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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나라의 정원사 May 08. 2024

죽은 자의 집청소


 시간이 날 때마다  커피를 마시러 가던 집이 있었다. 그분은  나랑 취미가 비슷해서 일상을 공유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이사 와서 석 달쯤 되었을까 갑자기 집을 부동산에 내야겠다고 말했다. 이유는 자기가 산 집이 할머니가 고독사를 당한 집이라서 알고는 못 살겠다고 서둘러 집을 팔았다. 그때부터였을까? 혼자 살다가 죽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느 순간 특별한 이야기가 아닌 내 주변의 일처럼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죽은 자의 집 청소’는 내겐 그다지 낯선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 책의 핵심은 죽은 뒤에 남겨진 흔적에 대해서 독자들의 호기심만 건들지 않는다. 죽은 자의 유해를 거두면서 느꼈던 작가의 따뜻한 시선과 연민이 책 읽는 내내 느껴졌다. 왜 이런 선택을 하게 되었을까에 대한 안타까움, 구더기가 나오는 오물을 손으로 집으면서도 이 집에 살았던 사람들을 걱정하는 공감대가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작가는 시를 전공한 사람답게 내면의 깊이를 더하는 문장이라던가 필력 때문에 이 책은 품격을 더했다.


 특수청소를 하는 작가 김완은 청소를 하러 가면 그 공간에 머문 유품들이 말을 걸어온다고 한다. 그것을 따라 죽은 자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아내며 그들을 위로한다. 젊은 남자의 서랍에서 나온 무수한 이력서나 자기소개서라던가, 정신질환약이 수북이 쌓여있다던가, 젊은 여자 집에서 나온 두 개의 칫솔이나 숟가락, 젓가락. 그런 삶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예를 갖춘다. 작가 김완에게 고객은 이런 남겨진 사물들의 인사로부터 시작한다.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을 사람들에 대해 그들의 흔적을 따라 이해하고 깊이 공감하는 부분은 이 책을 결코 죽음만 다루지 않는 지금도 산자의 삶을 연결 지우며 깊이 통찰하고 있다. 이 책의 특별함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다.


 고독사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인지 오 년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봤던 일본영화 ‘고독사’도 같이 떠올랐다. 그곳에도 유품회사 직원이 주인공이었는데 그곳의 풍경은 상상하지도 못한 죽음의 공기가 떠돌고 있었다. 어지럽게 널린 싱크대에는 바퀴벌레들이 득실거리고, 코를 찌르는 악취는 호흡곤란을 일으켰다. 오랫동안 병상을 지킨 침대에는 체액이 흘러 바닥까지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던 기억도 난다. 청소를 수행하러 온 이들은 하나같이 비참한 죽음 앞에서 호들갑 떨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엄두도 못해 낼일은 이들은 천연덕스럽게 해내고 있었다. 인간은 죽을 때는 혼자고, 죽음은 혼자 맞을 수밖에 없지만 살아있을 때는 처절하게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어 한다. 주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지만 죽은 자가 남겨진 사물들은 그렇게 현재진행형으로 남아있었다. 


 이 책은 총 2개의 챕터로 나눈다. 1장은 청소의뢰를 받고 찾아간 집들의 에피소드가 마치 다큐를 보듯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2장은 청소를 하면서 느꼈던 여러 가지 감정을 작가의 시선으로 담담하게 담았다. 그가 나열한 죽음들을 마주하면서 세상은 내가 알지 못하는 참 많은 상황이 있다는 걸 또다시 알게 되었다. 작가는 죽음 가까이에서 할 수 있는 예의를 다한다. 묵념을 하고, 향을 피워 올리기도 하고, 또 망자에게 묻기도 한다. 그러면서 죽은 자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가져야만 이 일을 수행해 낼 수 있다고 한다. 책을 읽어보면 죽음마다 사연이 있다. 죽은 고양이로 도배한 방이라던가, 페트병에 누군가가 담아낸 오줌이라던가, 일찍 고인이 된 남편의 책을 버리지 않고 남편의 추억까지 같이 공유하며 살다가 죽은 할머니의 방이라던가. 이렇듯 방안에 떠도는 사연들을 접하면서 작가는 망자의 상황을 유추하고 그 마음 편에 선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건 아무래도 책이 많이 있었던 집이 아닐까 싶다. 작가는 무수히 꽂힌 서가를 보며 책을 하나씩 형상화 한 점이 특이했다. ‘책의 현란한 등짝들, 그 뒤에서 오래 묵은 먼지만 증인이 되어 시답잖은 침묵처럼 켜켜이 남았다’는 표현은 너무나 시적이다. 책장의 앙상한 골격은 마치 죽은 남편의 등이라고 표현한다. 청소하고 비로소 빈 책장을 바라보며 ‘일생동안 그가 짊어졌던 것이 떠 오른다’란 글에는 나도 모르게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2부의 인터뷰 장면은 책을 덮으면서 꽤 잔상이 남았던 대목이다.

 그는 대부분 사람들은 내 직업을 특별한 일을 한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어떤 이는 숭고하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런 달콤한 착각이 있다면 홀로 죽음을 맞이한 집에 들어서는 순간 산산이 조각난다. 세상에 하고많은 직업 중에 누군가의 죽음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삶이 그건 바로 자신이 하는 일이라고, 죽는 자가 늘어날수록 활기를 띠는 비즈니스. 그 직업적인 아이러니를 떼어 놓고는 이일을 설명할 수 없다. 자신의 죄책감이 발을 디디고 선 땅. 그의 문장은 지극히 사실적이고 강렬하다. 오히려 자신 앞에 놓인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자신인 듯 죄책감으로 느껴진다는 표현에서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발견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단지 청소를 업으로 하고 있는 청소부가 아니라 자신의 일에 대해 철학을 가지고 사람과의 끈끈한 연대감으로 이어진 사람임을 알게 된다.


 그는 죽은 자가 방치된 이 집들이 특별하지 않다고 말한다. 사람을 살리는 의사도, 성적을 비판하며 아래만 바라보며 걷는 학생도, 수레를 끌며 엘리베이터 문에서 나서는 택배 배달원도, 커피 위에 우유 거품으로 무늬를 새기는 바리스타도, 승용차를 타고 출근길에 나서는 거주민을 항해 일일이 거수경례로 배웅하는 경비원도. 모두 특별하다고 말하면 어떨까라고 자문한다. 이들을 편견의 시선으로 저 멀리 세상 끝으로 밀어낸 우리들의 잘못이 아닐까 반문한다. 이 책을 읽으며 우리는 바로 옆에 있는 이웃의 안위도 걱정하지 않으면서 이 책을 읽으며 동정심을 느끼는 현대인들의 무심함을 꼬집기도 한다. 작가는 그래도 이 일에서 찾는 즐거움 하나를 꼽으라면 ‘해방감’이란 표현을 썼다. 쓰레기로 꽉 찬 집이 하나씩 바닥을 드러내고 서서히 집의 형태를 찾아갈 때 비로소 느껴지는 완전한 자유. 자신의 손길이 미친 방에는 이제 죽음은 어슬렁거리지 않는다. 세상의 수많은 일 가운데 청소를 인생의 직업으로 받아들이는 건 새로 시작하는 의미여서 좋다는 말도 덧붙인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마음이 뜨거워진다. 특수청소를 다루는 작가 김완에 포착된 죽음은 비록 그 흔적을 지우러 가긴 하지만 유품 하나하나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죽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저런 상황이라면, 내가 죽은 뒤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화끈하고 아린다. 그랬다. ‘죽은 자의 집 청소’는 바로 내 죽음의 모습을 엿보는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그 모습이 바로 나 아니라는 증거가 있을까? 부정하고 싶겠지만 고독사는 어느 누구에게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이젠 그런 사회에 도래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고민이 된다.  이 책을 덮으며 느낀 건 그 사람이 어떻게 죽었든 한때는 이 사람들도 피가 뜨거운 귀한 존재였다. 아무도 그 사람에 대해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점이다. 코로나로 인해 우울증에 호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길을 나서면 한 집 건너 ‘임대’라는 스티커를 보면 남의 일 같지 않다. 이제 죽은 자의 집청소를 읽고 나니 새삼 사람들이 귀하게 느껴진다. 개인마다의 고민이 커질수록 세상은 더 각박해지는 것 같다. 서로를 돌보는 사회, 관심을 가지는 사회일수록 고독사는 줄어들 것 같다. 이 책은 단지 죽음만을 말하지 않는다. 죽음 이전에 희망을 말하는 보고서다. 죽음을 말하기 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자신의 일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들을 두드리는 책이었다. 작가 김완. 특수 청소가가 아닌, 세상의 등불같이 느껴졌던 그분에게 존경의 마음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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