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故 이유영 작가님 애도문을 쓰고 나서
요즘 구독하는 뉴스레터가 꽤 늘었다. 처음에는 3~4개를 넘기지 않으려고 애썼다. 한동안은 처음의 결심이 유효했다. 지금도 겨우 완독하고 있는데, 더 늘어나면 제대로 읽지 못할 거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올여름쯤이었을까. 갑자기 뉴스레터마다 다른 뉴스레터를 추천하면서 결심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 번 받아볼까 싶어서 신청했던 것이 순식간에 새끼를 쳐서(?) 이제 거의 10개에 육박하고 있다.
내용들도 어쩜 알차고 정리가 잘 되어 있는지. 풍부한 자료들 사이에 자신만의 인사이트가 반짝거리는 텍스트들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밀려드는 자괴감을 멈출 수가 없다. 세상에 콘텐츠를 잘 만드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다니. 알고 있는 걸 새삼 확인받는 것인데도 마음이 울컥한다.
비교하지 말자고 매일 다짐하면서도 오늘도 FOMO의 노예가 되어 뒤쳐질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지겹도록 반복한다. 알면 알수록, 보면 볼수록 작아지는 기분은 무력감으로 이어진다. 하면 뭐 해. 한껏 늘어난 테이프처럼 철 지난 소리나 지겹도록 늘어놓을 텐데.
며칠 전, 故 이유영 작가님을 애도하는 글을 썼다. 아니 썼다기보다는 써졌다고 해야 할까. 갑작스럽게 전해진 부고에, 수많은 감정들이 마음을 헤집었다. 남은 가족들에게 작가님이 어떤 의미였는지 꼭 알려주고 싶은 마음에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담아 써 내려갔다. 글을 올리고 나서 찬찬히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마음속에 품었던 생각이 나름의 흐름을 가지고 정리된 글 하나가 모니터 속에 떠 있었다. 누군가가 무릎을 탁 칠만한 표현이나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싶은 탁월한 문장은 없었지만, 괜찮았다. 원래 가진 생각의 모양을 투박하게나마 그려내고 있었으니까.
오래도록 어깨를 무겁게 내리눌렀던 자괴감이 한결 가볍게 느껴진다. 심장을 꿰뚫고 골수를 쪼갤 만큼 날카롭고 세련된 무기가 없다고 징징거리던 내 손엔 무디고 투박한 도구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그래 그거면 됐다. 이런 무딘 도구 하나 있는 게 어디야. 지금 당장 돈을 벌어다주거나,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움직일만큼은 아니어도, 내 마음 하나 정도는 얼기설기 써내려갈 수 있잖아. 이렇게 무딘 도구라도 갈고닦으면, 오늘보다는 내일 조금 더 잘 썰리지 않겠어.
화려한 경력을 가진 어느 마케터의 인터뷰에서 보았던 낙관적 치열함이라는 표현이 떠오른다. 성공가도만 달렸을 것 같았던 그 사람도 매번 비교에서 오는 냉소와 좌절과 싸우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후배들에게 오늘보다 조금 더 나은 내일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낙관적 치열함을 가질 것을 주문했다. 그가 말한 낙관적 치열함을 가져보겠노라 다짐하며, 오늘도 키보드 앞에 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