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를 실천하려고 용기를 낸 사람
흰 표지에 붉은 글씨로 제목을 쓴 새 책을 받았다.
<선을 긋다>, 이경화 지음
책표지에 먹붓으로 힘차게 그은 가로 획이 인상적이다.
안쪽 첫 페이지에는 세필로 단정하게 쓴 사인글이 내게 인사를 하는 듯 가지런하다.
"오늘의 무늬가 그려질 순간이 향기롭기를 바랍니다."
경화는 300페이지가 넘는 첫 번째 책을 내느라고 얼마나 고군분투했을까.
3년 전 겨울에 첫 서예작품 개인전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 전시장에서 우리 만났었지.
오랫동안 헤어졌다가, 중학생 딸을 둔 엄마로, 전시를 여는 서예가로 만났을 때 참 대견하다 했는데,
이젠 책을 낸 글작가도 되었네.
경화가 스물몇 살 대학생 때, 나는 초등학생 아이들을 둔 엄마였을 때 우리가 만났었지.
중하선생님의 서실에서 붓을 잡고 씨름하면서 공모전, 동인전을 하겠다고 열정을 태우던 그 시절이 참 그리워.
서예공부를 길게 매진하지 못하고 떠나왔던 나는, 그냥 그 언저리쯤에서 구경꾼이 돼 버렸지.
꽃같이 예쁘고 학처럼 맑았던 경화가,
결혼하고 아이들 키우고 일하면서도 자신의 꿈을 지키고 키워내느라 애가 탔구나.
책 속에서 고스란히 전해오는 습습한 먹물의 향기를 끝내 품어내느라 많이 울었구나.
결혼한 여자의 공부!
아니, 돈도 자격증도 출세도 되지 않는 예술의 길로 가는 고집!
내 부모도, 남편도, 자식도 선뜻 편들어 주지 않는 외로운 길을 걸어가는 사람!
여리디 여린 소녀 같이만 보았었는데 세월이 갈수록 여간 아닌 사람이다, 경화는.
새벽기상으로부터 글쓰기 루틴을 지키고,
달리는 운동으로 마라톤 풀코스 완주,
여러 학교에서 학생들의 방과 후 학습교사,
휴대용 서예키트를 개발해 야외에서 선보이는 용감한 실험가,
꾸준히 붓을 잡고 작품을 연구하는 순수한 서예가!
나는 경화에게 "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를 묵묵히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칭찬해주고 싶다.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강조했다는 문자향 서권기.
갈고닦은 문자에서 향기를 얻고 책을 수시로 많이 읽어 기운을 얻는 학문과 교양의 경지!
아마도 경화작가가 추구하는 공부의 목표도 문자향 서권기에 닿아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서예공부로 매진하는 경화작가의 발길을 더디게 붙잡던 삶의 질곡들도
그의 문자향에 유해한 것만은 아니리라.
깊은 상처는 붓의 중심으로 모아져 거칠고 탄탄한 획이 되고,
그 위에 쌓인 시간들로 하여 점차 맑은 먹빛과 여유로운 운필이 강물처럼 흐르게 될 것이다.
윤갈(潤渴)의 조화로움, 여백의 운치를 담은 경화작가의 두 번째 개인전을 기다린다.
지난 2022년 겨울,
경화작가의 첫 개인전에 다녀와서 나는 이렇게 그리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