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호박의 귀환

by 목연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봄날, 시아버지는 굽은 허리를 펴가며 담장 밑에 호박을 심으셨다.

아침, 저녁으로 찬 기운이 느껴진다. 호박들은 무거운 몸무게를 지탱하느라 줄기에 매달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머지않아 세찬 바람과 된서리로 인해 잎은 쇠락해 갈 것이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씨앗들에게 더 많은 세상 이야기들을 들려주고자 햇빛이 주는 마지막 소리까지 저장하고 있다.


늦가을이 되면 시아버지는 창고에 쌓아 놓은 늙은 호박들을 내어주셨다. 호박은 심어 놓기만 하면 스스로 익어간다는 생각에 자식들은 부담 없이 덥석 받아갔다. 하지만 호박을 거두기까지 많은 준비과정이 필요했을 것이다. 겨울의 모진 추위를 이겨내도록 씨앗을 정성 들여 보관하고, 봄의 따사로운 햇살을 가슴으로 힘껏 감싸 안아 싹을 틔우도록 풍성한 거름을 깔아주었으며, 넝쿨이 잘 뻗어나가도록 안전한 길로 인도했으며, 여름의 뜨거운 열기를 몸속 깊숙이 빨아들여 알알이 영글어가도록, 그분의 아버지의 숨은 노고가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늙은 호박 속에 시아버지의 삶이 보인다. 우직하고 성실하게 평생을 살아오셨다. 할아버님에게 물려받은 재산은 없었지만 네 명의 자식들이 밥상 앞에 않으면 집안이 가득 차고,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었다고 했다.

꼭두새벽부터 논에 나가서 일해도 피곤한 줄 몰랐던 것은 희망찬 미래가 가슴속에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초여름이 되면 굵직한 호박 줄기에 녹색 윤기가 피어오른다. 황금빛 호박꽃을 피우고 튼실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뜨거운 햇빛과 조우하며 영양분을 저장해야 한다. 시아버지도 호박잎처럼 넓은 품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포용하고 줄기처럼 멀리까지 넝쿨손을 뻗어 인정을 베풀었다. 동네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을 때는 자신의 일처럼 앞장서서 해결했지만 생색내지 않고 겸손하게 살았다. 농사일도 부단히 노력하여 애호박들이 넓은 호박잎 뒤에 숨어 몸 키우기를 하듯 외양간에는 누런 송아지들이 태어났고 넓은 황금벌판에 반듯반듯한 논들이 늘어났다.

시아버지의 노년은 겨울의 한파처럼 혹독했다. 둘째 아들의 사업자금을 위해 보증을 서준 재산에 압류가 들어왔다. 한순간에 모든 것이 날아갔지만 빚은 다 청산하지 못했다. 남은 것은 신용불량자라는 불명예스러운 꼬리표뿐이었다. 거주하는 집도 담보대출이 있어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평생을 논·밭에서 흙을 벗 삼아 살았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갈 곳이 없었다,

시아버지는 경매에 들어간 부동산을 다 정리하고 자식들을 집으로 불렀다.

“이제 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구나. 그렇지만 너희들에게 손 벌리지 않고 살 아갈 자신이 있다. 내가 부탁하고 싶은 것은 형제끼리 우애하고 살아라”

짧은 두 문장의 말씀은 엄청난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숙연한 분위기에 자식들은 고개를 들지 못하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원인 제공자에게 가슴에 사무칠 뼈아픈 말 한마디쯤 할 줄 알았는데 그 말로 모든 것을 가름하였다.


그때부터 앞마당과 뒷마당이 시아버지의 농지가 되었다. 그곳에는 호박과 여러 가지 채소들이 자라기 시작했다. 좁은 공간이지만 시아버지는 오롯이 흙속에서 하루를 보냈다.

칠십 평생 이루어 놓은 재산이 하루아침에 사라졌을 때의 허무함을 자식들은 헤아리지 못했다. 하지만 돌아가시기 전 시아버지의 심장이 유난히 비대해져 있었다는 것을 알았고 고통을 혼자서 감내하느라 얻어진 아픔의 진한 흔적이었다.


젊은 날 고생을 보상받듯 노후는 안정되고 편안해야 하는데 아버지의 노년은 말라버린 줄기에 위태롭게 매달린 늙은 호박처럼 힘겹기만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덩굴을 뻗어 나가는 호박처럼 마지막까지 자식들에게 의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손주들과 함께 홍시를 따던 아버지는 흙으로 돌아가셨지만 해마다 열리는 호박 속에 값진 교훈을 남기셨다. 진초록빛 나무들이 울창한 정원에는 자금도 그분의 따뜻한 숨결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지난날을 되돌아 생각해 보면 시아버지가 몸소 보여준 잔잔한 가르침은 지나가는 작은 바람이 아니라 머릿속에 번득이던 큰 섬광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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