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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상 May 07. 2024

숭고

Untitled 1949 - 마크 로스코


예술은 왜 존재하는 것일까.

미학자 발터 벤야민은 그 이유가 역사적 조건에 따라 결정된다고 여겼다.


곰브리치는 선사시대의 예술이 욕망과 주술을 위해 쓰였다고 추정한다. 중세 유럽에는 모든 예술이 한 종교의 한 신을 위해 존재했다.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가 말하길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표현주의 영화는 그들의 혼란스러운 시대상을 반영했다. 벤야민이 주장하길 산업혁명 당시 사진은 진실을 폭로하는 예술로 부상했다.


시대가 바뀌면 예술의 정의가 바뀐다. 그에 따라 존재 이유도 바뀌는 것이다.



마크 로스코

마크 로스코의 예술은 로스코의 역사에 따라 변화한다. 초현실주의에서 신화적 무의미로 그리고 추상화에서 색면회화로.


그는 언제나 예술 속에 감정을 함축하려 했다. 1,2차 세계 대전을 미국에서 바라볼 때. 그는 고립된 도시와 도시민의 아픔이란 감정을 그려내기 위해 초현실주의를 택했다.

그러나 현실을 뛰어넘은 그 세계에서, 현시대에 필요한 비극적인 관념과 숭고의 감정은 온전히 그려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신화를 택했다. 작품에 제목이 사라지고 작품을 액자 속에 가두지도 않았다. 모호함을 이야기하는 신화에서 인간이 위안을 얻듯. 작품의 제목과 외부의 빈자리는 관객에게 돌아갔다.

Untitled 1941 - 마크 로스코

신화적 그림은 클리포드 스틸과 만나며 발전하여 추상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추상에서도 숭고의 시각화를 완성해내지 못했다.


숭고를 시각화하기 위해 그의 그림은 어디로 나아가야 할까.



숭고란 무엇인가

칸트에 따르면 우린 장엄한 고봉절안과 무한한 우주 앞에서 육체의 나약함을 인지하게 되고, 그럴 때 우린 육체에서 벗어나 한계 없이 자유로운 정신을 마주하기 때문에 숭고를 느끼게 된다.

그러니 숭고란 한계 지어진 육체를 벗어나 자유로운 정신을 마주하는 경험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실러에 따르면 숭고를 느낄 수 있는 대상이 꼭 자연뿐만은 아니다. 인간의 죽음. 실러에겐 오히려 그것이 더 큰 숭고의 대상이었다.


신화 속에서, 고대 그리스의 비극 속에서, 연극 속에서, 현대에 와서는 영화 속에서 우린 죽음을 지켜본다.

내가 아는 사람도 아니고, 약 1시간 전에 가상으로 처음 본 사람에게 몰입해서 그의 죽음에 동조하고 숭고를 느낀다.


니체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비극의 탄생>에서 고대 그리스의 비극이 죽음의 공포에서 보는 이를 구원했다고 주장하지 않았는가. 가상의 죽음에 몰입하여 동조하는 경험은 숭고를 느끼게 하고 숭고는 우리의 정신을 마주하는 경험이니. 인간은 죽음으로 구원된다.



"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은. 내가 그것을 그릴 때 느낀 똑같은 종교적 경험을 하는 것이다."

추상에서 상징이 살해당했다. 마크 로스코의 그림은 마지막으로 변화했다. 모든 상징을 죽인 뒤 그림은 색면회화가 되었다.


색과 면. 크기와 거리. 이 4가지 요소로 그의 그림은 어떤 것의 재현이 아닌 거대한 감정, 비극, 운명을 담은 한 편의 드라마가 된다.


No. 61 - 마크 로스코

작품 No. 61은 세로 가로 약 3m x 2.5m의 거대한 작품이다.

그리고 이 작품을 그가 제안한 대로 고작 45cm 앞에서 바라본다면 그때는 어떤 감정이 느껴질까.


죽음, 상실, 압도, 무한함. 결국에는 숭고. 한 편의 거대한 비극 뒤에는 언제나 숭고가 존재할 것이다.

비극에서 숭고의 힌트를 얻은 그는 그렇게 감정을 그려냈다.



다시 시대는 변화했다.

이렇게 위대한 그림을 남기고 마크 로스코가 미스터리 하게 죽은 지 53년이 흐른 현재. 시대는 많이 변화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어지럽고, 매일의 반복은 나를 괴롭힌다. 예술은 언제까지고 우리의 위로가 되어주진 못하고, 인문학은 내 살림에 도움 될 것이 하나 없다. 영화에 빠져 현실을 잊는 것도 놀란 감독이 영화를 내줘봤자 3시간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예술의 이유는 무엇일까. 뒤샹이 소변기를 전시한 이래로 현대의 미학은 철학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 개개인의 철학이 부딪히며 모두가 색다른 의견을 내놓으니 새로운 예술 언어의 탄생일까. 하나도 뭉쳐지지 않고 산재해 있는 게 마치 현대 사회의 모습과 닮기도 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예술의 이유는 무엇일까. 천지가 창조되어 인간이 빚어진 이래로 이렇게 편리한 세상이 있었는가. 서울에서 후쿠오카까지 50분 만에 이동한다. 아니 구글에 몇 자 두드리면 남이 찍은 후쿠오카를 1초도 안 돼서 구경할 수 있으니. 어쩌면 우리의 경험은 점점 가상에 종속되고 있다. 타인과의 경계가 무너지니 우리의 세상은 복제품이 되었다. 그림자극과 닮아 있지 않은가.

와양 쿨릿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예술의 이유는 무엇일까. 끊임없이 되뇐다. 되뇌인다. 반복한다. 조금이라도 자신과 맞물리면 편이 되고, 반대되면 적이 된다. 연대는 이어지고 악습이 되기도 한다. 에셔의 그림과 닮아 있지 않은가.

메타몰포시스 -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스허르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예술의 이유는 무엇일까. 신은 다시 우리를 당구대 위에 올려두고 이리저리 치고 있다.

몸을 가눌 수 없어. 한계 지어진 육체를 벗어나 정신을 마주한다. 예술에 대한 고민은 숭고와 닿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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