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내향인의 사회생활
아마 많은 사람들이 내가 결국 그런 사회생활을 견디다 못해 호주로 떠났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호주로 떠난 많은 한국의 간호사들이 그러한 전철을 밟았고, 지금도 비슷한 이유들로 한국을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곳에서 3년을 버텼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3년은 내 삶의 많은 것을 바꿨다.
그것도 좋은 쪽으로.
가끔씩 내가 왜 호주에 와 있는지 스스로도 의아할 때가 있을 만큼, 나는 그 닫힌 문 너머의 지옥 속에서도 잘 살아남았었다.
어쩌다 보니, 호주 간호사
과학도로서 가장 필요한 능력은 무엇일까?
나는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그 자리에 진득하게 앉아서 버틸 수 있는 끈질김, 인내심, 혹은 "독함"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공식을 순식간에 외울 수 있는 암기력이나 답을 빠르게 찾아내는 응용력보다 더 중요한 능력이었고, 다행스럽게도 나는 버티는 것에는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나는 버텨야만 했다.
어차피 간호사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나는 중환자실에 남고 싶었으니 여기서 버티는 것 외에는 내가 가진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더군다나 내가 여기서 그만둔다면 나는 영원히 "일을 못하는 멍청한 신규"로 남을 것이고, 그들은 멍청한 내가 그만둬서 잘됐다고 생각할 터였다.
그만 둘 수 있는 용기가 없었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그러한 승리를 넘겨주고 싶지 않다.'라는 조금의 불순한 마음도 있었다.
나를 비난하던 사람들과도 어떻게든 친하게 지내서 이곳에서 살아남기로 마음먹은 뒤, 나는 그들에게 웃으면서 인사했다. 출근할 때는 커피와 간식을 사가고, 심부름을 도맡아서 하면서 회식에는 빠지지 않았다.
그들은 종종 자신들끼리 술을 마시다가도 새벽 3시에 나에게 전화를 하곤 했는데, 그럼 나는 택시를 타고서라도 나갔다.
누군가는 그것이 알량한 사회생활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데 그 알량한 사회생활이 필수 일 수 밖에 없다고 믿었다. 아마 우리 부모님들도 이런 사회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나는 내향인이지만, 사회가, 아니 내가 살아남아야 할 그곳이 외향인을 선호한다면 외향인이 되어야 했다.
지금 나의 주변 사람들은 내가 내향인이라는 것에 깜짝 놀라곤 하는데, 나는 그런 스스로를 "자본주의 외향인"이라고 소개했다.
그와 동시에, 그저 버티는 시간이 늘어나자 중환자실에서 일하는 것은 점점 익숙해졌다.
중환자실에서 일하는 것은 의외로 과학 문제를 푸는 것과 비슷했다. 문제가 있으면 검사를 하고, 검사 결과에 따라서 고친 뒤 재 검사를 한다. 어떤 질병이든 결국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는 것을 경험으로부터 배운 뒤에는, 나는 새로운 환자를 접해도 겁먹지 않았다.
어느덧 나는 일도 잘하고, 사회생활도 잘하는 그런 3년 차 간호사가 되어있었다.
주변에서는 그런 나를 "독하다"라고 평가했지만, 결국 3년은 버티게 만든 나의 가장 큰 능력은 그 독함이었으니 매우 정확한 평가였다.
그 3년의 시간은 나의 자신감을 산산이 무너뜨렸지만, 다시 토대부터 단단히 쌓아 올리게 했다.
그것은 그들이 나를 인정함으로써 생기는 자신감이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 만족함으로써 나오는 자신감이었다.
나는 내 능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나는 어디서든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신감.
그 후에 닥쳐온 어떠한 위기도 그때 세운 나의 자신감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호주에 와서 힘이 드는 순간마다, 나는 그 3년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난 거기서도 버텼는데" 이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니라고.
안녕하세요, 곽여울입니다.
"어쩌다보니" 호주 중환자실 간호사가 되어 살고있는 이야기를 적는 와중에,
또 "어쩌다보니" 호주 간호대에서 강의를 시작하게 되면서 격조하였습니다.
아이러니한 인생이 아닐수없네요...
하지만, 바쁜 삶 속에서도 글쓰기를 놓지않으시는 다른 작가님들을 보면서 저도 2024년에는 더욱 노력해보고자 다시 글을 적어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