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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비된화살 Oct 01. 2023

엄마 동의 없이 냉장고를 털었다.

아무리 딸이라도 내 냉장고 정리하는 건 싫다.

추석이 길다.


마치 폭주하는 기차처럼 워커홀릭인 나의 일상을 나라에서 딱 막아줬다.

멈추라고, 그만 헐떡거리라고 말이다.


명절이면 엄마집에 1박 2일 코스로 다녀가곤 했는데 이번엔 조금 더 머무르고 싶었다. 며칠후면 미국에 사는 오빠내외가 2주 일정으로 온다고 한다. 엄마가 손 닿지 않는 곳, 미처 정리하지 못한 곳 등을 정리해드리고 싶었다. 하룻밤을 자고 엄마 주도로 바깥 정리가 시작됐다.  


엄마의 지휘아래 아들과 남편의 텃밭정리가 시작됐다.


아침을 준비했다. 반찬등을 꺼내려고 냉장고 문을 여는데 생전 보이지 않던 뭉텅이들이 보였다.

늙은 오이 뭉텅이, 바짝 말라버린 고깃덩이, 뭉그러진 고추 뭉텅이...

살림을 하는 여자는 누군가 냉장고를 맘대로 정리하는 걸 의외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시어머니면 기겁을 할 노릇이고, 며느리면 기분 상해한다. 나는 애매한 '딸'이니까 엄마의 냉장고 정리, 괜찮지 않을까?

그렇게 엄마 동의 없이 처음으로 엄마의 냉장고를 털었다.




엄마는 약을 좋아하지 않는다. 약이 맛있다고 좋아라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엄마는 유독 약보다는 음식으로 치유하고 자연적으로 몸을 보호하는 것에 더 집중하는 것 같다. 그 모양새를 난 그대로 닮았다.

어린이집 원장들과 제주도로 연수 갔을 때다.

연수 후 갈 수밖에(?) 없는 관광코스(쇼핑센터)를 들렀다. 그런 명약이 없다. 말뼈 가루라는데 만병통치 약이다. 그렇게 똑똑한 석학들이 약 선전에 의심의 여지없이 스르르 지갑이 열린다. 많게는 백만 원이 넘는 약을 산다. 앞으로 약해질 본인을 위해, 친정 엄마를 위해 카드를 긁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단 십원도 안 쓴 사람은 나뿐이었다.




그랬던 엄마의 냉장고에는 김치 다음으로 약이 한 칸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황청심환 2개, 소화제라고 쓰여있는 환, 활명수 등등... 엄마에게 뭔약이 이렇게 많냐고 놀라며 물었다. 사람들이 급히 약이 필요하다고 할 때마다 하나씩 주면 다음날 두세 개를 사 오는 통에 이렇게 약부자가 되었다며 웃으신다.


엄만 그곳에서 꽤 수지맞는 약장사를 하고 계셨다.




아무리 딸이라도 맘대로 버릴 수 없으니, 엄마에게 꼬치꼬치 음식물에 대해 물었다. 검은 비닐로 싸있는 딴딴한 게 뭐냐고 하니 뒷집아저씨가 주신 고기인데 너무 오래됐네... 라며 안타까운 눈으로 몇 번을 꾹꾹 눌러봤다. 올망졸망 비닐봉지로 싼 초록빛 내용물 여섯 개가 뭐냐고 했더니 동네분 중 쑥으로 떡을 잘 만들어 드시는 분이 있는데 그분 드릴라고 했는데 깜빡하셨단다.


나에겐 의미 없어 보이는 그 음식들은 엄마에겐 나름의 스토리가 있는 것들 뿐이었다.




점점 일이 커진다.

한두 시간에 끝날일이 아닌 거 같았다.


가용에 엄마가 준 늙은 호박이랑 고구마 한 박스 등이 있어 놔두라 하고 남편과 아이들을 기차 태워 집에 보냈다. 따로따로 앉아갈 수밖에 없는 좌석이지만 신기하게 당일 기차 예매가 가능했다.


난 엄마와 단둘이 묻고 답하고를 하며 냉장고를 털어댔다.

결국 반 이상 음식물 무덤이 있는 밭 구석에 버렸다.

대부분 언제 냉장고에 들어갔는지 알 수 없는 검정비닐봉지 속 음식이었다.




그렇게 엄마의 냉장고를 정리하니 기분이 한결 가벼워졌다.

아니, 사실 내 눈만 시원해졌고 오히려 마음 한편은 무거워졌다.




돌아가신 지 10년도 넘은 시어머니가 생각나서였다.

집안의 맏며느리였던 시어머니는 명절이면 적어도 1,2주 전부터 조금씩 장을 봐 두셨다.


하루는 잡채에 넣을 시금치를 미리 사서 삶아 냉동실에 얼려 두었고, 하루는 전을 위한 동태포를 미리 떠서 냉동실에 얼려두었다. 1주일 전에는 배추김치며 총각김치를 담가두셨다. 한 2~3일 전에는 큰 양푼에 마늘을 불려 손가락이 퉁퉁 불어 쪼글쪼글해질 때까지 과도로 마늘을 깐 후 빻아 두셨다. 그러면 나는 전날에 가서 이것저것 음식을 하면 되었다.


그러던 어느 추석전날, 시댁에 갔는데 어머니는 아무것도 안 하시고 누워계셨다.


그런 모습을 처음 봤다.

아무리 아무것도 안 하신다고 해도 김치를 담가두시거나 양념에 필요한 마늘은 꼭 빻아 두셨었는데 그 해는 정말 아무것도 해두시지 않았다.


나는 머리가 하얘졌다.

어머니는 결국 그해를 못 넘기시고 하늘나라에 가셨다.




냉장고를 다 털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이런저런 얘기하며 엄마가 좋아하는 소고기 베이스로 끓인 뜨끈한 육개장을 한 사발 먹었다. 엄마가 직접 키운 쪽파도 숭덩숭덩 잘라 넣고 고사리도 넣었다. 말린 고사리는 두 시간쯤 뜨거운 물에 불리고 30분 정도 삶은 후 그대로 뒀다가 찬물에 슬슬 씻어 먹으면 보들보들한 고사리나물을 먹을 수 있다고 차분히 알려주셨다.

 

엄마에게 냉장고 왼쪽 아래칸에는 장이나 절임류를 넣어두고, 두 번째 칸에는 수시로 드시는 반찬통을 보이게 넣으라고 했다. 맨 위칸에는 드시고 남은 것을 두고 냉장고를 너무 꽉 채워 두시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엄마는 지금은 정리가 되어 있어도 또 며칠 지나면 다시 그렇게 될 텐데... 하신다.


요새 부쩍 간 맞추기가 어려워서 음식 하기가 싫어


늘 엄마는 누군가와 식사를 만들어 먹고, 차를 마시고 이야기하며 즐거워하셨는데

이젠 음식 하는 게 싫으시다니...


그러고 보니 이번 명절에 엄마는 아무런 음식도 하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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