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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의 Jun 06. 2024

서른 어른

당당한 진짜 서른이 되다

2024년의 내 생일을 맞이했다. 이제부터 나는 이제 진짜 서른이다. ‘진짜 서른’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는, 태어난 지 정확하게 30년이 지났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는 그와 동시에 31살이기도 하고, 내 친구들 사이에서는 32살이기도 하다.



나는 소위 말하는 ‘빠른’이다. 성인이 된 이후로는 누가 나이를 물어보면 몇 살이라고 말하기가 굉장히 애매해졌다. 특히 내가 걸쳐 있는 93-94년 생들 앞에서는 더욱 애매했다. 93년생의 나이에 맞춰서 말하기도, 94년생의 나이에 맞춰서 말하기도 뭔가 당사자들 앞에서는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이 대신 태어난 연도를 말하며 94년생이라고 하면 기존의 93년생 친구들이 자기들보다 나이를 한 살 어리게 얘기하는 것을 두고 은근히 핀잔을 주곤 했다. 차선책으로 내가 빠른 94년생임을 정확하게 말하면 94년생들로부터 굳이 언니 또는 누나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것마냥 취급 받기도 했다.



딱히 나이나 서열 같은 걸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평소에 친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서로 말을 편하게 하고 허물없이 지내는 경우가 많기는 하다. 하지만 어쩌다 한 번씩은 ‘자기 유리할 대로 나이를 막 조종한다’는 오해를 받는 것도 거슬리고, 가끔 족보 브레이커의 존재를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을 만나면 그가 내비치는 언짢은 기색에 나도 덩달아 마음이 불편해질 때도 있었다..



2023년 6월 28일부터 만 나이 통일법이 시행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만 나이를 쓰는것이 법제화되면 고작 한두 살 차이로 아웅다웅 하는 경직된 나이 문화를 전복시킬 수 있는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들 ‘제 나이’를 찾아 가게 되면 한두 살 정도는 차이가 나도 서로 적당히 또래로 생각하고 지내게 될 테니, 이제는 내가 겪어온 고충을 좀 덜 겪게 될 듯 싶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던 것 같다.


2023년 추석이었다. 모처럼 친척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막내 고모가 문득 나에게 질문을 하셨다.

“그러고보니 네가…, 올해 몇 살이었지?”

“지금 스물 아홉살이요.”

오랜만에 만났기 때문에 친척들 간에 서로의 나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대답했다. 그런데 옆에서 듣고 있던 00년생 사촌 동생이 끼어들었다.

“엥? 누나 서른이잖아. 어떻게든 20대에 끼고 싶어서 그런 거지?” 하며, 제법 발칙하게 딴지를 걸었다.

“나 2023년 6월부터 29살 된거 맞는데? ‘윤석열 나이’로 바뀌었잖아.”

”학교에서도 그렇고, 내 주위는 다 원래 나이대로 쓰는데? 누나만 쓰는 듯.”

”내 주위는 6월 이후로 다 만 나이를 쓰기도 하고, 그게 법적으로도 맞잖아. 그리고 서른이 뭐 어때서? 심지어 난 빨리 더 나이를 먹고 싶고 40대, 50대가 된 나의 삶을 기대하고 있다구.”


사실 그 사촌 동생은 평소에 나와 굉장히 친하고 편한 사이이기 때문에, 정말 공격을 하려는 의도로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도 나름대로 사촌동생에게 할 말을 다 했고 잘 받아쳤던 것 같긴 하지만, 그럼에도 좀 킹받았다. (화가 난 것도 짜증스러운 것도 아닌 킹받는다 이상의 적확한 표현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더 좋은 어휘가 있다면 알려주시길)



하지만 곰곰이 되짚어 보니, 한국 나이로는 서른이 넘었지만 굳이 만 나이로 29살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남들에게 내가 20대라고 우기는 것처럼 보여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내가 사촌동생에게 했던 항변은 전부 다 사실이며 내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가치관 그대로를 이야기한 것이지만, 누군가는 그 모든 말들을 꾸며진 변명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거였다. 

이럴 거면 그냥 아무 오해 없게, 나도 굳이 긴 말 붙여서 해명할 필요 없이 빨리 서른이 되는 게 차라리 편할 것 같았다. 

이런 연유로, 지난 추석부터 나는 억울한 스물 아홉에서 벗어나 당당한 ‘진짜 서른’이 되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당당한 서른이 되고 난 직후 시점인 지금,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역시나 많은 것들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확실하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설문 조사를 할 때 20대와 30대 사이에서 어디에 체크를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 정도? 그리고 지금처럼 서른에 관한 글을 쓸 확실한 명분과 자격이 생겼다는 것 정도는 있을 것 같다. 그 외에는… 29와 30 사이엔 아직까진 다른 점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물론 보편적으로 인간은 서른을 기점으로 어른이 되고 성숙해진다는 인식이 있다. 개인적/사회적으로도 더 책임져야 할 것도 생기고, 삶의 무게를 더 많이 짊어지게 된다. ‘아직 어리니까’ 하며 용인되던 것들도 이제는 용인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스물 아홉 살에서 서른이 되면, 어른이 되는 것일까? 그럼 이제 나는 어른일까? 사실 아직 나를 어른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아직까지는 뭔가 부족한 것 같기도 하다. 요즘도 난 친구들과 모이면 똥방구 얘기를 하며 낄낄대고, 유치한 장난도 친다. 반면 회사에서 일도 하고 은행에서 대출도 받는 나를 보면 제법 어른 같기도 하다. 그래도 어렸을 때는 내가 향유하는 문화가 곧 트렌드였는데, 이제는 ‘요즘 애들은 저런 걸 한다고?’ 하며 놀라기도 하는 걸 보면 확실히 나이를 먹긴 했나 보다. 



나이 드는 것이 싫거나 두렵지는 않다. 하지만 후진 어른이 될까 봐 두렵다. 자기 고집만 늘어서 항상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얄팍하게 보고 쉽게 평가하고, 세속적 가치에 찌들어 이기적으로 변할까 두렵다. 그래서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의미 없이 시간만 흘러 나이만 많아진 사람이 아니라, 그 시간 동안 밀도 있게 성장한 어른이 되고 싶다. 30대 초입인 지금은 아직 뭐가 달라졌는지 잘 모르겠고 내가 어른인지 뭔지도 잘 구분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후진 어른이 되지 않기 위해 자주 성찰하고, 밀도 있게 성장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한다면 내가 좋은 방향으로 정말 많이 변화했음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한 인간으로서 내면과 자아의 성장을 이루어 나가려고 한다. 그 과정을 부단히 반복한 나의 30대, 40대, …그리고 정말 할머니가 됐을 때의 삶이 기대가 되고 궁금하다. 



나는 어떤 어른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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