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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다란 욕조가 있는 풀빌라에서의 동상이몽

by 찌니


1973년 제작된 다비드의 유화 '마라의 죽음'


숙소도 예약해 두지 않고 갑자기 떠난 1박 2일의 동해안 여행이었다.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경의 딸이 급하게 숙소를 예약해 준 곳이 전용 수영장이 없는 풀빌라였다. 경의 딸이 수영장이 없다는데 괜찮겠느냐고 물었을 때 세 명은 이구동성으로 우리가 수영장에서 첨벙거릴 나이냐고 흔쾌히 좋다고 했다.


그 풀빌라에는 수영장이 없는 대신 실내에 큰 욕조가 있는 넓은 공간이 있었다. 욕조는 어른 둘이 들어가서 첨벙거려도 좁지 않을 만큼 깊고 넓었다. 욕조 안에 들어가고 나갈 때 안전하게 디디거나 욕조 속에서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 있는 턱이 있어서 미니 목욕탕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욕조 밖에는 해바라기처럼 둥그런 샤워기와 함께 전신거울과 초록색 커다란 잎이 여러 개 달린 열대나무가 심어진 인조 화분과 블라인드가 내려진 통창과 새하얀 목욕타월 세 벌이 옷걸이에 반듯하게 걸린 미니 행거가 있었다. 따로 마련된 화장실과 주방으로 연결된 입구는 둥근 아치형으로 문이 없는 개방형이었고 주방에서 침실 겸 거실로 연결된 입구도 역시 둥근 아치형으로 문이 없었다. 편백나무향까지 은은히 감도는 전체적으로 고풍스러운 실내였다. 탄성을 내며 둘러볼 때는 커다란 욕조와 문이 없는 개방형 실내가 어떤 밤을 선사할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사인용 테이블세트가 있는 거실을 지나면 네 명이 뒹굴어도 남을 매트리스가 하얗고 폭신한 이불에 덮여 있었다. 매트리스 옆 커다란 통창 밖은 여러 가지 모양의 타일을 기하학적으로 붙여 놓은 작은 마당과 초록색 잎을 달고 있는 회초리처럼 가늘고 긴 나무와 역시 초록색 인조 풀을 심어 놓은 작은 화단이 있었다. 어른 키만큼 높은 담 아래쪽에는 대나무를 엮어 만든 의자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고 그 앞에는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담장 너머에는 옆 빌라의 끄트머리 일부분과 초록색 나뭇잎과 분홍색 꽃이 빼곡한 백일홍 나무와 하늘이 보였다. 하룻밤에 35만 원. 전용 수영장이 없어서 그나마 저렴한 편이라고 했다. 회비 관리를 하는 희가 예약을 했다면 이것보다 좁고 저렴한 펜션이었을 것이다.

우리 오늘 밤 이 욕조에서 셋이서 함께 발가벗고 놀아보자


셋 중 가장 짓궂은 진이 말했고 경은 그럴까? 했고 희는 싫거든!! 절대 절대! 하면서 가볍게 몸을 떠는 시늉을 했다. 상상만으로도 몸이 오그라든다는 뜻이었다. 40년이 넘은 오래된 친구사이인데도 그들은 한 번도 서로의 알몸을 본 적이 없었다. 함께 목욕탕에 간 적도 찜질방에 간 적도 없었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한 공간에서 옷을 갈아입을 때도 돌아서서 갈아입었다. 그런 사실을 모르고 지내왔는데 커다란 욕조가 있는 풀빌라에 들어와 보고서야 새삼스럽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동해안의 경포호에서 가까운 마을의 한 복판에 대여섯 채의 풀빌라를 지어 놓은 곳이었다. 마을을 감싸고 있는 낮지만 경사가 있는 언덕은 소나무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고 산책로의 끝에는 정자가 있었다. 경포호를 따라 해안산책로를 걸어가면 경포해변이 나온다고 했다.


수원에서 오전 열 시 무렵 출발하여 오후 2시 무렵 강릉 안목해변에 도착했다. 휴가철이 지난 8월 말이라 해변은 헐거웠다. 동해바다 답게 파도는 높고 물빛은 맑고 깊은 파란색이었다. 해변에 선 채로 바다와 파도를 타는 피서객들을 구경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카페에 들어가 소파같은 의자에 앉아 팥빙수를 먹었다. 운전을 해온 경과 불면으로 두세시간 밖에 자지 못한 진은 잠깐 수면도 취했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희는 카페와 바다와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잠든 친구들의 적나라한 모습을 찍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푹신하고 깨끗하고 넓은 매트리스 위를 뒹굴다가 펜션 주인이 추천해 준 꼬막비빔밥 식당에 가서 아주 만족한 저녁을 먹었다. 편의점에 들러서 네 개에 만원인 캔맥주와 먹태와 과자 몇 종류의 안주 거리를 샀다. 편의점에서 나와 차로 이동하려 할 즈음 일몰이 시작되었다. 노을을 좋아하는 희를 위해서 그들은 가까운 공원 벤치에 앉아 소나무숲 사이로 지는 붉은 노을을 오래도록 마주 보았다.


빌라로 돌아온 셋은 약속이나 한 듯이 매트리스 위에 몸을 던졌다. 아 정말 늙었나 봐 술을 먹고 몽롱한 상태로 여행 기분을 내거나 풍경 구경을 다니기보다 누워서 뒹구는 게 제일 좋네... 하는 탄식과 함께. 그 탄식에는 아쉬움과 함께 편안함도 있었다. 통창 밖은 어느새 어두워져 있었다. 청록색의 하늘 아래 화려한 분홍색을 자랑하던 배롱나무가 검은 형체로만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희는 잠깐 쉬다가 산책을 나가자고 했고 진은 맥주나 마시고 욕조에서 놀다가 자자고 했고 경은 아무래도 좋다고 했다.

매트리스 위에서 뒹굴거리며 사진을 찍고 웃고 떠들다가 세 시간 가까이 운전을 하고 온 경이 맨 먼저 잠들었다. 뒤이어 요즘 부쩍 밤잠을 설치는 진도 잠이 들었다.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잠만 잘 거냐고, 동네 밤산책 나가기로 하지 않았냐고 희가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다. 희는 혼자 밤산책을 나갔다. 넓은 들판을 지나 소나무 산책로를 걸어 정자까지 걸어갔다. 달빛이 은은하고 고왔다. 해송을 흔들며 불어오는 바람에서는 솔향과 바다내음이 느껴졌다. 혼자라는 사실이 많이 아쉽고 조금 무서웠다. 전화를 했지만 둘 다 받지 않았다.

희가 빌라로 돌아왔을 때도 두 친구는 잠들어 있었다. 희는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섰다. 샤워만 하려 했으나 커다란 욕조를 보자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어졌다. 욕조 안의 턱에 앉아 물을 받기 시작했다. 욕조가 넓고 깊어서 물은 쉽게 차오르지 않았다. 문득 물소리가 너무 큰 것 같았다. 소음을 차단할 수 있는 문이 없다는 것도 신경 쓰였다. 잠든 두 친구가 물소리에 깨어날 것 같았다. 희는 물줄기를 최대한 작게 했다. 몸을 담그는 것은 포기하고 종아리 중간까지만 겨우 물을 받고 잠갔다. 조심조심 소리 안 나게 욕조를 나가 주방에 있는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한 개 가져다 마셨다. 또 조용조용 살금살금 밖으로 나가 가지고 온 시집을 꺼내 와서 욕조의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고 읽었다. 캔 하나를 다 마시고 욕조 밖에 나가 샤워기를 틀어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마지막으로 새하얀 샤워가운을 여며 입고 전신거울 앞에서 셀카도 찍었다. 조용조용 기초화장품을 바르고 두 친구가 잠든 매트리스의 가장 넓은 곳에 가서 누웠다.

잠에서 깬 진이 시간을 확인했다. 12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두 친구는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씻지 않고 잠들었지만 은은한 편백나무향과 냉방이 잘된 탓인지 그리 불쾌하지는 않았다. 화장실에 다녀온 후 물 한 잔을 마시고 씻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커다란 욕조가 눈에 들어왔다. 뜨거운 물속에 몸을 담그고 싶어졌다. 물을 받기 위해 욕조 수전을 돌렸다. 욕조는 넓고 깊고 수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는 약했다. 빨리 물을 채우고 물속에 몸을 담그고 싶어졌다. 진은 수전을 최대한으로 틀었다. 물이 큰 소리를 내며 콸콸 쏟아져 나왔다. 물소리가 너무 크다고 생각되었다. 수전을 반대로 돌려 조금 약하게 틀었다. 물줄기가 약해지자 물은 더디게 차올랐다. 너무 더디게 차올랐다. 차오르는 것 같지도 않았다. 진은 다시 수전을 최대한으로 틀었다. 물이 콸콸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쏟아졌다. 한참 후 또 조금 약하게 틀었다. 진은 몇 번이나 그 짓을 반복했다.

욕조의 물은 그렇게 강약을 반복하면서 차올라 턱에 앉아 있는 진의 발목을 잠그고 종아리를 잠그고 엉덩이까지 차올랐다. 배꼽 아래쯤까지 차오른 찰랑거리는 맑은 물을 보니 혼자 놀기에 물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쯤 물을 받을까 생각하며 욕조에 길게 누워 보았다. 아직 배가 다 잠기지 않았다. 진은 그렇게 욕조의 턱에 머리를 대고 누워 배가 다 잠기고 나서야 수전을 잠갔다. 그러나 또 욕심이 생겼다. 누운 상태로 턱밑까지 잠기게 하고 싶어서 다시 수전을 틀었다. 물을 틀어 놓고 욕조를 나가 냉장고에서 캔맥주와 먹태 안주를 꺼내와 욕조의 평평한 곳에 놓고 다시 욕조에 들어가 천천히 마시기 시작했다. 물이 턱 밑에서 찼다. 턱밑에서 물이 찰랑거리자 기분이 좋아졌다. 물의 온도는 알맞게 뜨거웠다. 이마에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누워서 마시다가 불편해지면 앉아서 마시고 또 불편하거나 지루해지면 엎드려서도 마셨다. 자주 자세를 바꾸었다. 그때마다 욕조의 물이 철렁거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오줌이 마려웠다. 욕조를 나가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보고 다시 욕조의 물에 들어갔다. 물이 식은 것 같아서 또 수전을 틀어 뜨거운 물을 콸콸 받았다. 누워 있다가 엎드려 있다가 앉아 있기를 반복했다. 또 오줌이 마려워 화장실에 다녀왔다. 물이 식은 것 같아 또 뜨거운 물을 콸콸 받았다. 한 캔을 다 마셨다. 일어나 냉장고에 가서 또 캔맥주 한 개를 가지고 와서 또 욕조에 들어가 마시기 시작했다. 물이 식은 것 같아 또 뜨거운 물을 틀어 콸콸 받았다. 오줌이 또 마려웠다. 화장실에 가서 누고 왔다. 캔을 두 개를 다 비웠다. 조금 몽롱해지는 것 같았다. 또 오줌이 마려웠다. 귀찮아... 그냥 눌까... 안 돼... 두 친구 중 누구라도 깨어서 욕조에 들어올 수도 있으니까... 그럴 때를 대비해서 귀찮아도 일어나 화장실에 다녀왔다. 진의 한 때 꿈은 소설가였다. 지금은 거의 포기 상태지만 아직도 어떤 상황을 소설로 엮어보는 상상력은 버릇처럼 남아 있다. 진은 어느새 지금의 상황을 가지고 머릿속으로 소설을 엮고 있었다.

욕조가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작가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표지를 장식한 다비드의 유화 ‘마라의 죽음’이었다. 머리에 터번처럼 생긴 수건을 두르고 있고 욕조 밖으로 늘어뜨려진 손에 새의 깃털이 달린 펜을 쥔 채로 죽어 있었지. 욕조 밖으로 늘어뜨려진 커다란 흰색 수건과 늘어뜨려진 팔 여기저기에 빨간색 핏자국이 있었지. 마라의 쇄골 밑에도 칼에 찔린 듯 가로로 벌어진 피부에 붉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리고 있었지...


어느새 진은 마지막 남은 캔맥주를 가져와 마시고 있었다. 캔을 내려놓고 ‘마라의 죽음’ 그림 속의 마라처럼 욕조 밖으로 팔을 늘어뜨리고 머리도 늘어뜨리고 힘없이 앉아 있어 보았다. 머릿속에서 이야기 한 편이 시작되고 있었다. 진의 얼굴은 무엇엔가 완전히 몰입해 있는 듯 진지하면서도 다른 세상을 헤매는 듯 몽롱하기도 했다.


휴가철 막바지인 8월 말 아침 동해안의 한 풀빌라 욕조에서 한 여자의 시신이 발견된다. 여자는 욕조에서 손목을 그어 자살한 듯 보인다. 경찰이 도착하고 구급차가 도착하고 마을 사람들과 휴양객들이 몰려들어 웅성거린다. 그 모든 광경을 저 멀리서 지켜보는 한 남자가 있다. 남자의 표정은 고통스럽게 일그러져 있다. 깊은 눈동자 한가득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남자는 눈물이 흘러내리기 전 서둘러 그곳을 떠난다. 자살한 것으로 추정하면서 부검을 한 결과 경찰은 여자의 목 부근에서 눌린 흔적을 발견한다. 사건 조사를 위해 빌라 주변 CCTV를 돌려보던 경찰은 그 슬프고 고통스럽게 돌아선 그 남자를 발견한다....

여자와 남자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해서는 안 될 사랑... 어떻게 엮어야 될까? 유부남 유부녀? 유부남과 미혼녀? 유부녀와 미혼남? 이복남매? 친구의 남편 혹은 아내? 형부와 처제? 아 식상해 식상해... 스토커? 죽음으로까지 가야 하는 치명적인 사랑이어야 하는데... 그런 사랑이 뭐가 있을까... 아니 아니 사랑은 너무 진부하고 식상해... 뭐가 있을까... 욕조에서 자살한 여자의 사연이... 사랑 외에... 감당 못할 빚? 성폭행? 우울증? 아니다... 그래도 사랑이지... 사랑이야... 여자는 일 년 전 사랑하는 남자와 이 빌라의 욕조에서 뜨겁고 감미롭고 잊지 못할 밤을 보낸 거야... 그러면서 약속했지... 일 년 후 다시 이곳에서 만나자고... 여자는 약속대로 이곳에 다시 왔는데 남자는 오지 않았어. 여자는 술을 마시며 남자를 기다리며 남자와의 시간을 추억하며 밤을 보내다가 손목을 긋는 거지...

그 시간 잠든 줄 알았던 경과 희는 잠이 깨어 있었다. 콸콸 쏟아지는 물소리 들어가고 나갈 때 첨벙거리는 물소리 냉장고 여닫는 소리 캔맥주 따는 소리 봉지 찢는 소리소리... 좀 조용하다 싶으면 또 콸콸 물 쏟아지는 소리 첨벙거리는 소리소리... 또 조용하다 싶으면 또 콸콸....


경은 잠 안 자고 욕조에서 첨벙거리는 그 친구가 희라고 생각했다. 진과 함께 잠들었었으니까... 세상에나... 가엾은 희... 밤마다 잠 못 들고 저렇게 보내는 건가... 남편과 사별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가엾은 희... 지난겨울에 소개해 준 그 남자와 잘 됐으면 얼마나 좋아... 참 잘 어울리는 커플이라고 생각했는데... 취미도 같고 세 살 많은 나이고 딱 괜찮고 생긴 거도 괜찮고... 정말 잘될 거라 생각했는데... 다시 또 알아봐야 하나... 남편한테 또 괜찮은 남자 알아보라고 해볼까... 일어나서 가 보는 게 나을까 그냥 두는 게 나을까... 아 가엾은 희... 밤마다 저렇게 보내는 거야? 가여운 내 친구...

늦게 잠든 희도 진이 내는 소음에 잠에서 깨어나 있었다. 쟤는 진짜... 못 말려 못 말려... 어쩜 저렇게 다른 사람 생각은 하지 않는지... 우리가 이렇게 자고 있으면 조심해야 되는 거 아니야? 어쩜 저렇게 혼자 있는 것처럼 거침없이 행동하는 거야? 남의 시선 남의 생각 남의 입장 따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저 성격... 가끔은 부럽기도 한 성격이지만 지금은 아니지 아니야... 도대체 몇 시간 째야... 가서 조용히 하라고 말해 볼까... 분명 옷을 벗고 있을 텐데... 민망하겠지... 무안하겠지... 도대체 언제 잘 거야... 자야 되는데... 아 진짜... 경은 피곤해서 잘 자나 보네... 이 시끄러움 속에서도... 경포 바닷가 가서 일출 보려면 빨리 자야 하는데... 아 진짜... 도대체 몇 시나 된 거지? 밤 새 저럴 건가? 아 짜증 나...

경과 희는 그렇게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며 잠든 척 누워 있었다. 그것이 친구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다. 진이 머리속으로 엮던 이야기를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잠자리로 돌아와 누우려 할 때에 희가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야 진짜 너... 도대체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잤네... 넌 진짜...

그때서야 경도 일어나면서 어리둥절하게 말했다. 뭐야? 희가 아니고 진이었어? 난 희가 잠 못 자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진 너였어? 너 언제 일어난 거야? 나랑 같이 잠든 거 아니었어? 나는 희가 밤새 그러는 줄 알고... 마음 아파했잖아... 진 너 참... 넌 줄 알았으면 일어나 가보는 건데... 시끄러워서 잠을 못 잤잖아...


세 친구는 새벽 세시가 넘어 그렇게 마주 앉았다.

진 : 야 뭐야 니들... 잠이 깼으면 일어나 와 봤어야지...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하라 든 거 같이 욕조에 들어가 놀든가... 나는 누구라도 와주길 기다렸는데 안 오길래 깊은 잠에 빠진 줄 알았지... 깨어 있으면서 왜 가만히 있었던 거야? 웃긴다 너네...

희 : 너 민망해할 것 같아서 안 갔지... 틀림없이 벗고 있을 텐데...

경 : 난 희가 잠이 안 와서 그러고 있는 줄 알았지... 에고 우리 희 밤마다 저렇게 혼자 외로움을 삭이고 있는구나 짠해져서...

진 : 나는 너네가 올 것 같아서 팬티도 못 벗고 있었구먼... 오줌도 몇 번이나 화장실에 가서 눴구먼... 그냥 물속에 누고 싶기도 했는데...


진의 이 말에 셋은 한꺼번에 웃기 시작했다. 한참을 웃었다.

희 : 도대체 지금 몇 시야? 세상에 네 시가 넘었어... 진 너는 도대체 몇 시간 동안 그러고 있었던 거야? 못 말린다 진짜... 풀빌라였으니까 망정이지 펜션이었으면... 몇 해 전에는 우리 웃고 떠들다가 옆 방에서 벽 두드리며 주의 줬었잖아...

진 : 내가 그래서 맘 놓고 첨벙거린 거 아니냐...

희 : 우리 생각은 안 했어? 우리가 너 때문에 잠 못자리라는 건 생각 안 했냐고?

진 : 너네야 뭐... 시끄러우면 깨서 오겠지 했다니까... 일어나서 오라고 같이 놀자고 더 첨벙거렸지... 하하하... 희 : 야 빨리 서둘러 일출 보러 가야 돼... 강릉 경포대 일출 시간이 5시 반이야... 한 30분 걸어가야 하니까 서둘러 빨리...


언제 그런 조사까지 다 해놨냐면서 경과 진도 일어나 서둘렀다. 밖에는 아직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마을을 나와 도로를 건너니 넓은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 강릉호라고 했다. 일출을 놓칠까 희가 걸음을 빨리 해서 저만치 앞서 걸어갔고 그 뒤를 경이 따라갔고 진은 한참 뒤처져 있는데도 천천히 걸었다. 호수 위 오리 가족도 구경하고 해안 산책로를 뛰는 조깅족들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하면서 걸었다. 동쪽 하늘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바다가 가까워지자 진은 걸음을 빨리 했다. 진이 바닷가 모래밭에 발을 내디뎠을 때 수평선에서 막 떠오르는 붉은 해를 등지고 경과 희가 빨리 오라고 손짓하는 모습이 보였다. 진은 모래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풀빌라 #마라의 죽음 #세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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