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이 없겠네
2019년 11월 14일 이른 새벽, 난 그 시간을 여전히 기억한다. 그날은 수능 당일이었다.
자려고 누운 시간은 전날 밤 10시 경이었다. 수능 한 달 전부터 수능 시험 당일의 시간표에 맞춘답시고 10시에 자는 것이 당시의 습관이었다. 무덤덤하게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방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 원래는 형이랑 같이 쓰던 널찍한 침실이었는데, 형은 군에 입대하여 나 혼자 방을 쓰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텅 빈 방에는 주변에서 나는 소리가 여기저기로 울렸다. 시계 초침이 넘어가는 소리, 살짝 열린 창문에서 스미는 바람 소리, 밖에서 무어라 기도하는 어머니의 나직한 말소리가 내 귀를 윙윙 맴돌았다.
나는 벌을 받고 있었다.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그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수능을 잘 보는 것. 만약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한다면, 나는 더 무겁고 가혹한 벌을 받게 될 터였다. 나는 잠에 들 수 없었다. 걱정, 불안, 그 밖에 형용할 수 없는 어떤 감정들, 그것들이 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나는 억겁의 늪에 빠졌다. 온갖 것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침에 늦게 일어날까 봐, 아침에 먹을 밥이 체할까 봐, 모르는 문제가 나올까 봐, 수능을 망칠까 봐, 재수로 모자라 삼수를 하게 될까 봐 걱정됐다. 걱정은 걱정을 낳았고, 이내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질질 끌며 물을 마시러 거실로 나갔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였다.
찬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다시 들어와 누웠다. 자세를 바로 하고, 두 손을 포개어 배 위로 올렸다. 나는 어릴 때부터 잠이 안 올 때면 늘 정자세로 고쳐 눕는 습관이 있었다. 그렇게 반듯이 누워 좋은 생각을 하려 애썼다. 수능을 평소 점수보다 더 잘 보고,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는 상상. 보란 듯이 이 굴레에서 탈출하는 상상을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윽고 쓰러지듯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아무렇지 않게 눈이 떠졌다.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아침밥을 먹었다. 나는 늘 만둣국을 먹곤 했다. 6시에 아침을 먹어야 하는 나를 위해 5시 30분에 일어나시는 어머니가 늘 해주신 만둣국.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수능 시험장에 갔다. 내 집에서 한 시간은 족히 떨어진 시험장. 가는 동안에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교통사고도 없었고, 차가 막히지도 않았다. 마치 세상은 나를 빼고는 모두 아무 일도 없는 것만 같았다. 고사장에 들어가 내 자리를 찾았다. 내 수험표가 붙은 자리는 맨 앞줄의 구석이었다. 앉으면 창문 너머로 운동장이 보이는 자리였다. 1교시 시험지를 받아 문제를 풀다 보니, 어느덧 나는 평소처럼 문제를 풀게 되었다.
수능 성적은 좋지 못했다. 수학에서 막힌 문제가 있었고, 그 문제에서 시간이 끌려 페이스 조절에 실패했다. 절망적인 정도는 아니었지만, 만족할 만한 정도는 더욱 아니었다. 그렇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이미 나에게 주어진 기회는 지나갔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다른 기회가 찾아왔고, 결국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그날 새벽의 기억이 생생하다. 걱정이 걱정을 낳아 실체가 없는 괴물이 되고, 그 괴물이 당장이라도 날 잡아먹을 듯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러나 그 괴물은 우스꽝스럽게도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그 괴물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나뿐이었다. 나는 그 이후로 괴물을 만난 적이 없다.
세상 모든 걱정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내 능력 내에 있는 일에 대한 걱정과 그렇지 않은 일에 대한 걱정.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걱정은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 그건 뭐랄까, 걱정이라기보다는 투정에 가깝다.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레포트를 언제 쓰나, 이번 시험공부는 언제 다 하나 하는 생각들. 그런 걱정에 대한 해소는 간단하다. 걱정할 시간에 행동하고, 그에 대한 결과는 받아들이면 된다. 설사 조금 게으르더라도, 조금 걱정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에 큰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를 잡아먹고, 매몰되도록 하는 걱정은 대부분 내 능력 밖의 일에 대한 걱정이다. 그날 밤에 했던 걱정들을 잘 떠올려 보면, 결국 그 시간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걱정이 무색하리만큼 그에 대한 결과는 내 능력 밖에 있었다. 그날 고사장에 가는 길이 막히지 않은 것도, 시험에 내가 모르는 문제가 나왔던 것도, 수능을 망쳤던 것도, 그럼에도 대학에 진학한 것도. 그 어떤 일에도 나의 걱정은 무력하다.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여전하며, 그 일은 벌어지고야 만다. 걱정한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걱정하지 말자. 걱정은 괴롭다. 걱정은 더 큰 걱정을 낳는다. 우리의 감정을 갉아먹는다. 그럼에도 결과는 나아지지 않는다.
티베트에는 이런 속담이 있단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