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태어났다. 양육과 교육은 다른 차원인 것을 아이가 뱃 속에서 태어난 뒤에 알았다. 처음 우리 집으로 데려왔고 나는 그 아이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부모가 되어 있었다. 왜 우는지조차 전혀 모르고 신생아는 잔다던데 잠도 안자고 꽥꽥 울어대는 아이는 나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우아하게 SNS에서 육아하는 사람들을 보면 다 거짓인건지, 아니면 내가 무능력한 건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보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이와의 첫날은 12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다.
우리 아이는 유독 잠이 없고 많이 먹었고 활동성이 최대였다. 울었던 이유는 심심하거나 자기 싫거나 배가 고픈 경우 였는데 이 왕초보 엄마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나씩 하나씩 터득되어 갔지만 매일이 변수였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렇게 많이 울었던 이유는 심심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늘 깨어있는 아이는 나에게 놀아달라 울었던건데 아이와 노는 법을 잘 몰랐고, 말도 잘 안붙였으니 말이다. (학교에서 계속 말을 해야하는 나는 집에 오면 말이 없어진다. )
그런데 아이를 낳고 보니 나는 아이 울음소리를 너무 너무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칭얼대는 것도 못견디는 사람이었다. 육아하기에는 치명적인 성격인 것이다. 그래서 이 방법 저 방법을 다 써보다가 그냥 들춰 업는 것을 선택했다. 울면 집안일 할 때도, 나갈 때도, 밥먹을 때도 언제든지 업었다. 백일 때 이미 10kg이 넘은 우량아를 허리가 휘어지게 업었다. 나를 구제한 건 그 누구도 아닌 아기띠였다. 복직까지 쉼없이 업었다. 내가 업어 줄 수 있는 만큼.
그리고 유모차에 타고 밖에 나가면 울지 않았다. 밖에는 많은 볼거리가 있고, 돌 즈음 지날 때부터 조금은 걸어서 짧은 산책도 가능해져서 일정한 시간에 아이와 밖에 나갔다. 이 때부터는 아기띠에서 나의 최애템은 유모차로 바뀌었다. 산책하고 유모차에 태워서 한바퀴 돌면 이내 낮잠이 들었고 나는 차 한잔 할 수 있었다.
좀 이 생활이 정착이 되나 싶었는데 다음 문제가 생겼다. 15개월쯤 복직 전 어린이집 적응을 위해 1층에 있는 가정식 어린이집에 보냈다. 그 때 선생님께서 며칠 나에게 아이가 잘 적응하도록 와 있으라고 하셔서 어린이집 체험을 본의 아니게 하게 되었다. 직업 특성상 선생님을 많이 관찰했다. 교사라는 직업은 늘 배워야 하는 직업이기에 난 다른 선생님들을 뵐 때면 내가 벤치마킹 할 부분이 없는지를 살핀다. 딸을 맡게 되신 첫 어린이집 선생님께서는 쉴 새 없이 말씀을 하셨다. 너무 피곤하시겠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딸이 하는 모든 행동에 공감해주시고 대답해주셨다. 나와 적막에서 살던 아이가 얼마나 재미있었을까.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실제로 딸은 말은 알아들었지만 엄마 아빠 외에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크면 하겠지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말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주지 않았구나하는 생각을 그 어린이집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 때부터 무슨 말이든 딸에게 했다. 오늘은 하늘이 파랗구나. 구름이 둥둥 떠다니고 있어. 가을이 와서 나뭇잎 색깔이 바뀌었어. 비가 와서 물웅덩이에 물이 고였구나. 엄마는 곧 학교라는 곳을 일을 하러 갈거야. 그럼 너는 어린이집에 더 길게 있게 될거야. 하지만 엄마는 일이 끝나면 같은 시간에 너를 데리러 갈거야. 등등.. 대답없는 나의 잡담이 끊이지를 않았다. 1년 반동안 못했던 이야기를 다 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지금도 그 첫 번째 딸을 몇 달 맡아주신 어린이집 선생님께 감사함을 느낀다. 나의 육아의 첫 번째 스승님이시다. 딸이 마지막으로 그 어린이집을 나가게 된 날, 선생님은 딸을 안고 펑펑 우셨다. 몇 달인데 정이 많이 드셨다고... 그런 분이 오래오래 어린이집 선생님을 하실 수 있게 어린이집 교육 환경이 나아지기를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딸은 어린이집을 나의 학교 1층에 있는 어린이집으로 옮겼다. 딸이 뱃속에 있을 무렵 그 어린이집을 생긴 것을 우연히 공문을 통해 알았고, 나는 학교를 휴직 전에 미리 그 학교로 옮겼다. 그렇게 경쟁률이 센 학교는 아니어서 잘 들어갈 수 있었고, 복직 전에 나는 그 학교 길건너로 이사를 갔다.
어떤 이들은 어린이집 하나 때문에 뭘 그렇게까지 하나 싶을 수 있다. 이유가 있다. 나는 남편과 주말 부부이고, 친정이 멀리 있고, 시댁은 이미 아가씨 아이를 돌봐주고 계신 상황이었다. 나는 복직을 해야 하는데 그야말로 독박육아였다. 다행히 나의 친구들과 지인들이 하나 둘 그 동네로 이사를 오고 공동육아도 하였다. 나의 회식에는 친구가 봐주고 내 회식에는 내 친구가 봐주고 그렇게 아이를 키웠다. 나의 육아는 어린이집 선생님들과의 콜라보였다. 나에게 가장 감사하고 또 감사한 사람은 어린이집 선생님이시다. 젓가락질도 어린이집에서 배워왔고, 한글을 조금 빨리 뗀 덕분에 책읽기도 자주 시켜주시고, 여러 가지 경험도 할 수 있게 해 준 곳이 바로 어린이집이다.
학교 안의 어린이집을 아이가 다니는 것은 참 튀는 행동이다. 아침마다 유모차를 밀면서 출근하는 키 큰 선생님 하면 전교 학부모님들이 다 아시는 듯 하였다. 차라도 몰고오면 티가 덜 날텐데 나는 그 당시 운전을 못해서 늘 유모차를 밀면서 가열차게 출근을 했다. 그런데 항상 난리가 나는 건 퇴근할 때 였다. 퇴근을 할 때면 아이는 그 학교 운동장의 놀이터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려 했다. 놀고 가겠다고 난리 치는 아이를 달랑 들고 늘 교회 큰 버스 뒤에 가서 야단을 치거나 애원을 했다. 혹시나 학부모님들이 볼까봐서이다. 어느 정도 타협이 되면 빠르게 집에 가서 밥을 먹이고 그 때부터 동네에 모든 놀이터를 다 돌아다녔다. 깜깜한 밤이 될 때까지.... 기어올라가고 뛰어가고 넘어가고 흙놀이하고.... 매일매일.... 모든 체력을 다 소진해야 겨우 잘 수 있는 아이였기에..
그럼 안아팠냐고 반문하시는 분이 계실 듯 하다. 타고난 체질이 모두 있듯이 정말 건강해 보이지만 병원을 쉴 새 없이 다니던 나였다. 약처방을 잘한다는 어린이집에 가기 위해 퇴근과 동시에 그 병원을 골인하기 위해 유모차를 끌고 달렸던 적이 거의 며칠에 한번이었다. 체력이 좋다고 안아픈 건 아니었다. 그리고 체질상 열이 심심하면 39.5도였다. 새벽 3,4시에 아이를 깨워서 욕조에 넣은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그리고 5시 쯤 시부모님께 전화를 한다. 아플 때는 가끔 오셔서 봐주실 수 있으셔서 부탁을 드린다. 나는 이런 상태에서 학교 출근을 한다. 어떻게 살았는지 지금 쓰면서 의문이긴 하다.
내가 이렇게 구구절절 쓰는 이유는 하나다. 지금 내 아이만 아프고, 나만 힘들고, 나만 우울할 거야라고 생각하시는 모든 초보 엄마들께. 그대만 그런거 아니랍니다.를 이야기 해주고 싶다. 누구나 겪고 누구나 지나가야 할 시간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싶어서이다.
그리고 조금 부족해도 모자라도 아쉬워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 부족함마저 마음 넒은 우리의 자녀들은 알아준다는 것이다. 어느날 봤던 글 중에 <부모가 자식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부모를 더 많이 용서한다.>라는 글 귀를 보고 펑펑 운 적이 있다. 지금도 이 문장은 나의 가슴 속에 남아 있다. 사춘기에 접어든 나의 아이와 실랑이를 벌이고 늘 든 생각이 오늘도 아이가 나를 용서했구나 라는 것이다. 그리고 반성한다.
아이를 키우는 답답함에 육아서를 100권 넘게 읽었는데 복직하니까 그 육아서들은 교육서의 역할을 했고 나의 학생들과 소통이 훨씬 원활해졌다. 문제 행동을 문제행동으로만 보지 않게 되었고 이 아이가 이렇게 행동하게 된 원인을 찾고 그 부분에 대해 아이와 상담하고 나면 훨씬 개선된 행동이 나온다. 나는 내 아이를 키우다가 내가 성장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