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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로유재 Aug 19. 2023

노숙의 밤, 12월의 JFK (2)

커피와 핫도그, 그리고



택시에서 내려 짐을 끌고 공항 입구로 향하는데 무섭도록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어찌나 매서운지, 뺨이 찢어지는 줄 알았다. 이 고통 또한 곧 안락한 곳에 자리 잡으면 씻은 듯 사라질 거라 되뇌며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공항 내부에 들어선 나는 이내 매우 당황하고 말았다.


생각보다 터미널 내부가 너무 작은 것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자리하고 있는 이곳은 마치 대피소를 연상시켰다. 처음에는 왜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 옹기종기 모여있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각자의 탑승구 앞으로 가있어도 될 텐데 왜 다들 여기에 있는 건지 말이다. 그러다 문득 댕-하고 뇌가 울렸다. 아뿔싸! 너무 이른 시간인 것이다. 나는 내일 오전 4시 출발하는 비행기에 탈 예정이다. 아직은 보더를 통과할 수 없다는 생각에 나의 심장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는 공항 노숙을 결정하며, 매우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새벽 4시 탑승 예정인 내가 게이트 앞으로 가기 전까지는 꽤 오랜 시간 이 많은 사람들과 함께 터미널 로비에서 머물러야 한다는 걸 말이다.





외부로 통하는 입구는 유리로 만들어진 양방향의 자동문이었다. 그냥 뚫려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오갔다. 그럴 때마다 양쪽으로 열리는 유리문 사이로 뺨을 때리는 겨울바람이 불어닥쳤다. 안쪽 자리에 둥지를 튼 사람들의 얼굴엔 온기가 돌았다. 황금 같은 안쪽 자리는 이미 일찍 도착한 고수들의 차지인 듯했다. 그들은 저마다 편안한 포즈로 모자, 목도리, 담요, 배낭, 베개 등 이용해 바닥에, 의자에, 기둥 받침에 몸을 뉘인 상태였다. 입구 바로 옆의 내 자리가 한 겨울의 길거리라면, 그들의 자리는 거의 4성급 호텔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오전 중에 출발하는 건데..라는 어처구니없는 생각마저 들었다.


의자가 모여있는 구역은 사람들로 붐볐고, 벤치 기능을 할만한 단차가 있는 가장자리엔 한 구석도 빠짐없이 먼저 온 사람들의 차지였다. 두 다리를 뻗고 누워있는 그들의 포즈에서 여유가 묻어났다. 이대로 입구에 계속 있다가는 덜덜 떨다가 정신을 잃을 것 같아 화장실에 들어가 있는 게 나을지 고민하기도 했다. 그래도 당분간 이곳에서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자, 한 무리의 그룹이 개찰구 안으로 들어갔다. 대규모 자리이동이 시작되었다. 바닥에 둔 짐을 방석 삼아 앉아있던 사람은 몸을 일으켜 빈 의자를 향했고, 1인용 의자에 앉아있던 사람은 누울 수 있는 공간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운 좋게 의자좌석 한 개를 확보할 수 있었다. 공항에 도착 한 지 2시간여 만이었다.


의자에 앉으면 덜 힘들거라 생각한 것은 오산이었다. 여전히 입구에선 찬바람이 불어왔고, 무엇보다 부자유스러운 자세가 문제였다. 양 옆에는 나와 비슷한 상황으로 보이는 반나절 노숙팀(?)이 있었다. 그들의 주변엔 몸체만 한 배낭들이 놓여있어, 나의 캐리어는 갈 곳을 잃었고, 자리에 앉은 나의 어깨는 한없이 움츠러들어야 했다. 잔뜩 긴장한 자세로 앉아, 발꿈치를 멀찌감치 떨어진 캐리어 위에 올리고 양 팔로는 배낭을 안았다. 앞으로 아홉 시간 정도가 남았다. 계속 이런 자세로 있을 수는 없었다.


화장실에 가는 것도 문제였다. 짐을 놓고 간다면 짐의 안위가 걱정되고, 짐을 모두 들고 간다고 하면 누군가 이 소중한 의자를 차지할까 불안했기 때문이다. 되도록 물을 마시지 않고 버티자는 생각까지 들었다.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불편한 자세를 유지 함과 동시에 정신없이 돌아가는 두뇌활동으로 인해 나는 이미 녹초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쯤 되자, 굳이 일주일의 휴가를 뉴욕에 오려고 했던 과거의 나 자신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뉴욕으로 온 것이 잘못된 건지, 이 공항 노숙을 결정한 것이 실수였는 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밤 10시쯤 되자, 본격적인 졸음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아이패드로 갖가지 영상을 틀어보기도 하고, e-book을 열어 좋아하는 소설을 읽어보기도 했지만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나는 이미 너무 지친 것이다. 사람이 조금 빠진 내부 공간을 둘러보니 구석진 곳에 컨테이너로 만들어진 가게가 하나 있었다. 24시간 운영한다는 사인이 켜져 있는 전형적인 미국식 델리를 건물 내부에 작은 규모로 만들어놓은 곳이었다. 공항 안쪽으로 들어가면 더 쾌적한 시설이 많을 테지만 아직 그곳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인 데다, 이대로라면 도저히 졸음을 이겨내기 힘들거라 판단한 나는 곧장 짐을 끌고 델리 내부로 들어갔다. 작은 티브이가 설치되어 있는 바 주변에는 1인 스툴이 줄지어 놓여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빨갛고 볼록한 소파가 장착된 테이블 좌석이 있었다. 왜 진작 이곳에 들어올 생각을 못했을까? 이제라도 발견한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커피와 핫도그 하나를 주문했다.


아담한 델리 내부는 난방이 되지 않는지 냉기가 돌았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옆 창문을 통해 터미널 내부를 살펴보았다. 여전히 공항 입구 문은 계속해서 열렸다 닫히며 거센 바람을 들여오고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게이트로 들어가면 그 로비공간은 금세 새로 들어온 사람들로 채워졌다.


상대적으로 한적한 이곳에 있는 나 자신의 선택에 뿌듯했다. 테이블 아래에 짐을 둘 곳도 있고, 아이패드도 테이블 위에 올려둘 수 있으니 너무 편했다. 이제 이곳에서 다섯 시간 정도는 거뜬히 버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며, 마음이 놓였다. 그렇게 긴장이 풀어질 무렵, 주문한 커피와 핫도그가 나왔다.


따끈따끈 김이 오르는 커피잔을 들어 올리는 순간, 나는 머리카락이 쭈뼛 서며 그대로 얼어버렸다. 시야에 무언가 거뭇한 물체가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잡힌 것이다.


그것은 말로만 듣던 미국 바퀴벌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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