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목적은 '코페루니쿠스적 인식의 전환'
분수이야기에 이어서 유리수와 무리수에 대한 이야기로 '인식과 확증'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분수와 유리수가 같은 것일까?
우리는 초등학교 5학년때 분수를 배운다. 그런데 분수를 배울 때 유리수라는 개념을 함께 배우지는 않는다.
분수 (fraction)는 수를 나타내는 ‘ 표현방법’이지 ‘수의 체계’는 아니기 때문이다.
즉, 분수는 어떤 수/어떤 수 와 같이 분수기호 (/)로 나타낸 모든 수를 말한다.
중학교 2학년 때 배우는 유리수는 ‘정수/정수로 표현될 수 있는 수‘이고 정수를 포함하는 수의 체계이다.
2 나누기 3은 몫이 정수로 나누어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2/3으로 표현한다.
이 분수 2/3를 초등학교 때는 유리수가 맞지만 유리수라고 지칭하지는 않는데 그 이유는 아직 정수의 개념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산에서 ‘닫혔다는 개념’과 이에 따른 수의 체계를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분수’라고만 배운다. 분수는 수 연산에 따른 표현방법이고 나눗셈의 과정을 나타내는 일종의 식이다.
루트 2/2는 분수이지만 유리수는 아니다 6/2 도 분수이지만 정수이다. 즉, 분수는 / 가 있는 모든 수를 지칭하는 것이므로 엄밀하게 말하면 수가 아니고 ‘수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유리수(有理數)는 영어로 rational number라고 한다.
그런데 일부에서 '유리수'라는 명칭은 잘못된 번역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 단어는 일본 수학계에서 유리수의 영어인 'rational number'에서 rational을 사전적인 의미 그대로 ‘이성적인, 합리적인’으로 번역하여 ‘합리적인 수’, ‘이성적으로 타당한 수’라고 해석하였고, 이것을 한자 有理数라고 표현하였다고 한다. 즉 이것은 처음 단어가 중역되어 한국으로 넘어온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므로 유리수(有理数)를 단순히 사전적인 의미에 의존하여 번역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ratio-nal'로 나누어 번역해 '유비수(有比數)'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비 (ratio, 분수꼴)로 나타낼 수 있는 수’가 되어야 하고, 똑같은 이유로 ‘비로 나타낼 수 없는 수’는 무리수(無理數)가 아니라 무비수 (無比數)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다소 무리가 있는 주장이다.
무리수를 irrational number라고 하는데 이는 영어 irrational의 어원인 라틴어 irratiōnālis의 역사에서 더 명확히 드러난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루트 2는 비로 나타낼 수 없음(incommensurable)을 증명하고 이를 'irratiōnālis'(도리에 어긋난, 비합리적인)이라고 한 것이 최초지만 나중에 피타고라스 학파 출신 아르키타스(Archytas)의 제자 에우독소스(Eudoxus)가 irratiōnālis라는 단어에 '비로 나타낼 수 없는'이라는 뜻을 재정립해버렸다. 이렇게 처음 단어가 만들어졌을 당시에는 '합리성'의 여부에 따라 단어가 만들어진 것이었으나, 이는 무리수를 수로 인정하지 않던 시대의 발상이기 때문에 오늘날 수학계의 패러다임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참고 나무위키]
또 다른 이론은. 에우클레이데스의 원론 10권을 포함한 고대 그리스 수학책에서는 유리수를 비로 나타낼 수 있기 때문에 ‘비로 말할 수 있는 수’. 길이를 ‘말할 수 있는 (ῥητός 레토스[ratio])수 ( 당시의 수체계는 정수와 정수의 비로 나타낼 수 있는 유리수까지였다)이고 그렇지 못한 것을 ‘말할 수 없는(ἄλογος 알로고스)’ 길이라고 불렀다. 알로고스(allogos)는 글자 그대로 로고스가 없다는 뜻의 단어로, ‘말 없음·이성 없음’ 등을 뜻한다. 이것이 라틴어 numerus irrationalis로 번역되어 지금에 이른다. [참고 위키피아]
히파소스는 직각이등변삼각형의 밑변과 빗변의 비는 정수의 비율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는 우주가 완벽하여 모든 것이 정수의 비로 표현될 수 있다고 믿었던 피타고라스 학파에 충격을 주었다. 전설에 따르면 피타고라스 학파의 동료들이 ‘우주의 섭리에 거스르는 요소를 만들어낸’ 히파소스를 살해했다고 하며, 또 다른 일설은 죽이진 않고 추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유리수는 ‘비로 나타낼 수 있는 수’ (레이티오 넘버)였고 무리수는‘ 말할 수 없는 수’ (알로고스 넘버)였다. ratio는 형용사 어미가 붙어 rational로 표현되었으나 단어 자체는 이성, 진리, 합리적인 과 동일한 단어이므로 유리수라고 번역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무리수도 allogos를 단어 그대로 번역하면 이성적이지 않은 수 즉 無理數 로 번역이 가능하다. 원래 irrationalis는 allogos를 번역한 것이다. 결국 이것은 ‘말할 수 없는 수“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 만물의 근원이 수‘이고 이 수는 ’ 유리수‘ 였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이러한 진리에 맞지 않는 수를 말할 수 없었고, 당시까지의 수 체계인 유리수의 ’ 길이로 말할 수 없었던(나타낼 수 없는) 수‘이다.
무리수의 존재에 대한 가능성으로 수체계에 대한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고대 바빌로니아 이집트에서는 분수의 개념은 있었지만 무리수 존재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고, 아이러니하게도 모든 수가 유리수라고 믿고 있었던 피타고라스학파가 무리수 개념을 발견한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당시 피타고라스학파는 ‘모든 수는 정수의 비로 표현 가능하다.’고 믿었으며 ‘모든 크기들은 같은 표준으로 잴 수 있다.’는 ‘공통척도’를 가정으로 한 비례의 정의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통약가능’(commensurable)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떤 유리수에도 대응하지 않는 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유리수와 구별되는 수로서 무리수의 정의가 필요하게 되었다.
기하에서의 발견과 마찬가지로 대수적인 측면에서도 무리수는 발견되었는데 정사각형의 변과 대각선의 비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그 비는 ‘수’-즉, 유리수(정수 또는 분수) - 로 표현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제 무리수의 존재는 감춘다고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정사각형의 대각선의 길이가 무리수이듯, 주변에서 무리수 값을 찾는 것은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고대 그리스인들은 무리수를 수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무리수의 근삿값을 분수 형태로 계산해 활용했다.
그 후 중세 서유럽에서 상업과 무역이 발전되면서 전통적인 수의 개념을 확대해 무리수까지 다룰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천문 및 항해 계산이나 이자 및 세금 계산 등을 위해서는 무리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때마침 이슬람 세계로부터 대수학이 전해지면서 수학 계산에 무리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슬람 수학자들은 2차 방정식의 해법을 연구했는데, 그 과정에서 해 중에 무리수인 제곱근이 포함됨을 이미 발견했다. 대수학을 집대성했던 카르다노는 대수적 논의의 대상을 음수와 무리수까지 포함하여 확대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수 개념이 굳건한 상태에서 무리수를 인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르네상스기 시기에 상업이 더욱 발전하고 원거리 항해가 활발해지면서 방정식 연구와 무리수 계산은 더욱 시급해져 갔다. 프랑스의 수학자 비에트는 대수학 연구에서 무리수까지 포괄하는 문자 기호 사용을 제안했다. 문자를 활용하여 보다 근대적인 식과 계산을 보여주었다. 수를 대신해 기호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유리수든 무리수든 동일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자 전통적인 수 개념에 대한 도전은 더욱 거세져 갔고 무리수도 자연스럽게 합리적인 의심이 아니라 확정된 수의 체계로 자리 잡게 되었다.
무리수로의 수의 확장을 천문학과 비교하여 생각해 보자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관점은 이미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철학적 관점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다. 즉, 불인 태양은 지구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우주의 가운데에 위치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그 후 태양중심 체계를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은 사모스의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os, 310?~230B.C.)이다. 그는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저서 『태양 및 달의 크기와 거리에 대해서』에서 삼각법을 이용하여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와, 지구와 태양사이의 거리의 비를 구하였고 지구와 태양의 상대적인 크기를 계산하는 것을 통해, 거대한 태양이 지구의 주위를 도는 것보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도는 것이 이치에 맞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에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지구중심설(천동설)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이러한 구상은 히파르코스 등에 의해 부정되었지만, 후에 코페르니쿠스의 선구가 되었다.
폴란드의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는 1530년쯤에 자신의 주된 역작인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De Revolutionibus orbium caelestium』를 완성하였지만, 출판하지는 않았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1543년 5월 24일 그가 죽던 날 이 책의 인쇄본을 전달받았다고 한다. 당시 종교계의 반발과 ‘천동설’이 지배하던 세계관에서 ‘지동설’을 얘기한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이후, 덴마크의 천문학자인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2.27.~1630.11.15.)가 천체의 행성 운행속도에 대한 법칙 발견과 망원경을 고안한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2.15 ~ 1642.1.8)의 관찰로부터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뒷받침할만한 증거들이 발견되었다. 주기적으로 바뀌는 금성의 크기와 밝기를 관측한 것은 코페르니쿠스 체계에 대한 강력한 증거가 되었다. 이후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2? 1643?~ 1727)의 만유인력에 바탕을 둔 궤도해석과 제임스 브래들리 (James Bradley 1693.3 ~ 1762.7.13)의 광행차 발견(1727), 프리드리히 베셀(Friedrich Wilhelm Bessel 1784.7.22 ~ 1846.3.17)등의 연주시차의 검증(1838)에 의하여 태양중심설은 확고한 것이 되었다.
이와 같이 지동설은 코페르니쿠스가 최초로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최초로 인식된 것은 고대 그리스 때라고 볼 수 있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타르코스 등은 존재 자체의 확증보다는 ‘태양이 중심’ 일 것이다라는 인식과 의심을 했고 밝혀보고자 시도했다. 이런 ‘합리적 의심’이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증명되기 시작했으며 케플러와 갈릴레이 갈릴레오, 뉴턴에 의하여 확실히 사실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로도 시간이 조금 더 흐른 후 여러 과학자들의 증명과 연구를 통해 확고한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리수도 존재에 대한 ‘합리적 의심’이 피타고라스학파 때부터 시작되어 오랜 시간 동안 존재에 대한 의심과 관찰을 거친 후 카르다노, 데카르트, 비에트등의 연구에 의해서 확정되게 된 것이다.
무리수는 발견도 발명도 아니다. 수의 체계는 자연과학과 인식의 발전에 따라 자연스럽게 확장되어 나갔다. 무리수 이후 허수의 발견, 사원수 등으로 수의 체계는 더 넓어지게 되는데 어떤 새로운 수가 또 발견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그의 저서 <순수이성비판>에서 자신의 인식론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이름 붙였다. 코페르니쿠스는 살펴보았듯이 지동설 주장의 최초 인물은 아니지만 천체의 운행은 태양을 중심으로 돈다는 태양중심이론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을 최초로 펴내면서 당시 천동설을 숭배하던 기존 사회에 크나큰 충격을 주었다. 즉, 칸트의 이 말은 과학적 인식의 근거를 객관이 아닌 주관으로 이전시켰다는 점에서 천문학상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비견할 만한 인식론상의 전환을 가져온 것을 비유한 것이다.
우리의 수학이나 공부의 목적은 타자에 의해 정해져 있는 것을 반복하고 연습해서 배우는 것에 있지 않고 스스로 주체적인 사고와 인식, 궁리 속에 발견과 발명, 조합, 생성해 나가는 데 있음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