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상태나 움직임을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일. 은유.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사물의 상태나 움직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은유.
종수는 중학교 동창 해미를 만나 술 한잔 기울인다. 해미는 귤을 까먹는 마임을 선보인다. "귤이 있다고 생각하기보단 여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는 거. 중요한 건 진짜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 영화의 은유는 이러한 형식에서 변주되어 반복한다.
해미의 집에 진짜 있는 건지 없는 건지 한 번도 그 모습을 보이지 않는 고양이 '보일이'. 그러나 밥을 주러 올 때마다 그릇은 비워져 있고, 똥이 싸져있다. 반면 우리 집에선 그런 거 못 키운다는 집주인아주머니. 영화의 마지막에 ’보일아‘하고 부르니 다가오는 벤이 주워와 기른다는 고양이 한 마리.
해미는 어렸을 적 우물에 빠진 자신을 종수가 구해줬다고 하는데 종수에게 그런 기억은 없다. 그녀의 가족과 마을 이장은 그 우물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난 종수의 어머니는 또 우물이 있었다고 말한다.
파주에서 벤과 종수가 만나 대마를 핀 날. 벤은 자신의 취미가 비닐하우스 태우기라 한다. 사실 오늘 온 이유도 사전답사이고 조만간 너희 집 주변 하우스를 태울 것이라 말한다. 그 이후로 종수는 매일 아침 주변 하우스를 체크한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다시 벤을 만났을 때 그는 이미 하나 태웠다고 말한다.
그리고 진실인지 허구인지 알 수 없는 이 사건들이 물려 해미가 사라지며 합주가 시작된다. 벤의 집에서 발견되는 해미의 물건. 보일이로 추측되는 고양이. 벤의 옆을 해미 대신 차지하고 있는 해미와 굉장히 닮은 여자. 자신도 해미와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벤의 말.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고 싶다는 해미의 말. 비닐하우스를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벤의 말.
온갖 은유에 종수는 혼란을 느낀다. 영화의 마지막, 종수의 소설인가. 여자를 화장시키는 벤의 모습에서 하우스 속에서의 화장火葬을 떠올릴 기회를 가진 청자마저도 그 사실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난 이 영화의 이미지를 의심하려 한다. 영화의 이미지 만으로는 진실과 허구를 구별하지 못한다. 해미나 벤의 말과 실제 현실이 다르듯이. 이미지는 그 어떤 증거력도 갖지 못한다. 그들이 피는 대마의 환각증세처럼.
북향이라 햇볕이 잘 들지 않는 해미의 원룸. 정말 운이 좋을 때에 남산타워 창문에 비친 햇살이 들어온다고 한다. 그녀의 방에서 종수와 해미가 성교를 할 때 그 귀하신 햇볕이 방의 흰 벽에 비친다. 종수는 육체적 황홀에 젖어 그것을 바라본다.
영화 중간중간 파주 집에 계속해서 전화가 걸려온다. 수화기 반대편에서는 항상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다. 마지막에 엄마임이 밝혀진 듯 보이지만, 종수를 대하는 태연한 그녀의 모습에 지금까지의 전화가 모두 그녀가 맞는지 다시 의심하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종수는 벤을 찌른다. 여러 번. 종수는 숨이 멎은 벤을 그의 차에 집어넣는다. 피가 밴 자신의 모든 옷 전부를 같이. 벤이 과거에 하우스 태우는 법을 설명해 줬던 것처럼, 기름을 뿌리고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해당 씬 이전 종수가 해미의 방에서 글을 쓰는 이미지에서 흔한 영화의 엔딩처럼 줌아웃이 되며 끝날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것이 현실인지 더욱 의심이 된다.
"귤이 있다고 생각하기보단 여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는 거. 중요한 건 진짜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 다시 이 대사로 돌아가보자. 종수는 해미의 마임을 보며 없는 귤이 있다고 믿어야 함을 강요당한다. 그 강요를 받아들이는 가장 편한 자세는 귤이 있다고 계속 생각하기보단 그냥 귤이 없다는 사실 자체를 잊는 것이다. 그리고 그냥 그 귤의 존재 이유에 대해 극한으로 욕망하는 것이다.
청년 종수는 어쩌면 벤의 부를 욕망했다. 가운데에 해미를 두고 자꾸만 비교되는 벤과 자신의 차, 화장실도 찾지 못하는 벤의 집과 낡고 대남방송이나 들려오는 허름한 집. 그 속에서 자꾸 해미를 달라붙게 만드는 부를 극한으로 욕망했다.
해미의 앞에선 게츠비 같다고, 뭘로 벌어들인 지는 모르는데 돈은 많다며 허구일 수 있는 부를 욕했지만, 매일 아침 하우스를 감시하며 벤의 방화를 보고 싶었고 어쩌면 자신도 라이터로 불을 붙이려 하는 장면에서 그의 욕망이 드러난다. 그는 그레이트 헝거(삶의 의미에 굶주린 사람)가 되지 못했다. 그저 리틀 헝거에서 돈에 배고픈 사람에 머무는 모습이 보였다.
이창동 감독은 이 영화를 '젊은이들의 분노'를 다룬 영화라 말한 적 있다. 그런 점에서 감독의 의도를 드러낸 인물은 종수가 아닌 해미라고 생각한다.
해미의 동작은 항상 과하다. 벤과 그의 친구들 앞에서 아프리카 부시맨의 춤을 출 때 그녀는 아프리카에서 의식을 지켜봤던 감정을 열심히 표현하려 한다. 웃음거리가 되면서까지도.
그녀가 선보이는 마임들도 마찬가지이다. 아무것도 없는 허구의 동작에 그녀는 의미를 담아내려 한다.
다 같이 모여 대마를 피던 날, 서로 돌아가며 거하게 빤 뒤 벤은 차로 가서 음악을 튼다. miles davis의 generique. 해미는 반사적으로 춤을 추기 시작한다. 웃통을 벗어던지고 노을을 향해 부드럽게 동작을 취한다. 그 동작들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냥 고양감에서 비롯되는 육체의 움직임이었다.
음악에 맞춰 아무 의미 없는 동작들을 하며 가장 아름답고 자기 다운 동작을 해냈다. 무언가에 빗대어진 은유 같은 동작이 아니라. 그제야 주체가 되었다.
현실도 그렇다. 아무 의미가 없다.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려 젊은이는 발버둥 친다. 무언가의 은유가 되려 과하게 발버둥 친다. 그러나 가장 자신다운 것 또한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걸 알든 모르는 젊은이는 분노할 수밖에 없다. 대마를 태우든 비닐하우스를 태우든 어쩌면 사람이든 그냥 태우고 싶어지는 것이다.
"종수씨는 너무 진지한 거 같아. 진지하면 재미없어요. 여기서 베이스를 느껴야 돼요. 뼛속에서부터 울려줘야 그게 살아있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