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올해 95세이시며 미국에서 생활하고 계십니다. 여전히 정정하시어 시니어 센터에 다니고, 집에서는 잠시도 쉬지 않으며 무엇인가를 하십니다. 간단한 빨래도 하시고 음식을 만들고, 화분에 물을 주시고, 성경을 읽으며 한글 낱말 맞추기를 하십니다. 손을 놓지 않는 삶의 열정이 여전히 빛나는 분이십니다.
어머니는 38년 전, 고향의 정든 땅을 떠나 누나가 살고 있는 미국 시카고로 향하셨습니다. 가난한 시골에서 가족을 위해 농사를 짓고 집안의 종손으로 헌신해 오신 어머니는, 결혼한 누나의 초청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나셨습니다. 하지만 미국에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를 떠나보내며 혼자가 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딸의 보살핌 속에서 강인한 모습으로 살아오셨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 어머니는 변함없이 가족을 사랑하는 법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한국에 남아 있는 제가 가끔 방문할 때마다, 어머니는 주름진 손으로 제 가방 속에 몰래 모아둔 달러를 넣어두셨습니다. 그리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한국 도착하면 가방 속 주머니 열어봐. 손자들에게 맛있는 거 사줘.”
제가 아무리 사양하고 화를 내도, 어머니는 늘 같은 말을 하셨습니다. “괜찮아, 엄마가 주고 싶어서 그래.” 그 작은 돈에는 단순한 물질적 지원이 아니라, 평생 자식과 손주를 먼저 생각하는 어머니의 깊은 마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운동화에 담긴 어머니의 마음
이번 겨울, 저는 아내와 함께 미국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뵈었습니다. 오랜만에 뵌 어머니의 얼굴은 여전히 밝고 생기가 넘쳤습니다. 겨울 시카고의 눈과 매서운 추위 속에서도 아내와 저는 오랜만에 외국에 온 기분을 만끽하며 시내를 돌아다니고 쇼핑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 문득 현관 앞을 보니 제가 신던 운동화와 아내의 운동화가 깨끗하게 닦여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몰래 눈길에 더러워진 신발을 조용히 물휴지로 닦아 두신 것이었습니다. 신발을 물로 세탁할 생각은 해도, 바깥에 묻은 먼지는 무심코 지나치는 경우가 많았던 저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작은 물휴지를 꺼내어 정성스럽게 운동화를 닦아 놓으셨습니다.
“깨끗한 신발을 신으면 새해에도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거야.”
그 말씀에 가슴이 저릿하도록 따뜻해졌습니다. 단순히 신발을 닦아 주신 것이 아니라, 아들에게 새해의 희망과 배려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부모의 사랑이란 이렇게 작은 행동 하나로 전해지는 것이 아닐까요?
한국에서의 신년 아침, 이어지는 사랑의 릴레이
설날 아침, 아들 내외가 우리 집을 찾아와 온 가족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저는 아내, 아들, 며느리, 그리고 손자와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새해의 기쁨을 나눴습니다.
아침 일찍 아파트 현관을 정리하고 돌아서던 순간, 문 앞에 놓인 가족들의 신발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순간, 미국에서 어머니께서 제 신발을 닦아 주시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따뜻한 감정을 되새기며 저는 조용히 물휴지를 꺼내 가족들의 신발을 하나씩 손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정성껏 먼지를 닦아냈습니다. 어머니가 제게 베풀어 주셨던 것처럼, 저도 가족의 새해를 깨끗하고 희망차게 열어 주고 싶었습니다.
잠시 후, 손자가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신발이 반짝이네요!”
그 순간, 어머니의 작은 행동이 가족의 사랑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실감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저에게 주셨던 사랑이, 이렇게 제 손을 거쳐 다음 세대로 전달되고 있었습니다.
거리를 이어주는 ‘보이지 않는 실’
미국과 한국, 물리적으로는 머나먼 거리입니다. 하지만 부모의 사랑은 국경도, 시차도 초월합니다. 우리는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영상 통화를 할 때마다 어머니는 여전히 제 걱정을 먼저 하십니다.
“밥은 잘 챙겨 먹니?” “아이들은 잘 있지?”
한결같은 질문 속에는 한없는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매주 한 번씩 안부 전화를 드리지만 때때로 예상치 못한 전화가 걸려오기도 합니다. “건강해야 한다, 밥 잘 챙겨 먹고.” 단 한마디 속에서도 깊은 걱정과 애정이 전해집니다. 부모님의 사랑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는 것임을, 이제야 조금씩 깨닫게 됩니다.
작은 것에서 시작하는 가족의 온기
어머니의 물휴지 한 장, 가방 속 몰래 넣어둔 달러, 새해 아침 닦아 놓은 신발. 사랑은 거창한 것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작은 행동 속에서 가장 깊은 온기가 전해지는 법이지요.
우리는 각자 바쁜 삶을 살아가며 때때로 가족의 소중함을 잊고 지냅니다. 하지만 부모님의 작은 손길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따뜻하게 해 주었는지를 떠올려 보면 좋겠습니다. 어머니가 보여 주신 사랑으로 나도 누군가의 신발뿐만 아니라 눈물까지 닦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예정입니다.
새해에는 작은 손길 하나가 사랑이 되어 돌아오는, 그 온기를 많이 느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