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미비아의 사막 (ナミビアの砂漠, 2024)
이 영화를 소개하는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램 노트 속 문장이 기억난다. 어딘가 억눌린 분노를 쌓아둔 듯 갑자기 히스테리를 부리기도 하는 그녀는 다수의 호감을 살 만한 사람이 아니다. 히스테리와 비호감이라는 키워드, 그리고 포스터 속 동태눈을 한 20대 여성의 얼굴. 영화를 보고 나서 느낀 점은, 이런 문장과 이미지들은 여전히 영화 속 주인공 카나를 설명하기에 너무나도 부족하고, 부족한데도 이 영화를 타인에게 소개하고 설명하려면 이런 단어와 사진을 동원하는 정도가 최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나미비아의 사막>이라는 영화가 카나라는 인물을 다루는 방식이다. 이 영화는 드물 정도로 훌륭하게 인물을 대하는 태도와 그를 다루는 작법이 일치하는 경우에 속한다. 누구에게나 비호감일 법한 인물을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으려는 태도와 러닝타임 내내 그의 비호감적 면모를 변호하지 않으며 관객이 호감을 살 만한 일말의 변명조차도 삽입하지 않은 곧은 태도가 단단히 맞물려 보는 이로 하여금 카나의 에너지를 오롯이 체감토록 하는 것이다. 폭력이 동반된 히스테리와 신의를 져버린 관계, 배설, 중독과 같은 불쾌한 키워드가 동반된 카나의 일상을 높은 밀도로 따라가다 보면 누구라도 크고 작은 스트레스를 느낄 것이다. 러닝타임 내내 유지되는, 가로폭이 좁아 정사각형에 가깝다 싶을 정도인 화면비 또한 카나의 압박을 연상시키며 긴장을 더한다.
<나미비아의 사막>은 다양한 시점의 샷이 돋보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카메라는 카나의 멍한 얼굴에 줌을 당기기도 하고, 카나와 그의 연인이 담배를 피우는 장면을 CCTV의 구도처럼 잡기도 하며, 카나보다 키가 큰 연인을 뒤에서 바라보는 듯 조금 낮은 시선에서 조깅하는 연인의 등을 비추기도 한다. 도심의 군중 속을 거니는 카나와 속옷만 겨우 입은 채로 드러누워 유튜브 영상을 보는 카나까지 고루 담는 연출은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예산 문제 때문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카나라는 대상과의 거리감을 일정하지 않게 유지하는 감각을 탄생시켰다. 관객들은 카나의 바닥이라고 할 만한 장면들을 모두 목격하지만 러닝타임 내내 그녀를 종잡을 수 없다. 충분히 가까워져 다 알겠다고 파악한 순간 그녀는 미끄러지듯 멀어지고, 이해할 수 없는 미친년이라고 정의하려는 때쯤 연민이 일게 한다.
카나를 둘러싼 세계는 온통 카나를 교정하려 든다. 다들 '자유롭게' 성형하는 시대에 카나는 '왠지 자연미인일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이다. 물론 교정의 대상은 카나 한 사람이 아니다. 카나가 일하는 에스테틱에 방문하는 여성들은 머리카락이나 눈썹을 제외한 모든 털을 제거해야 한다는 계명에 따른다. 유학까지 한 부잣집 도련님은 멋들어진 양복을 입는 직업을 가지도록 분부받는다. 계획과 합의 없이 결혼 전에 태동한 아이는 지워지는 게 타당한 존재로 정의된다. 종합되는 교정의 목적은 사람들을 더 선명하고 매끄럽게 만드는 것이다. 단일민족의 일본인, 아름다운 여성, 화목한 정상 가족에서 태어난 아기만을 허가한다. <나미비아의 사막>은 이와 같은 교정을 배경에 두고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키즈 제모가 유행하는 에스테틱과 남자친구의 부모님을 만나러 갈 때 피어싱을 빼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카나의 사과는 있어도, 카나에게 제모를 강요하는 남자친구나 코 피어싱은 역겹다고 비난하는 친구는 없다. 이런 연출은 관객의 에너지가 '현실의 문제'로 새어나가는 것을 효과적으로 방지할 뿐만 아니라, 역으로 더욱 현실적으로 만든다. 현실의 교정은 분위기며, 공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 내에서 읽어낼 수 있는 교정의 분위기가 카나의 행실을 전부 설명할 수는 없다. 종종 혼자서만 들리는 소음에 압도되어 넋을 놓고, 거리를 배회하고, 악을 쓰며 무용하며 이해되지 않는 요구를 한다고 해서, 그러니까 카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이유로 그를 추궁하고 변명을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카나의 습관과 성격에 영향을 준 모든 요소들은 하나하나 열거하는 게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 영향들이 카나를 정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히스테리나 패악질, 조울증이나 경계선 성격장애 같은 단어들이 카나의 일부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그 자체는 아닌 것처럼. <나미비아의 사막>은 카나가 낯설고 불편한 사람이라는 이유로 그 존재의 타당성을 증명하려 시도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말부에 카나에게, 관객에게 처방되는 문장은 다음과 같다.
결말에서 카나와 남자친구는 카나의 전 남자친구가 만들어 둔 함박스테이크를 맛있게 먹는다. 적어도 지금의 남자친구는 이 함박스테이크를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고, 그래서 아무 거리낌 없이 편안하게 식사할 수 있다. 도중에 중국에 있는 카나의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걸려오고, 카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연신 '팅부동'만을 되풀이한다. 남자친구가 팅부동이 무슨 뜻이냐고 묻자, 카나는 '모른다'는 뜻이라고 답한다. 누가 만들었을지 모를 함박스테이크를 먹으며 그 단어는 여운과 함께 반복해 울린다. 팅부동, 팅부동......
누군가는 지금이 혐오의 시대라고 한다. 그 누군가는 카나 삶의 단면만을 고작 2 시간이 좀 넘는 시간 동안 지켜보고 이 삶을 혐오의 시대에 고통받는 20대 여성의 초상이라고 빗댈까 문득 궁금해진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나는 이런 발언이 참 순진하고 그래서 나쁘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왠지 지금이 혐오의 시대라며 들먹이는 사람은 꼭 마치 없던 혐오가 불식간에 튀어나와 생겼다고 주장하는 것 같기 때문이기도 하고, 감독인 야마나카 요코가 <나미비아의 사막>을 카나라는 개인에 관한 이야기로 봐 달라고 말한 맥락에서처럼 카나의 삶으로 특정 계층을 대표해 보려는 시도 자체가 프레임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미비아의 사막>이 조명하는 것은 구체적이되 결코 사사롭지 않은 한 인간의 삶인데, 이것은 다른 모든 개인의 삶이 그렇듯 한 카테고리에 오롯이 속하지 않고 오히려 언제나 여러 층위에 겹쳐 있다.
규격 외 인간을 틀 안으로 집어넣으며 더 작아지라고, 매끈하게 다듬어지라고 망치질하는 공기는 드러나지 않았을 뿐 늘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사람들은 모두 그 공기를 마시며 괴로워하거나 편안해하며 동시에 내뱉는다. 원래 다들 그래 왔고 거기에 토를 달면 성가신 사람이 되는 여러 이유둘로 상처받았고 상처주어 왔다. 이것만이 <나미비아의 사막>이 포착한 인류 삶의 유일한 공통점일 것이다. 모두 서로 모르거나 모르면서도 아는 척을 하며 등 돌리고 있다는 사실만이 진실한 세상에서, 카나는 '팅부동'이라 말하고 미소지으며 암묵의 시대에 작은 균열을 내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