세워놓고 집에 갔던 기억이 나네.  눈송이가 주먹만했어.  입고 입어도 추운 겨울이었지.


[동훈]  아!  그렇군요.  저는 동부에 살아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어요.

[해월]  참으로 춥고 눈도 많이 와.  겨울만되면 눈이 너무 자주 많이 와서 오죽하면 눈없는 이곳으로 이주했겠어!  아뭏튼 그때에도 추운 겨울의 전투는 모두를 힘들게 했겠지.  다행히 독립전쟁이 막바지로 접어들기 시작한 사건이 내가 살던 버지니아 주에서 발생하게 되지.  영국군 총사령관 크린턴이 버지니아 주를 공격하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전쟁의 여신이 죠지에게 미소를 보내게 된거야.  


Battle of Yorktown by Auguste Couder


1780년 12월 뉴욕의 '뉴 윈저'(New Windsor)로 진영을 옮겼던 죠지는 영국군이 버지니아 주 '포츠머스' (Portsmouth)를 공격하자 독립군, 프랑스육군과 프랑스 해군병력을 동원해서 뉴욕에 있는 영국군을 속이고 버지니아로 비밀리에 이동하지.  프랑스해군이 '체사픽'(Chesapeake)에서의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동안 죠지가 이끄는 연합군이 버지니아의 '욕타운'(Yorktown)을 에워싸기 시작했어.  영국군 주력군이 있는 이곳에서 독립연합군의 마지막 공격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8,000명의 영국군이 백기를 들고 말아.  이 날이 1781년 10월 19일인데 이날 이후 죠지는 뉴 윈저로 돌아가고 영국은 1782년 3월에 더 이상의 전투를 금지한다는 결정을 하게 되었어.  욕타운이 마지막 전투가 된 것이지.


[동훈]  와!  드디어 전쟁이 끝이 나네요!

[해월]  7년이라는 긴 세월의 전투가 끝나는 순간이지.  1782년 4월부터 영국군과 프랑스군이 미국땅을 떠나기 시작하고, 종접협상이 진행되는 가운데 1783년 8월에 죠지는 정부에 정규군을 유지하고 주방위군과는 별도의 국가방위군을 창설할것과 해군과 국가군사학교를 설립할것을 제안했지.


Yorktown Victory Monument at Colonial Natoinal Historic Site

  

[동훈]  역시 죠지는 국가의 미래를 내다보는 총사령관 다운 운영관을 가지고 있어요!

[해월]  그렇지?!  긴 전쟁을 겪으면서 터득한 지혜로 보이네.  종전협상 끝에 '파리조약'(Treaty of Paris)이 1783년 9월 3일 체결되고 영국 왕 죠지 3세가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죠지는 무거운 짐을 내려 놓을 결심을 하지.  11월 2일에 그동안 이끌어 오던 군대를 해산하면서 고별인사를 하고, 11월 25일에는 마지막으로 뉴욕을 떠나는 영국군으로부터 뉴욕시를 공식으로 인수하지.


[동훈]  승전의 장수가 미국이라는 나라를 대내외적으로 독립의 축포를 올리는 모습이 연상되네요.

[해월]  나도 그 순간에 같이 있는것 같은 착각속에 들어가.  감격의 순간이었을거야.  12월 초 같이 목숨을 걸었던 장교들의 모임에 군복을 입고 나타난 죠지는 다음과 같은 성명서를 남겼어:  

“I consider it an indispensable duty to close this last solemn act of my official life, by commending the interests of our dearest country to the protection of Almighty God, and those who have the superintendence of them, to his holy keeping.” 

(나는 공적인 삶을 엄숙히 마무리하면서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이 나라의 안전을 전능한 하나님의 보호에 맡기며, 나라일을 관리하는 분들에게도 신의 거룩한 가호가 있기를 바랍니다.)  

한마디로 나는 임무를 마치고 떠나야 할 사람으로 떠나니 미국의 운명은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이야.  어쩌면 너무 힘들어서 지겨웠을지도 모르지.  부인도 궁금하고 마운트 버논의 집과 재산들도 궁금하고.

  

[동훈]  전쟁을 치루는 8년 동안 집을 떠나있었을테니 궁금하고 걱정되는 것이 많았겠죠?  주인이 없는 농장에서 부인이 애를 많이 썼겠지만요.

[해월]  부인이 감당할 만한 규모가 아니었기때문에 죠지가 떠나있는 동안 많이 힘들었을거야.  농장의 수입도 형편없었을테고.  어쨋든 군복을 벗은 죠지는 민간인으로서 그리고 버지니아를 이끄는 정치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거야.  그리고 새로운 헌법으로 탄생한 새 국가 “미합중국”(United States of America)의 초대 대통령으로 세계 만방의 최고 지도자로서 우뚝 선 그의 모습을 보게되지.


[동훈]  그런데 선생님, 8년이라는 기간동안 전쟁을 치루었으니 전쟁의 비참함을 또 한번 목격했을텐데 양쪽의 사상자가 많이 생기지않았겠어요?

[해월]  맞아!  그것도 미국에서 발생했으니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을거야!  당시 인구가 많지 않고 대량살상 무기가 많지 않아서 그나마 숫치상 많지 않았을 뿐이야.  그리고 독립전쟁 당시 식민지쪽과 영국군쪽 사람들의 사상자 통계가 기대만큼 정확하지가 않았고.  현재까지 학자들이 알아 본 통계를 잠시 보면 식민지쪽 병사들 중 전투에서 사망한 사람들은 약 8,624명이고, 질병으로 사망한 사람들이 약 1만7,000명 그리고 포로로 잡혀 영국해군함 등에서 사망한 사람들이 약 8,500 명 정도되는것으로 알려져 있어.  이 숫자는 나중에 벌어진 남북전쟁의 50만 사망자에 비해 아주 적은 숫자이긴 하지만 당시 인구가 250만 정도밖에 되지 않은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수인것은 확실하지. 

 

[동훈]  영국군 사상자 수도 밝혀졌나요?

[해월]  영국군 사망자, 부상자 그리고 실종자들 수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약 2만 4,000 명 정도의 피해가 발생한것으로 알려져 있어.  그리고 독일인 용병들의 사망자도 약 7,5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어쨋든 양쪽에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고 끝이났으니 비극적 사건이었지.  전쟁의 결과는 미국의 탄생이었고.

엄숙한 마음으로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어보자.  (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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