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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byss Dec 09. 2024

시네필로서의 인간

후지모토 타츠키의 인간론

 

  영화라는 매체는 그 개념이 현대인들에게 이미 아주 일상적이고 보편적으로 자리잡았지만, 그 개념을 공유하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인상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같은 단어를 사용해 지칭하더라도 60대와 30대, 10대가 공유하는 영화 체험은 매우 다를 것임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소극장, 대형 멀티플렉스 상영관, 비디오테이프, DVD와 블루레이, 그리고 넷플릭스. 돈이나 멋을 따라가느라 휙휙 바뀌는 내용과 형식들, 그러니까 누군가는 근본 없는 예술이라고 깎아내리는 그 문제들 때문에 오늘날 한 인간이 영화에 대해 갖는 추억과 인상이라는 것은 현대인이라 불릴 수 있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개별적일 수 있다. 마치 어떤 학교의 졸업생들이 모두 한 학교를 떠올리더라도 각기 다른 향수를 품듯이 말이다. 


  후지모토 타츠키 역시 그만의 영화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나는 느낀다. 대학에서 유화를 전공한 인기 만화가인 그는 유독 작품에 영화에 대한 대사나 표현을 즐기기로 유명하다. <체인소 맨>의 마키마, <안녕, 에리>의 에리, <파이어 펀치>의 토카타까지 등장한 영화광 캐릭터만 해도 벌써 셋이다. 흔히들 하는 '삶은 한 편의 영화다.', '영화 같은 순간'이라는 말들은 무엇을 주장하는가? 이런 동일시가 일반적으로 일종의 낭만적 찬사인 것과 다르게 후지모토 타츠키의 비유는 보다 행위적인 측면에 집중하고 있다.








삶은 연기(演技) - <파이어 펀치> 


  <파이어 펀치>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지구에 긴 빙하기가 찾아오고 사람들은 야만적으로 되며 와중에 축복자로 불리는 초능력자들이 나오고 속속 종교와 문명이 등장하는데 주인공 아그니를 중심으로 작품 속 사람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삶과 인간에 대해 고찰하게 해 주는 내용이다. 아그니는 그 대상이 죽을 때까지 타오르는 불을 달고 있는 재생 능력자(축복자)다. 자연적으로 죽을 때까지는 끊임없이 신체가 재생되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온몸을 태우는 불꽃을 달고 살아야 한다. 아그니에게 이 불을 붙인 것은 웬 문명 집단인 베헴도르그의 장군인 도마였는데, 그는 아그니와 그의 여동생 루나가 본인들의 팔을 잘라 사람들에게 인육을 먹였다는 이유로,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인육을 받아서 생을 유지했다는 이유로 마을에 꺼지지 않는 불을 내 아그니를 제외한 모두는 죽는다. 도마의 입장에서 인육을 먹는 존재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그니는 꺼지지 않는 불을 달고 몇 년간 이를 갈며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 길을 떠나지만...... 1권인가 2권인가에서 도마는 만나자마자 아그니에게 죽을 죄를 지었다며 냅다 진심으로 사죄해 버린다...... 작품의 중반도 후반도 아닌 극초반부에 말이다. 누군가는 결말로 쓸 세팅을 이 사람은 시작으로 썼다.






  그리고 아그니와 여러 사람들의 지난한 시간들 속에서 많은 질문들이 등장한다. 아그니의 여동생 루나와 너무 닮은 베헴도르그의 또 다른 장군, 유다와 아그니의 이야기. 아그니를 신으로 추앙하게 된 선. 그 중에서도 <파이어 펀치>에서 주인공 못지 않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캐릭터는 300년 이상 살아와서 아그니를 주인공으로 영화를 찍으려 하는 영화광 토가타이다. 


  존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영화가 뭔지도 모르게 된 시대, 몇백 년을 살아남아 멸종된 영화를 추종하는 토카타의 설정은 억지스러울 수 있으나 사람은 결국 누구에게 비춰지는 모습, 타인이 그를 판단하는 모습으로 정의된다는 초반 노인의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토가타는 <탑 건>을 보면 톰 크루즈가 너무 멋있고 또 실제로도 멋있는 사람일 것 같고 사실은 그렇지 않은 걸 알면서도 톰 크루즈가 나온 영화들을 보면 왠지 그냥 그 사람은 멋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그렇게 믿게 된다고 말했다. 


  주인공 아그니가 겪는 가장 큰 혼란 역시 이 지점에 있다. 누구는 그에게 '살아요'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누구는 그가 죽지 않는 신이라고 추앙하며, 다른 누구는 파이어 펀치가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 가운데에서 파이어 펀치, 아그니는 내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괴로워한다. 결말의 영원한 잠에 이르기까지 그는 이 고뇌와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많은 사람들이 내 인생은 내가 선택하는 대로라고, 내가 생각하는 내 모습이 진짜 나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의 기준이나 기대, 평가에 맞춰서 행동하는 것은 연기일 뿐이라고. 그리고 후지모토 타츠키는 너무도 당연하게 그건 연기가 맞다고 말하며 그 연기를 긍정한다. 타인과 관계되며 살아가는 생 자체가 연극이라고.










무엇으로 기억하고 기억될 것인가 - <안녕, 에리>



  <파이어 펀치>에서의 이런 연극적 인생론에 집중한 단편이 <안녕, 에리>이다. 유타는 병환으로 죽음을 앞둔 어머니의 모습을 촬영한 영화를 문화제에서 상영했다가 학생들에게 온갖 조롱과 멸시를 받지만, 오직 에리만은 그 영화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며 유타를 진짜 감독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장담한다. 모두를 펑펑 울리는 그런 영화를 찍으라고. 


 그렇게 유타는 어머니의 모습을 담은 영화를 한 편, 그리고 에리의 트레이닝 아래에서 에리의 모습을 담은 영화를 한 편 해서 총 두 편의 영화를 찍는다. 현실의 카메라 밖 어머니는 유타에게 다정하지 않았고, 자신이 찍힌 영상으로 명성을 얻을 의도로 아들인 유타를 이용했다. 에리는 영화에 찍힌 것처럼 아름답고 매력적인 소녀가 아니었다(고 한다). 평소에는 시력이 좋지 않아 늘 안경을 착용했으며, 치아교정 장치를 하고 있었고, 성격 역시 제멋대로라 친구 또한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와 에리는 유타의 영화 속에서 보는 사람을 눈물짓게 할 만큼 순전히 다정하고 아름답다. 유타의 아버지는 유타의 작품을 보고 유타의 이런 솜씨를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지 선택하는 능력'이라고 칭한다. 결국 내가 어떤 소녀를 반복해서 떠올린다고 할 때, 그 이미지는 실제의 그 소녀보다도 나의 관점이나 취향에 더욱 근접해 있는 상이다. 


 영화를 찍는다고 한 유타와 에리에게 유타의 아버지는 이런 말도 한다. 관객의 깊은 곳을 건드리는 만큼 창작자 자신도 상처받으며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남들이 추하다고 손가락질하는 대상을 아름답다고 주장할수록 관객에게 외면당할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실제의 대상이 내 주장과 차이가 있더라도, 창작자라면 적어도 그 영화에서만은 아릅답다고 주장할 만한 고집과 솜씨가 필요하다. 후지모토 타츠키는 모든 존재가 이분법적으로 나뉘어질 수 없는 양면성을 가졌다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결국 중요한 것은 나와 타인의 관계에 있어 어떤 면을 보고 보일지 선택하고 믿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네필로서의 인간 - <체인소 맨>


  최고 인기작인 <체인소 맨>은 아직 2부 연재중이고, 그 2부마저도 아직 청사진으로만 남아 있기에 1부의 내용만을 살펴볼 수 있을 것 같다. 주인공 덴지에게 살해당하고 먹히는 1부의 진짜 주인공 마키마 역시 영화광으로 등장한다. 덴지와의 데이트에서 '지금부터 종일 근처 영화관을 돌 거야.'라는 식의 선언부터, '재미없는 영화는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해.'라는 발언만 봐도 그렇다. 후자의 발언은 말 그대로 재미있기도 하고 꽤 공감도 되어 캡처도 소장하고 있는데, 글을 쓰다 보니 저 두 발언은 꽤 상충한다는 생각이 든다. 무작정 종일 영화관을 돈다면 재미없는 영화를 무조건 볼 수밖에 없으니까. 



영화관 장면. 열 편을 보면 아홉 편은 재미없다. 그러나 안 보지 않았으면 다른 한 편도 만나지 못했겠지.


  마키마와 덴지처럼 하루를 모두 영화관 투어에 쓸 정도면, 누군가는 이 사람들 정말 영화를 좋아하고, 그렇게 보내는 하루가 영화롭게 충만하리라 쉬이 예상할 수 있다. 물론 하루를 모두 영화에 쏟아붓는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은 그날 본 모든 영화가 너무 마음에 들고, 그래서 행복할 수도 있겠지만 하루에 세 편 이상을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세 편 중에 한 편이라도 취향을 저격했다면 그날의 운은 대통인 거라고. 작중 등장하는 덴지와 코베니의 대화도 떠오른다. 평범하고 즐겁게 살고 싶다는 덴지의 말에, 코베니는 즐겁고 행복하기만 한 인생은 꿈속에나 있다고 대답한다. 


  여기서 후지모토 타츠키는 인생과 영화에 대한 새로운 대유를 제안한다. 인생은 한 편의 영화이기도 하지만 더욱 현실적인 관점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영화를 만나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한 편의 영화 같은 인생이 클라이막스나 한 줄 감상평을 향해 달려가는 과정처럼 존재한다면, 끊임없이 영화관의 문을 열어젖히는 삶은 그 감상평을 축적하는 결과의 연속에 가깝고 이렇게 축적된 감상평이란 절반 이상이 부정적일 것이다. 여기서 인생에서 비유되는 영화는 사람일 수도 있고 어떤 사건일 수도 있다. 포치타의 죽음 이후 데빌 헌터가 된 덴지는 오롯이 한 편의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과 사건들을 마주친다. 그리고 덴지에게 어떤 영향으로 남은 사람들은 빠르게 끝나고, 사라진다. 마키마, 파워, 히메노, 레제, 아키...... 덴지에게 특수한 영향을 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죽어나가는 구조를 띄는 것은 어쩌면 <체인소 맨> 자체가 애초에 의도한 인간상이 시네필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물론 여기서 시네필이란, 모든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와 관련된 행위를 하는 모든 순간이 즐거운 사람이라기보다, 이미 본 아홉 편의 영화가 모두 재미없다고 해도 영화관을 찾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 사람이다. 새로운 만남이 고통스럽게 종결되었다 해도 다시 관계되기를 선택하는 그런 사람.


 




  왜 하필 영화인가? 영화는 현대에서 가장 다양한 감각으로 생생하게 어떤 환상을 재현하는 매체이다. 영화를 보는 현대인들은 다른 모든 정보가 차단된 장소에서 극대화된 시각과 청각을 통해 대상을 체험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관객이 오롯이 창작자의 시선과 관점으로 제공되고 편집된 환상에 과잉 몰두하게 된다는 것이다. 모든 관객은 영화 내화면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인지하고, 등장하는 인물들은 현실의 인물이 아닌 연기자라는 것을 아는데도 영화를 보는 러닝타임 동안 이루어지는 몰입은 어쩌면 실제 내가 살아가는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보다 훨씬 깊다. 사람이 달리거나 담배를 피우는 등의 일상적인 풍경에 분위기 있는 음악과 촬영이 더해져 없던 정서가 충만하게 느껴지고, 보고 있자면 그게 정말 생(生) 같다. 살면서 사람의 표정을 그렇게 주의깊게 들여다볼 일은 별로 없는데도, 영화관 안에서 관객들은 그 어느 때보다 클로즈업으로 관찰되는 배우의 표정에 몰두하며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에 순수하게 감탄하기도 한다. 게다가 이 모든 과정이 은밀하고 미묘하게 이루어지고 대부분의 영화는 인터미션을 허락하지 않는 탓에 관객들은 이 편향된 세계에서 도피할 여유도, 틈도 없다. 영화관 좌석을 박차고 뛰쳐나가지 않는 이상 관객은 펼쳐지는 장면들을 끝까지 묵묵히 견뎌야 한다.


  그러니까 영화는 증거 없는 이야기를 믿게 하기에 가장 강력하고 강렬한 수단이다. A를 Z라고 우기기에 이보다 좋은 매체는 아직 없는 듯하다. 그리고 동시에 영화는 그 증거 없음을 믿어 보기에 가장 적합한 수단이다. 마치 어떤 진리를 진실되게 조명하는 듯 내뿜어지는 빛 앞에서 보는 이들은 무엇을 읽고 믿을 것인가, 그 재구성은 오로지 관객의 몫이다. 영화와 인생의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이 지점에 존재할 것이다. 세계의 진리라고 일컫어지는 것을 받아들이거나 부정하고 편집하며 나만의 것으로 구체화하는 작업의 연속 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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