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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필우입니다 Apr 07. 2024

망국의 한을 품고 숨을 거둔 최익현 ③

동포끼리 죽이는 일을 나는 차마 못하겠다



   1906년 5월 11일 전 참판 민종식이 호서지방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일전을 벌이고 있던 때였다. 면암 최익현은 그가 아끼던 제자 고석진의 소개로 호남의 임병찬을 만났다. 임병찬은 낙안군수를 지내다 일본군의 간섭에 분함을 참지 못하여 스스로 물러난 인물이었다. 그는 면암에게,     


   “호남의 선비들이 장차 의병을 일으키고자 합니다. 그들 모두 선생님과 함께해야 대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와 함께 그곳으로 가셔서 일을 도모함이 어떠하십니까?”     


   하니 면암은 임병찬에 대한 인물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호남과 호서, 그리고 영호남이 형통하여 함께 일을 도모함이 옳다고 생각한 그는 임병찬과 함께 전라북도 태인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몇 달을 준비한 끝에 의병을 일으키고, 113명의 지사들과 <동맹록同盟錄>을 작성하고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 동참을 호소했다. 또한 일제의 16개 죄목(열여섯 가지 죄를 성토한다)을 들어 국권의 침략과 국제적 배신행위를 통렬하게 지적한 장문의 규탄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해 6월 4일 면암은 강회講會를 열어 민족혼을 일깨우는 열변을 토했다. 무성서원에서 있었던 이 강회는 민족의 혼에 불꽃을 당기는 계기가 되었으며, 항일의병의 역사에 분기점의 날로 기록되었다. 그중 사자후를 토했던 내용 일부를 옮겨보자.     


1900년대 일본 헌병의 한국인 공개 처형  / 위키백과


   “지금 왜적들이 국권을 농락하고 역신들은 죄악을 빚어내 오백 년 종묘사직과 삼천리강토가 이미 멸망지경에 이르렀다. 나라를 위해 사생死生을 초월하면 성공 못할 염려는 없다. 나와 함께 뜻을 같이 하겠는가!”   

   

   최익현 의병은 태인을 무혈접수 하였으며, 정읍까지 장악하여 무기와 병력을 증강하였다. 순창에서 소총과 화약 등 무기를 취하고 곡성에 이르자 각지에서 그를 따르는 의병수가 일천에 달했다.     


  사기가 하늘을 찌르는 의병은 파죽지세 남원으로 향했으나 다시 순창으로 회군하여야 했다. 남원을 방비하고 있던 군인이 왜군이 아니라 같은 대한의 진위대鎭衛隊임이 확인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때에 광주관찰사 이도재가 고종의 선유조칙을 전하며 해산을 종용했으나 고종황제의 뜻에 실망한 면암은 듣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전주관찰사 한진창韓鎭昌이 전라북도 지방진위대를 이끌고 포위하였다. 면암은 당연히 왜군들이 몰려올 줄 알고 있었으나 그들을 포위한 것이 바로 같은 민족, 같은 우리의 형제들인 대한의 군사들이었으니 면암은 고뇌에 싸였다.      


   그는 한진창에게 편지를 보내 의병을 일으키게 된 연유를 밝히고 물러나길 종용했으나, ‘진퇴는 관찰사의 직권이 아니다.’란 답장만이 되돌아왔다. 그리고 ‘민병들을 해산시키지 않으면 전진이 있을 뿐’이라는 통보를 세 차례 보내왔으니 면암은 괴로웠다. 강직한 성정이었지만 백성의 아픔을 이해했던 마음이 같은 백성에게 총칼을 겨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면암은 임병찬을 불러 왜군이라 하면 죽기로 싸우겠지만, 같은 동포끼리 서로 죽이는 일을 나는 차마 하지 못하겠다며, 동포끼리 서로 박해를 하는 것은 원치 않으니 즉시 해산을 시키라 명했다. 그들은 눈물을 머금고 해산하기 시작하였으나 임병찬을 위시한 의병장 십 수 명만 남아 체포당했다. 그동안 면암이 품어왔던 날선 도끼를 같은 민족에게 휘두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서울로 압송하라’는 명령에 서울로 향했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조선의 관리가 아니라 일본의 군인이었다. 일본군이 면암을 심문하자,     

   “황제의 칙령이 아니라 일본 군인들이 나서서 무슨 짓거리냐?”    

 

   하니, 일본군 장교는 험악한 인상을 구기며 면암을 닦달하며 조서를 꾸미고자 했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대한의 나라 최익현이 어찌 왜놈 사령부 명을 받겠느냐?”     

 

   하며 호통쳤다. 그러나 기개만 있었을 뿐 힘없는 나라의 노학자는 결국 임병찬과 함께 일본법에 따라 대마도로 유배를 당한다. 어찌 원통하고 분하지 않았을까? 나머지 의병장들은 장 일백 대를 맞고 풀려났으니 그중 곤장의 여독을 이기지 못해 목숨을 잃은 이도 있었다. 무능한 나라님과 자신의 배만 채우려는 위정자들에 의해 무너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하였으나, 돌아 온 것은 매질에 의한 죽음과 상처뿐이었다.      


   결국 적국의 나라로 떨어진 유배였다. 만신창이가 된 몸보다 가슴에 맺혀있는 응어리가 더 힘겨웠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그간 국가 공덕으로 살아왔던 인간들은 뒤로 숨는 반면, 국가의 혜택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백성의 노력이 빛을 발하게 마련이었다.     



채용신 화백이 그린 의병장 면암 최익현 선생 초상화(위캐백과)



*

   면암과 임병찬은 일본헌병을 압송관으로 하여 머나먼 이국땅 대마도로 향했다. 예부터 왜구들의 소굴이었던 대마도는 협소하고 척박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그만큼 농토 또한 비좁아 늘 식량이 모자랐다. 그러나 그것을 타개하기 위한 노력은커녕 근성대로 노략질에 의존하곤 했다. 그런 이웃을 둔 조선은 늘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유배길의 면암은 회상에 잠겼다. 지난날 조선의 용사 이용복이 떠올랐으며, 거슬러 올라 고려의 창왕 때 정벌을 시작한 예로, 조선태조 5년에, 그리고 태종(세종1년) 때에 이종무를 삼군도제찰사로 삼아 정벌했다. 당시 대마도 주민은 노략질을 떠났던 자신들 가족이 돌아온 줄 알고 모두 나와 환영을 했다고 한다.      


   가옥을 불태우고 왜구를 참수하는 등, 전과를 올렸으나 안타까운 것은 그곳을 조선의 나라로 복속시키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지난날 생각으로 면암은 또 한 번 울분을 토하게 되니 그의 노회한 얼굴은 일그러지고 있었다.     


   넘실대는 바다를 바라보며 이제 살아서 돌아가리란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부산포에서 멀어지는 자신을 돌아보며 생각한 것이다. 단 하루라도 어찌 왜놈들의 치하에서 숨을 쉬며 먹고 살 것인가? 그러나 이미 잡힌 몸이니 그들과 제대로 된 싸움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이렇게 된 자신을 원망했다.      


   그리고 오백년 왕조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니 종말을 고한 종묘사직은 그렇다 해도, 일본의 압제에 시달릴 순하고 힘없는 민초는 또 어찌할 것인가? 하며 통곡하고 또 통곡하니 검푸른 바다 대한해협은 물결을 멈추고 침묵으로 함께 울었다. 그러나 결국 왜적은 망할 것이라 확신했다. 끝없는 야욕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였으며, 그들 미친 근성으로 보아 끝장을 보고서야 물러설 위인들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면암의 예언은 적중했다. 일본은 훗날 지구촌을 피의 전장으로 몰아가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나서야 짓거리를 멈추게 된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힘없는 자들의 몫이요, 나약한 이웃나라들이 떠안으니 진정으로 신이 존재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각설하고, 면암과 임병찬을 실은 배가 이즈하라 항구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서 일본군 경비대에 인계되었으며, 일본헌병의 감시 하에 놓였다. 그곳에는 5월 11일 호서지방에서 의병을 일으킨 남규진, 유준근 이식 등 의병장 아홉 명이 먼저와 있었다. 그들은 보령·홍주를 공격하여 홍주성을 함락하였으나,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잡혀 이곳으로 유배당한 처지가 되었던 것이다.     


   7월 9일, 호서지역과 호남지역 의병장들의 만남은 이곳 대마도에서 이루어졌다. 이들은 반가워할 수만은 없는 슬픈 운명을 한탄하며 상견례를 했다. 기구한 사연에 가슴만 먹먹할 뿐이었다. 이들은 돌아가면서 자신의 심경을 시로 읊어 슬픈 밤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 일본헌병이 면암의 두건을 벗기며 머리칼을 자르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누구이던가? 감히 그의 기개만큼은 일본헌병도 꺾지 못했다.     


   “어찌 대한제국의 사람이 일본의 명을 따르겠는가? 나는 대한제국의 사람이다.”     


   하며 호통을 쳤다. 그러나 일본헌병은 칼을 그의 목에 갖다 대고 소리쳤다.

   “너는 이미 우리 대일본국이 준 음식을 먹지 않았느냐? 그러하니 이는 내 명령에 따라야 할 것이다.”     

   이 말에 면암은 ‘아차!’ 싶었다. 그러나 그는 목을 더 가까이 하며 울분을 토했다.     


   “이놈, 어서 찔러보아라! 어디 감히 왜놈이 나를 겁박하느냐! 하나 이미 먹은 밥이야 어쩔 수 없으나 내 지금부터 너희가 주는 음식은 일체 목으로 넘기지 않겠다.”     


   하며 그때부터 면암은 단식에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간 단식이 지속된다. 노구의 몸은 점점 지쳐 병들어갔다. 그리고 한 번 거처를 옮겨 쓰시마 섬 현재 육상자위대가 있는 그곳이었다. 그러나 단발령이 해제되어 음식을 조금씩 입에 대었으나 노쇠한 면암의 단식후유증은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의 절개만은 변하지 않았다.     


   “일본군이 주는 일본의 약은 절대로 들이지 말라. 이 한 몸 죽을지언정 그들의 약으로 치유하지 않겠다.”     

  

   라며 최익현은 엄명을 내렸다. 임병찬 이하 함께 생활하던 그들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몸이라도 성해야 나중에라도 자유의 대한제국을 볼 것’이라며 종용했으나 죽음을 각오한 면암의 생각은 굽힐 줄 몰랐다. 그리고 임병찬에게 구술로 자신의 마지막 상소를 전했다.      


   -……. 부디 의뢰심을 버리시고, 자립정신을 굳건히 하소서! 그리고 국제관계에 비추어볼 때 일본은 반드시 미구에 망할 것이니 미래를 생각하고, 또 생각하소서!……-     


   그는 일본이 망할 것이라는 예언했다. 그러나 면암은 그해를 넘기지 못하고 11월 10일 사경을 헤매다 일주일 뒤인, 1906년 11월 17일 가까운 땅이었으나 멀고도 먼 이국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그때 그의 나이 74세였다.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산24-1   

면암 최익현 묘.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 산24-1(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면암 최익현은 23세 때인 1855년(철종6) 명경과에 급제하고, 승문원 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성균관 직강, 사헌부 장령 등의 관직을 두루 지내면서 1870년(고종7)에 승정원 동부승지로 승진하고, 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여 대원군 실각을 이끌어 내기도 했던 그였다.      


   고종의 심임을 받아 호조참판에 올랐으나 제주도 유배에 이어, 조일수호조규 때에 도끼상소로 흑산도에 유배되었다가 1906년 긴 침묵을 깨고 전라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태인과 순창을 접수하였으나, 같은 민족끼리 싸움을 원치 않는다며 스스로 무장해제하고 붙잡혔다. 이후 일본에 의해 이곳 대마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단식의 후유증으로 죽음을 맞았다. 당시 대마도 주민은 그의 절개와 의연한 기개를 높이 사 그를 흠모해 마지않았다.     


   임병찬을 위시한 남은 열 명의 유배인이 상주가 되어 대마도에 신라인이 세웠다는 사찰 수선사修善寺에 시신을 모셨다가, 이틀 후 부산 초량으로 돌아오니 소식을 듣고 나온 유림과 시민들은 영구靈柩를 붙들고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다. 노제를 지내며 울부짖는 사람들 때문에 운구행렬이 늦어져 15일 만에야 정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자를 신봉하며 왕도정치로 요순의 시대를 만들어 가고자 했으나, 급변하는 시대에 역동의 시간이었던 구한말, 대쪽 같은 직언으로, 오로지 항일론을 외치며 민족혼을 일깨운 학자로, 의병장으로, 청렴하며 강직한 성정과 국가의 안위를 생각하는 충신이었다.      


   그리고 ‘같은 백성끼리 총칼을 겨눌 수 없다.’는 그의 깊은 속내는 면암이 우리 후손의 가슴에 던지는 진정한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     



* 브런치북 [한반도를 떠도는 유배객의 혼] 마지막회입니다.

 30회지난회에 마감되어 연결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동안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인사 올립니다!


* 오랜만에 글 올리는 듯합니다. 요즘 바쁜 일이 있어 약속한 글을 많이 빠트렸습니다. 찾아주신 글벗님들, 죄송하고 또 고맙습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ppw5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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