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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롤로 Sep 24. 2019

#2. 강화 소창에 대해 아시나요?

그 옛날, 강화의 전성기 (조양방직, 소창체험관, 연순직물)

오래된 것의 재발견

'뉴트로 감성' 카페 조양방직

강화도의 핫플레이스, 조양방직이다. 인스타그램에서도 워낙 인기라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 이번에도 여행이 아닌 촬영으로 처음 오게 됐다. 다음에 사랑하는 남자친구와 가족과 또 오면 되니 괜찮다. 늘 촬영은 다음 여행을 위한 사전 답사니까.



조양방직은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컸다. 단순히 오래된 공장을 카페로 리모델링했구나 했는데, 넓은 내부에는 낡았지만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하는 추억의 물건들로 채워져있었다. 흉물이었던 공장에 숨결을 불어 넣은 것이다.  



촬영 중 사장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눠볼 기회도 있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검소한 모습이어서 놀랬다. 직접 공사도 하시며, 조양방직을 가꿨다고 한다. 이날도 조양방직 마당(?)에 무대를 설치한다며, 일하시는 분들과 공사를 함께 하고 계셨다. 직원 말에 의하면 지금의 조양방직이 되기까지 사장님 손이 거치지 않은 게 없을 정도라고. 마당의 식물 하나, 하나까지 직접 가꿨고, 빈티지 소품들도 모아서 죽어있던 공장에 숨을 불어 넣은 것이다.



직원의 이야기를 듣고 조양방직을 둘러보니, 공간이 새롭게 다가왔다. 오래되어 버려진 것들을 모아 '어디에 어떻게 둘 것인지' 고민하고, 꾸몄을 주인의 손길.. 작은 소품하나, 하나, 떨어진 문짝 하나도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조양방직 내 상신상회, 어린시절 놀이공원이 생각난다
조양방직 옛 사진들

조양방직은 1933년, 강화의 대지주였던 홍재묵, 홍재용 형재가 설립한 직물 공장이었다. 그 당시 민족 자본으로 지은 최초의 공장이었다. 그 자본금이 50만원이었는데, 1930년대 서울 한옥 한 채 값이 천원이었다고 한다. 여기에 일본 회사 하나당 평균 자본금이 30만원 정도 였다고 하니, 50만 원의 자본금은 상당히 큰 액수였던 것이다.



공장 모양을 본 딴 조양방직 로고

이 넓은 대지에 건물을 세우고 80여 대의 직조기를 들인 조양방직. 이를 통해 기존 수공업에서 벗어나 노동력 절감과 함께 대량생산을 이끌었다. 그야말로 근대 강화 직물산업의 기틀을 마련했던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흥망성쇠는 있는 법, 광복이후까지 명맥을 유지하다 경영이 어려워졌고, 대구 섬유 산업에 밀리면서 강화 전체의 직물 산업은 70년대 이후 쇠퇴의 길을 걷는다.


 한때 강화 경제를 이끌었던 주역이기도 했고, 한때는 고물상 창고이기도 했던 조양방직. 지금은 제2의 전성기를 보내고 있는 중이다.




강화의 전성기를 걷다

'소창길'


소창길은 강화에서 지정한 관광 길이다. 조양방직을 시작으로 70년대까지 직물 산업을 이끌었던 공장들이 원도심에 즐비했다. 이화직물부터 심도직물까지 국내 굴지의 직물회사들이 강화에 있었다고. 매일 온 동네가 직조기 돌아가는 소리로 아침을 열었다고 할 정도니, 그 규모가 대단했을 것 같다. 지금은 공장 터에 도서관, 관공서가 자리하고 있다.  

이화직물 터


이 일대가 이화직물터였다고 한다


이화직물터
이화직물터를 찾기 위해 주변 관공서에서 일하시는 분에게 여쭤봤다.  지금 서있는 이 일대가 이화직물 터였다고 한다.  1953년 남궁형이 설립한 이화직물은 공장부지 2700평, 건물 16동, 역직기 56대, 직원 300여 명을 둔 공장이었다고 한다.


직물 중에서도 소창은 강화도 제일의 생산품이었다고 한다. 소창, 처음에는 생소했지만, 소창체험관에서 들은 이야기로는 우리가 흔히 아는 '호청, 속청'이 소청이라고 한다. (소청:행주, 기저귀등에 쓰이는 직물)


심도직물 굴뚝

어렸을 때 할머니께서 '이불 호청 갈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셨는데, 그게 이불 솜싸개였다. 그래,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할머니는 이불 호청을 깨끗하게 빨아 거실 바닥에 펴놓고 깁으셨다. 돋보기 안경을 콧잔등 위에 올려놓으시고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그때는 어떻게 그걸 다 하셨는지 몰라..



심도직물 굴뚝
강화의 전성기를 기억하는 강화 사람들

위 굴뚝은 심도직물의 굴뚝이라고 한다. 1947년에 설립해 국내 굴지의 직물 회사로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지역 경제발전은 물론 외화 획득에도 기여했다는 심도직물. 강화 주민들은 향토기업의 영화로웠던 시절을 기념하고자 이 굴뚝을 일부분 잘라 전시했다고 한다.




소창을 좀 더 가까이

강화 소창체험관


소창 전시관

소창체험관은 1938년에 지어진 한옥과 염색공장이 있는 평화직물 건물이었다. 건물을 그대로 소창체험관으로 리모델링하여 지금은 전시관, 시연관, 전통차체험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체험관에서는 소창손수건 스탬프 체험을 할 수 있는데 나름 재미있었다. (완성한 손수건은 어디에 두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목화솜이 실이 된다


소창손수건 스탬프 체험
매주 토, 일 운영
운영시간 10시~ 18시
운영방법: 사전예약, 당일예약 가능  (032-934-2500)


순무차를 시음할 수 있는 한옥

이곳은 옛 공장 사장님이 살았던 집이라고 한다. 사택이었던 셈이다. 지금은 강화 특산물인 순무를 차로 마실 수 있도록 꾸몄다.


한옥 내부

정갈하게 잘 꾸며놓은 공간, 이런 곳에 오면 부모님이랑 꼭 다시 오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사진 찍어 달라고 난리시겠지만..


젊은 세대들에게 소창은 새롭지만, 어른들에게는 향수를 자극하는 물건이다. 나도 생소했지만, 소창이 호청이라는 걸 알고 어렸을 때 무거운 솜이불을 덮은 기억이 났다. 할머니 댁과 외할머니댁에 꼭 가야 덮을 수 있었던 이불...




조용히, 묵묵히 이어가고 있는

강화 소창 [연순직물]


다행히 강화도에는 아직 소창을 생산하는 공장이 있다. 8곳 정도 남아있다고 하는데, 그중 외할아버지때부터 어머니, 그리고 아들까지 이어서하고 있는 공장을 방문했다. 30대 젊은 사장님이 계셨던 곳이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기계 소리가 들렸다. 탁, 탁, 탁. '아 이게 말로만 듣던 직조기 소리구나' 멀리서 부터 들리는 직조기 소리에 공장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그 소리는 컸고, 공장 안에서는 대화를 나누지 못할 정도였다.



넋을 높고 바라보게 되는 직조기 움직이는 모습. 젊은 사장님 이야기로는 여기서 일하시는 분들이 이명소리와 폐가 나쁠 거 같지만, 그런 문제는 없다고 한다. 사장님이 처음 일할 때 이명이 있었지만, 금방 괜찮아졌다고.. 그리고 먼지가 많을 거 같지만, 그 역시 문제가 없다고 한다. 솜이어서 그럴까? 자연에서 온 솜?!


정경기

실을 정렬하는 정경기, 옛날에 하던 방식대로 하고 있다고 하셨다. 그럼 지금 소창은 어디에 쓰일까? 최근 생리대 파동 때문에 소창을 찾는 곳이 많다고 한다. 원래 소창은 기저귀나 행주, 수건으로 많이 사용했는데, 알러지나 아토피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수건도 자극적일 수 있는데, 소창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친환경 소재로 많이 찾는다고.


100년 된 평직기

빠르고 쉽게 생산되는 건 언젠가 문제가 생기기 마련인가보다. 무엇보다 내 가족, 내 몸에 쓰이는 제품일수록 더욱 까다롭게 따지게 된다. 생리대 역시 마찬가지. 하물며 아기들이 쓰는 기저귀는 어떨 것인가. 과거 엄마들이 천 기저귀를 뽀얗게 빨아 빨랫줄에 널어둔 풍경도 이제는 잊힌 장면 중 하나.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

풀을 먹인 하얀 실들이 널려있는 장면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 옛날 강화에서는 흔한 풍경이었을 터..




오래된 것이라 하여 그 빛이 옅어지는 건 아니다.

강화의 오래된 것은

더 단단하고 견고하게 이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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