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멍청한 신규
아무것도 모르는 신규 간호사의 머리에서 나온 중환자실로 가고 싶었던 이유는 실로 단순했다.
환자 대부분이 의식이 없거나 마취가 되어있기 때문에, 환자와 말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라는 것이 주 이유였다. 그리고 하루에 제한된 시간 동안만 보호자의 면회가 가능하기 때문에, 보호자와 말을 할 필요도 별로 없을 것 같았다.
참으로 비전문가적인 이유였지만, 나의 논리는 어느 정도는 틀리지 않았다. 중환자실의 환자들은 병동의 60명의 환자들과 달리 콜벨을 누를 수 없었고, 나는 최소한 그러한 소음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환자가 의식이 없다는 것, 보호자가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은 다른 문제를 만들었다.
중환자실의 폐쇄성이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간호사들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쩌다 보니, 호주 간호사
대부분의 큰 종합병원이 그렇듯, 내가 일하던 병원에도 여러 중환자실이 있었다.
내과 중환자실, 외과 중환자실, 신경외과 중환자실 등등, 과별로 분류가 되어있었는데, 내가 발령받은 곳은 "응급 중환자실"이었다. 내가 병동에서 응급 중환자실로 부서 이동이 결정되었을 때, 병동의 수간호사 선생님은 내게 "미안하다"라고 말하셨다. 나는 매우 불길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병동에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기 때문에 부서 이동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는 응급 중환자실로 옮긴 지 단 며칠 만에, 그 "미안하다"의 의미를 이해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할 수 있는 응급 중환자실은 1) 다른 중환자실로 가기엔 너무 불안정 한 환자, 2) 여러 과가 협업해야 하는 외상 환자, 3) 어느 특정 과에 입원하기에 애매한 환자들을 위한 곳이었는데, 다른 중환자실보다 규모가 컸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바쁘기로 악명이 높았던 것이다.
응급 중환자실에는 너무나 다양한 환자들이 입원했고, 알아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예를 들어, 하루에 세 명의 환자를 배정받는데 한 명은 교통사고 환자, 다른 한 명은 폐렴 환자, 나머지 한 명은 암 환자, 이런 식이었다. 전혀 다른 질병을 가진, 전혀 다른 환자 세명을 보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공부를 해가며 하루를 간신히 버티면, 다음날에 다시 처음 접하는 질병을 가진 환자를 보는 것이 부지기수였다.
또한 여러 부서에 속한 환자들을 보다 보니, 여러 부서의 의사들과의 의사소통이 필요했다.
예전에 내과 병동에서 일할 때는 내과 의사들과만 주로 이야기를 하면 되었었는데, 이곳에서는 다른 여러 부서의 의사들과도 의사소통을 해야 했다. 그들은 우르르 몰려와서 내 환자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오더를 내리고 사라졌는데, 난 대체 그들이 누구인지도, 어느 부서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나는 낯선 그들과 이야기할 때 쭈뼛쭈뼛 머뭇거리기 일쑤였고, 그들은 이 어리바리해 보이는 신규를 못 미더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병원에서 가장 바쁘기로 악명 높은 중환자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모두 여유가 없었다.
나는 하루하루를 외줄을 타듯 견뎌내고 있었지만 이곳은 그 외줄 위의 흔들림 조차 용납되는 곳이 아니었다. 질문을 하면 "내가 선생님도 아닌데 왜 나한테 질문을 하느냐?"며 혼이 났고, 질문을 하지 않으면 "왜 질문을 안 하느냐?"며 혼이 났다. 뛰지 않으면 "행동이 굼뜨다."라고 비난했고, 뛰어다니면 "정신 사납게 뛰어다닌다."라고 화를 냈다. 미리 환자파악을 하면 나을까 싶어서 새벽 5시에 출근했지만, 결국엔 일이 밀려서 밤 10시까지 퇴근을 하지 못해도 어느 누구도 나의 일을 도와주지 않았다.
굳게 닫힌 중환자실의 문 뒤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새로운 부서에 들어간 지 단 몇 주 만에, 나는 "일을 못하는 멍청한 신규"가 되어있었다.
한평생 무엇이든 잘한다는 말만 들어오며 자란 나의 자신감이, 자부심이, 사회에 첫발을 내딛자 산산이 무너졌다.
나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을 읽으며 한참을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