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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똑또 Aug 08. 2024

베란다적 생활에 대하여

베란다가 있는 집에 살려면

베란다가 있는 10평짜리 빌라에 산지 벌써 5년이 넘어간다. 서울에 자취를 하고 있는 또래들의 집에 비해 크기는 더 여유롭다. 이 집은 전세로 7천만원이 조금 안 되는 가격인데, 이 돈으로 서울에서 비슷한 상태의 집을 구하기는 거의 불가능이다. 서울에서 친구들은 7천만원의 1.5배에서 2배 가량의 돈을 들여 이 집의 대략 1/2배 크기의 집에 산다. 이들에게 '난 빨래를 베란다에 널어'라고 이야기하면 모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진짜야?'라고 묻는다. 자취하는 집이란 자고로 베란다는커녕 건조대를 펼칠 수 있기만이라도 하면 감지덕지인 공간이기 때문에, 몸의 절반 크기를 넘는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넘나들어 장마철에도 쉰내없이 빨래를 건조할 수 있는 집이라는 것은 자취생들에게 유토피아에 가깝다.


하지만 내가 부천에 산다고 이야기하면 이들은 휘둥그레 떴던 눈을 약간 좁히며 유토피아의 존재에 대해 쉽게 수긍한다. 출퇴근이 어렵지 않냐는 물음에 나는 항상 스무살 때부터 단련되어온 경기-서울 왕복운동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낸다. 어디든 왔다 갔다 하는 시간으로만 짧게는 2시간에서 길게는 4시간을 쓰며, 주기적으로 서울을 왔다갔다 하기 시작한 스무살때부터 지금까지 10년이라는 시간 중에 약 1개월하고 절반 가량을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시간을 보낸 셈이다. 대학 다닐 때야 어쩔 수 없었다 해도, 지금은 직장도 있으니 서울로 이사를 가면 어떻겠냐는 권유를 종종 받기도 하지만 집-직장 거리가 너무 가까운 것이 내게는  매력적이지가 않다. 집과 직장은 자고로 한 시간 정도 떨어져있어야 워크와 라이프가 적당한 분리가 되며 밸런스가 맞아지는 것 아닌가 하는 터무니없는 나만의 워라밸 지론을 갖고 있다. 이동하는 시간동안 오늘은 어떻게 일하면 좋은지 어제의 실수는 뭐였는지 그래서 오늘은 뭘 조심할 건지 고민하는 시간이 아마도 제법 필요한 것 같다.


 아무튼 대략 10년 동안 대중교통에서 보낸 한 달을 돌려줄테니 베란다를 내놓으라고 한다면 나는 두 달을 더 줄테니 베란다는 제발  그냥 둬 달라고 부탁할 거다. 한여름 바깥을 걸어다니면 찜기에 들어앉아 포룩 포르륵 육수를 뿜어대며 익어가는 만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하는데, 바람 한 점 안 통하는 집에서 덜 바삭하게 말랐던 옷을 입은 날이라면 곧바로 오래된 만두에서나 날 것 같은 쉰내가 나기 시작한다. 평범한 찐만두가 되는 것도 그리 유쾌하지 못하겠지만, 이왕이면 오래된 만두보다는 그저 잘 익은 만두가 되는 편이 몇 배는 더 나을테니 두 달이든 세 달이든 받쳐서 빨래의 쉰내를 없애줄 베란다는 절대 사수하고만 싶다.


베란다적 빨래 생활

몇 개월 전까지 '빨래 없는 생활'의 여유로움을 만들어주겠다는 세탁 대행 업체의 월 구독 서비스를 이용하다가 속옷을 도둑 맞은 이후, 다시 '빨래 있는 생활'을 시작했다. 그들이 만들어주던 여유가 얼마나 달콤한 것이었는지를, 빨래를 다시 시작한 후에 더 절실히 알게 됐다. 무언가를 지키는 일은 아주 많이 귀찮아져야 한다는 말과 같다는 것도 역시, 속옷과 더불어 나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빨래를 절대 집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해결하면서 알게 되었다.


나의 원룸의 한 쪽 면은 베란다로 통하는 문이 차지 한다. 큰 정사각형의 중앙부와  양 쪽에서 열 수 있는 미닫이 형태로 되어 있는데, 왼쪽으로는 침대를 두고 있기 때문에 베란다로 통하려면 늘 오른쪽 문을 연다. 굳이 왼쪽의 침대를 밟고 베란다로 나가고 싶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나, 그 쪽으로 문을 열면 세탁기가 문을 막고 있어서 세탁기를 뛰어 넘어 베란다로 나가는 액션 영화의 한 장면을 연출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왼쪽 문은 거의 열지 않는다. 오른쪽 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가면 문 바로 오른쪽에는 냉장고가 있고 그 반대편 끝에 보일러실이, 그 앞에 통돌이 세탁기가 있다. 세탁기 앞에는 젖은 빨래를 널어두고 말리거나 마른 옷을 걸어두는 헹거 역할을 겸하는 '큰 대'자 모양의 건조대가 있고 그 옆에 빨래를 모아두는 통이 있다. 빨래통에 온갖 빨래를 모아뒀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 세탁기에 와르르 쏟아붓고 빨래를 한다. 그러니까 나의 빨래는 베란다에서 시작해서 베란다에서 끝이 난다고 할 수 있는데, 지극히 베란다적인 빨래 생활이다.


베란다적 빨래 생활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해보자면 시작은 이렇다. 끈적한 오늘이 덕지 덕지 붙은 옷들을 집에 들어오자마자 훌러덩 훌러덩 벗어 제낀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게 뭉쳐진 오늘을 들고 베란다로 나가 빨래통으로 던진다. 빨래통에는 어제와 그제와 그그저께가 뒤엉켜 쌓여있다. 던진 오늘 중에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것들도 있지만 아랑곳않고 베란다를 나와 문을 닫아버린다. 빨래통에 쌓아둔 빨래가 말끔히 비워지는 날이면 나 스스로가 마치 열심히 사는 사람인냥 착각에 빠지곤 한다. 말하자면 나 스스로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줄줄이 늘어놓고 싶어지는 기분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빨래통은 비워지기가 무섭게 그득그득 해진다. 셀프 칭찬을 몇 개 다 하지도 못했는데, 빨래통에는 매일 매일의 반성과 후회와 설움과 분노와 슬픔과 좌절이 금방 들어차버린다. 그렇지만 괜찮다. 베란다에서 돌아온 방에 오늘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고 내일은 아직 오지 못했다. 나에게 해줄 긍정의 말은 없어도, 어쩐지 마음이 괜찮다. 이게 다 베란다적인 빨래 생활의 덕이다.


베란다로 여름을 난 뒤에는

여름이 끝나면 베란다 문을 열고 베란다에 있는 커다란 창을 열어두고 지낸다. 작은 서큘레이터를 베란다로부터 침대쪽으로 향하게 두면 서늘한 바람이 온 방 안에 가득 분다.  ‘홍석휼’이라 이름을 붙여주었지만 이름을 부를 일이 거의 없을만큼 석휼이는 자신의 소임을 다 하는 데에 거침이 없다. ‘야 석휼아, 잘 좀 해봐.’라든가, ‘홍석휼!’이라 꾸짖음의 부름을 하지 않아도 될만큼 중요한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주고 있다는 뜻이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석휼이를 지나 방으로 들어올 때의 한기는 겪어보지 않는 사람은 못 믿을 정도로 서늘하다. 더운 날 지구 사랑은 온 데 간 데 없는 마음으로 빵빵하게 에어컨을 틀고 담요를 뒤집어 쓰고 있는 것처럼 창문을 열고 석휼이를 틀어두면 담요는 꼭 필수가 된다.


베란다로 나가는 주요 통로인 오른쪽 문 옆으로는 5단 서랍장이 있고 그 옆에 티비장위에 올려둔 티비가 놓여있다. 티비 맞은 편, 침대 아래로 등받이 쿠션을 두고 넓다란 테이블을 둔다. 본가에서 가져온 김치로 만든 김치찌개나, 마늘이랑 청양고추로 만든 알리오올리오나, 애호박으로 만든 부침개 같은 음식을 만들어서 이 테이블에 올려두고 티비를 보며 먹는다. 테이블 밑으로 쭉 뻗거나 반가부좌를 틀었거나 무릎을 세워 쪼그려 앉은 다리에는 바깥으로부터 석휼이를 타고 들어온 시원한 바람이 분다. 닭살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쯤 테이블 옆에 놓아두고 쓰는 담요로 다리를 덮는다. 이 자리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나면 오늘 미워했던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있을 것만 같고, 지난 날의 잘못을 앞으로는 절대로 저지르지 않을 것만 같은 마음도 든다. 실제로 그렇게 되지는 않지만 그렇게 될 것만 같은 마음이 그 자리에서는 꼭 들고만다.


잘못을 뉘우치고 사랑을 다짐하는 동안 가을을 지나 겨울이 오면 나는 진짜로 가끔 미워하던 이를 사랑하기도 하고, 반성을 거듭 하던 일에 대해 한 걸음 나아가기도 한다. 베란다로 들어온  바람이 나의 안에 길러주는 성숙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곧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올 것 같다. 이번 겨울에도 꼭 사랑을 하고  나아갈 수 있기를 빌며, 베란다가 있는 집에서의 여름을 남김없이 보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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