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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밀키트

배고플 때 장보기 없기

by 화수분

무엇을 먹어야

허기도 채우고 세로토닌과 도파민을 얻어 행복해질까?


돈 버는 일을 하지 않는 나는

많은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다.


오후 4시 반에 대형마트에 갔다.

평소에는 잘 가지 않는 편인데 그 옆을 지날 때

마침 배가 고파서 저절로 거기로 들어가 버렸다.


대형카트를 끌고 목적 없이 매장을 어슬렁거리며 이것저것 담았다.

신선코너 한 쪽면에 다양한 밀키트가 그득하게 진열돼 있다.

포장지에 끌려서

"쇠고기 밀푀유 나베"

이만 얼마짜리를 집어 담았다.

내 생에 처음 밀키트를 샀다.

계산을 마치고 커다란 장바구니 두 개를 낑낑거리며 차에 실었다.


혼자 사는 살림에 무슨 잔치할 장을 보았느냐.

순전히 배고파서 그런 것이다.

냉장고를 채우며 혼자 어이없는 웃음이 났다.


그날 저녁은 요리를 할 시간이 없었다.

장 볼 때 너무 배가 고파서 바로 먹을 수 있는 초밥도 한 줄 사 왔었거든.

냉장고 정리만 하고 맥주 한 캔에 참치, 연어 초밥을 뚝딱 해 치웠다.


행복해졌다.

장과 뇌에게 밥과 술을 먹인 효과는 만점이었다.

초저녁에 창문을 열어젖히고 청소기를 돌렸다.

가뿐하게 청소를 마치고 샤워를 하고

<토지> 만화책 한 권을 보고 잘 잤다.




오늘 아침 밀키트 포장을 뜯었다.

이런!

한 주먹 한 주먹 낱낱이 비닐포장이네.


일일이 포장을 뜯고 재료들을 썰고 냄비에 담고 물을 부으려다

액체가 담긴 비닐이 육수인가 보다 하고 가위로 잘라 넣었다.

어? 이상한데?

걸쭉한 것도 있구나.

아뿔싸!

이따가 찍어먹을 소스를 다 국물에 넣어버렸네.


에라 모르겠다.

포장지 사진은 무시해 버리고 이건 채소국이다.

어차피 뱃속에 들어가면 그만이지.

불고기용 쇠고기 한 줌이 국물맛은 내주겠지.


펄펄 끓으니 구수한 냄새가 났다.

국물맛을 보았더니 아주 끝내준다.

간을 더 할 필요도 없네.


파, 마늘을 넣고 한소끔 끓인 뒤,

뜨신 밥 한 공기와

"쇠고기 밀푀유 나베 소스국" 한 대접을 잘 먹었다.


역시 행복해졌다.

나의 장과 뇌는 요리과정의 실수 같은 건 개의치 않는가 보다.

따뜻한 음식으로 대접받으면 그만인가 보다.

오늘도 나는 나를 잘 먹였다.

뿌듯하다!


오늘은 아무 일정도 없는 수요일이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이 글을 쓴다.

단풍이 유혹하는 깊은 가을,

이제 일어나서 어디로든 가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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