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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가운데'를 다시 읽고

by 찌니



독서모임 덕분에 루이제 린저의 ‘삶의 한가운데(민음사, 2021)’를 다시 읽게 되었다. 너무나 유명한 책이고 읽은 책이고 내용도 알기에 도서관에서 대여해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쉽게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다. 밑줄을 긋고 싶어서 손가락이 근질거렸다. 결국 알라딘 중고서점에 가서 구매했다. 추억 속의 옛사랑을 만나 다시 사랑에 빠진 것 같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때때로 모든 것을 걸만한 위험이 없는 삶이란 아무 가치가 없어 66p’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언제든 따뜻한 침대에서 나와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는 것, 가시나무를 손으로 잡는 것, 사나운 개한테 가는 것, 매질을 견디고 소금을 먹는 일 등 뭐든지 할 수 있어야 해 156p’ ‘나는 빈방과 역의 대합실들, 사람을 붙들어두지 않는 것을 좋아해 158p’라는 문장으로 대변할 수 있는 여자주인공 니나의 격정적인 삶에 다시 매료되었다고 해야 하겠다.

책의 표지에 루이제 린저의 흑백 사진이 있다. 눈밑과 입술 언저리에 주름살이 선명한 노년의 얼굴에 어딘가 모를 먼 곳을 바라보는 눈빛이다. 니나는 늙는 것이 두렵지 않다고 외쳤다. 니나가 실존인물로 늙었다면 아마도 이런 얼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린 소녀에서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하기까지 20년 가까이 그녀의 인생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힘겨운 사랑을 이어간 의사이면서 교수인 슈타인의 삶도 다시 들여다보였다.


니나는 어릴 때 언니의 결혼식 날 면사포를 들고 가도록 시키자 몹시 화난 얼굴로 하얗게 질려 가지고는 언니의 면사포에 침을 뱉은 아이였다. 무엇인가가 자신을 떠날 때 언제나 강한 만족감을 느낀다면서 집이 폭탄을 맞아 불탔을 때 소리 지르고 울부짖는 사람들 속에서 니나는 자기 삶에서 짐 하나가 덜어져서 기뻤다고 했다.

마흔 살 미혼의 의사 슈타인에게 패혈증에 걸린 어린 여자 환자 니나가 들어왔다. 마치 황야의 바람에 불려 온 것처럼 갈색의 깡마른 모습에 쌀쌀맞고 심각했다. 여자는 가볍고 열 때문에 뜨겁고 먼지 냄새와 땀 냄새가 풍겼고 추해 보였다. 그 만남이 이별과 만남을 반복하는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슈타인 사랑의 시작이었다.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채로 또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여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고 또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고 자살을 기도하고 나치에 저항하는 반정부 활동을 하다가 투옥되는 등 불안하고 위험하고 자유분방한 삶을 산다.

슈타인은 아이들이 있는 상태로 다시 정치적인 일에 뛰어들어 정부의 감시를 받는 요주의 인물이 된 니나를 설득하러 간다. 지금 정부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은 전혀 소용없는 일이라고, 이미 정권은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고, 굴러가는 바퀴는 당신들의 저항과 희생과 어떤 영웅적인 행위에 의해 멈추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저절로 멈추는 거라고.

‘그렇다면 나는 살지 말라는 얘긴가요?’라고 니나는 외친다. ‘나는 살려고 해요. 나는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사랑해요. 그러나 당신은 이해할 수 없어요. 당신은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요. 당신은 삶을 비켜갔어요. 한 번도 모험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당신은 아무것도 얻지도 못했고 잃지도 않았어요.... 당신의 인생은 마치 일요일을 망쳐버리는 재미없고 어려운 학교 숙제 같아요. 얼마든지 나를 부박하다고 생각하세요. 아마 삶에 대한 당신의 불안이 삶을 사랑하는 내 방식보다 더 부박할지 몰라요 349 P’

‘내가 제멋대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틀렸어요. 저는 남들을 따라서 사는 게 아니라 내 삶을 살고 있어요. 내 말을 이해해 주길 바라요. 당신도 살기 위해 한번쯤은 그 고상한 조심성을 방기해도 결코 해가 되지는 않을 거예요. 351p’

그리고 니나는 거듭되는 슈타인의 설득에 이렇게도 외친다. 나를 제발 내버려 두세요. 이 엄청난 긴장을 해소하게끔 제발 그냥 내버려 두세요... 굳이 말한다면 나는 그렇게 해야만 해요... 당신은 이해 못 해요... 이해 못 해요...

어쩌면 니나는 자신의 불안정하고 위험한 삶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운명,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하여 이미 정해져 있는 목숨이나 처지.


예전에는 니나의 삶이 멋지게만 보여 선망했다. 그러나 이번엔 생각이 바뀌었다. 멋지고 부럽고 따라 하고 싶은 삶이라는 생각보다 그런 위태롭고 불안정한 삶의 불안과 고뇌와 고통이 먼저 다가왔다. 니나가 나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고, 당신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외친 말에서는 안도했다. 그런 삶은 그렇게 살고 싶다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운명 지어진 사람만이 그렇게 살 수 있는 것이라고.... 나는 이렇게 평범하고 하찮고 보잘것없는 나의 삶을 나도 모르게 비겁하게 변명하고 있었다.

독서모임 토론 중 슈타인의 삶은 강가의 삶이고 니나의 삶을 강 한가운데의 삶이라 비유한 분이 있었다. 그때는 절묘한 비유라고 고개를 끄덕였었는데 집에 돌아오면서 생각이 이렇게 바뀌었다. 의사이면서 교수로 안정된 삶을 사는 중년의 슈타인이 니나라는 자유분방하고 위험한 스무 살이나 어린 여자를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슈타인 또한 강의 한가운데로 뛰어든 삶이 아닐까 하는.


‘생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생을 너무나 꽉 껴안았기에, 그 생이 자기를 배반했을 때 그 생을 가차 없이 버릴 줄 아는 여자. 사실 열심히 살지 않는 자, 생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찌 노여워할 수 있겠는가, 어찌 자기 목숨을 버릴 수 있겠는가. 가만히 있기보다는 차라리 모험을 택해 전부를 기꺼이 잃으려고 하는 여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질 줄 아는 여자, 심지어 그 사랑까지 버릴 줄 아는 여자. 늙는 것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여자. 충동과 격정에 자신을 내맡길 줄 아는 여자. 377 ~ 378p – 작품해설 중’


나는 강가에서 강 한가운데를 동경하면서 살다가 늙어버렸다. 강가의 삶에 만족하지도 못하고 강 한가운데로 나아갈 용기도 없는, 그렇다고 강 한가운데를 완전히 외면하지도 못하고 끊임없이 동경했다. 한 번도 삶의 한가운데를 살지 못한 것이다. 안주와 탈주 사이 팽팽한 줄다리기는 늘 안주의 승으로 끝났고 그때마다 자기 비하와 자기 연민 속을 허우적댔다.

뜨거운 햇볕 속에 선선한 바람이 느껴진다. 나의 강가에도 가을이 오고 있다. 탈주와 안주 사이 줄다리기를 알리는 호르라기 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주 들리는 계절이 오고 있는 것이다. 비록 또다시 안주의 승이 계속되더라도 이젠 안주의 삶도 괜찮다고 괜찮다고... 토닥토닥 해주고 싶다.


#삶의 한가운데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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