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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도알 May 01. 2024

25편. 뚤루즈 한식당에서의 만찬

[25화] 누군가 내 생을 근사한 영화로 만들어버렸다.

기분이 묘하다. 오늘은 2주간 함께 걸었던 조안나, 마리엘라와 함께 걷는 마지막 날. 내가 두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는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감정이다.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의 마지막 남은 한 입을 베어 물기 직전의 마음 같기도, 우연히 만난 흥미진진한 책을 놓지 못하고 순식간에 읽다 마지막 챕터를 남겨둔 마음 같기도 했다. 마지막이란 단어가 가져다주는 아쉬움이 마음을 가득 메웠다. 오늘은 먹구름 낀 하늘에 비 예보가 있었다. 스패츠며 판초우의를 장착하고 나니 다리에 묵직한 무게감이 더해졌다.

헤어짐을 준비해야 하는 내 마음처럼.   

조안나, 마리엘라와 함께한 큰 즐거움 중 하나는 수다였다. 주제는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었다.


청년실업은 한국의 문제만이 아닌 이탈리아가 마주한 심각한 사회문제란다. 어떤 날은 어릴 적 꿈을 소환시켰다. 이탈리아에서 음악교사를 하다 은퇴한 60대 후반인 마리엘라의 어릴 적 꿈은 발레리나. 지금은 아들이 좋은 여자 만나 장가가는 게 평생 꿈이란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익숙한 얘기.

사람 사는 건 다 똑같은가 보다.     


그러다 오늘은 뚤루즈 비정상회담이 열렸다.


며칠 전 문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이 극적으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악수하는 장면이 전파를 탄 탓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두 이탈리아분들은 곧 통일이 되는 것 아니냐며 한껏 들떠 있었다. 마리엘라는 못해도 10년 안에 통일이 될 것 같단다. 하지만 난 시큰둥.


그간 얼마나 속았으면 “늑대가 나타났어요! 늑대가!!”라고 해도 별로 놀라지 않는 회의론자가 되어 있었다. 슬프지만 어쩌랴. 진짜 늑대가 나타났을 때 어마무시하게 놀라도 좋으니 마리엘라가 기대하는 결말이 한반도에도 곧 찾아왔으면 좋겠다.     

이번에는 인접국가인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요즘 정세로 이야기가 옮겨졌다. 요즘 프랑스는 이탈리아를 못마땅해한다고 귀띔해 줬다. 이탈리아가 지리적으로 가까이에 있어서 아프리카 사람들이 넘어오는데 이탈리아가 그들을 다 받아주고 있단다. 그런데 그 이민자들이 다시 프랑스까지 넘어와 골머리를 썩는다는 것이다.


순례 시작 전 마르세유를 여행했을 때 역 주변에 많은 아프리카 노숙인들이 무리 지어 있던 모습이 생각났다. 아울러 프랑스가 살기 좋은 곳이라는 말은 옛말이라며 힘듦을 토로하던 남프랑스 아주머니의 모습도. 인접 국가 간에는 서로의 이해관계로 갈등이 있을 수밖에 없나 보다.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멕시코와 미국.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처럼.     

시간이 좀 더디 갔으면 했는데 한참 나라 걱정하며 걷다 보니 어째 더 빨리 간 것 같다. 수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우린 뚤루즈 도심까지 지하철을 이용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문명의 교통수단을 이용해 도착한 ‘카피톨 광장’. 이 고장에서 나는 점토로 만든 붉은빛 벽돌을 이용해 지어진 건물들이 많아 뚤루즈를 ‘장미도시’라고 칭한다더니 과연 그랬다.


광장의 북적임과 많은 인파가 주는 생동감은

우리의 순례 1막의 엔딩을 축하해 주는 것 같았다.      


마침 광장에 방송을 타는 시음회 같은 게 있었다. 마이크를 든 진행자들도 스테판 메종 아저씨의 비범함을 알아보시고 인터뷰를 요청하신다.

또 아저씨는 자연스럽게 마이크를 잡는다. 역시 재미난 분이다. 우리 셋은 그게 또 신기해 그 순간을 카메라에 담는다. 시음회 덕분에 와인을 한 잔씩 들고 Salute(살루떼:이탈리아어로 건배)를 외치며 우리의 무사순례를 했다.      

한바탕 축배가 끝나고 순례자의 루틴대로 우린 성당으로 향했다.

중세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스테인드 글라스가 멋진 성 에티엔 성당(Saint-Etienne Cathedrale)을 거쳐, 유럽에 남아 있는 가장 큰 로마네스크 양식 건축인 생 세르넹 대성당(Saint-Sermin Cathedrale)이 뿜어 내는 웅장한 매력에 푹 빠졌다.

생 세르넹 대성당(Saint-Sermin Cathedrale)

성당을 둘러보고 스페판 메종 아저씨와는 작별 인사를 나눠야 했다. 아저씨는 자연스레 프랑스식 인사(비쥬 La Bise; 상대를 만나면 가까이 다가가서 볼을 대고 쪽 소리를 내면서 하는 볼인사)를 건넸는데 순간 난 움찔하며 얼굴을 뒤로 뺐다.


아! 포도알! 촌스럽기는.


죄송했지만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해 버렸다.

아저씨도 살짝 머쓱한 미소를 지었지만 문화적 차이에서 나온 해프닝이라 이해해 주시는 것 같았다.      

Saint Etienne Cathedrale in Toulouse by 김명숙

그리고는 함께 묵는 마지막이 될 숙소에 도착했다. 일전에 조안나와 마리엘라가 음식을 만들어준 날 채식주의자인 조안나를 위해 다음엔 내가 한국의 비빔밥을 만들어주겠노라고 큰소리를 떵떵 쳤었다.


그런데 조안나가 숙소 인덕션을 켜보더니 화력이 영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영 아닌 건 화력만이 아니었다. 내 몸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졌다.

그런 내게 요리를 해달라고 하기도 미안했는지 조안나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산뜻한 제안을 해왔다.      


"아까 지나갈 때 봤는데 시내에 한식당이 있더라구요. 젊은이들이 줄을 길게 서서 오픈을 기다리는 걸 보니 틀림없이 맛집 같아 보였어요. 우리 거기서 식사할까요?"


오케이! 그럼 제가 두 분께 신세 진 것도 많고 또 우리의 마지막 식사니만큼
제가 대접해 드릴게요.      

그렇게 우린 남프랑스 한 복판에 있는 한식당, 보리카페에 도착했다. 우와! 신기했다. 정말 많은 젊은 외국인들이 한식당 앞에 줄을 서 있었다. 많은 분들이 한국 음식을 좋아해 주시는구나. 더 신기한 건 식당 테이블이 20개는 족히 넘는 이 한식당 안에 한국인은 내가 유일했다는 거다. 뭔지 모를 뿌듯함이 올라왔다.


"제가 여러분들이 맛있게 드시고 계신

그 음식의 나라, 한국에서 왔어요."

라고 외치고 싶었다.   

  

대표메뉴는 잡채밥과 비빔밥. 비빔밥의 야채는 공통이었고 토핑을 선택할 수 있었다. 돼지고기, 닭고기, 소고기, 오리고기, 두부 등. 나는 잡채밥, 마리엘라는 소고기 토핑의 비빔밥, 채식주의자인 조안나는 두부 토핑의 비빔밥을 시켰다. 기본 간장 소스가 있고 각 테이블에는 고추장이 놓여 있었다. 한국의 매운맛에 도전해 보라는 듯. 다음은 음료 선택.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 음료라고 하니 식혜를 먹어보겠단다.      

보리 카페 잡채밥과 비빔밥 메뉴 (한글 발견 반가움)

드디어 메뉴가 나왔고 난 음식 먹는 법을 간단히 설명해 줬다. 두 사람은 난생처음 젓가락질을 해본다보며 웃음 가득한 재밌는 식사를 이어갔다.


그중 두 분은 사이드메뉴로 나온 미역 초무침에 반했다. 


쓱싹 순식간에 비웠다. 외국인들은 해초를 먹지 않는 줄 알았는데 이탈리아도 바다를 끼고 있어 우리나라와 식성이 맞는 것 같았다. 정말 맛있단다.


다음 식혜를 마신 두 사람의 표정을 살폈다. 근데 대체 무슨 맛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난감한 표정이다.

암~ 식혜의 깊은 맛을 첫 시도에 느끼기란 쉽지 않지. 그것도 마트에 유통되는 캔식혜로.


그녀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알로에 음료였다. 달달하니 씹히는 맛도 너무 좋단다. 조안나는 자기가 사는 지역에도 한식당이 있는데 어떻게 먹는지 잘 몰라 선뜻 들어가질 못했는데 이제는 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얼굴 가득 자신감을 내비쳤다.


나도 민간 문화 사절단이 되어 국위선양이라도 한 듯 덩달아 어깨가 올라갔다. 그렇게 두 이탈리아 친구들과의 한식 만찬으로 2주 간 순례 동행의 마지막 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Notre-Dame du Taur in Toulouse(조안나와 마리엘라의 뒷모습)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우린 타우르 노트르담 성당(Notre-Dame du Taur)에 들렀다. 성당 정면의 따뜻한 프레스코화는  잠시 성당 의자에 앉아 보라며 우리의 발길을  이끌었다. 그리고 우리의 가슴속에 그 따스한 기운을 내어 주며 지난 여정에 대한 감사의 싹을 틔워주었다.     


두 사람의 기억 속 그 해 순례는 어떤 그림일까?


지금도 조안나와 마리엘라가 지인들과 가끔씩 한식당에서 비빔밥을 먹으며, 한 때 우연히 만난 한국 순례객 덕분에 뚤루즈에서 한식을 처음 접했다며 그날을 좋은 추억으로 회상하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도 잊지 못할 추억으로

생생히 아로새겨진 내 기억처럼.

Day 22: Ayguesvives Toulouse 21.5km (03/05/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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