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적 자유의 장기말들
일단 「진격의 거인」은 엄청 재밌습니다. 매력적인 세계관 속 복합적인 주제의식과 장르적인 재미가 만나 대중성과 작품성을 모두 챙겼다는 평가를 받는데요. '거인'이란 존재에 얽힌 거대한 미스테리를 만들어낸 작가의 치밀한 구성력은 완결 이후에도 많은 이야깃거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자유, 선택, 폭력, 운명' 등의 키워드를 담고 있는 작품은 오늘날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와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전쟁들에 힘입어 더욱 그 위상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필자 역시 이 작품이 제기하는 질문들—자유란 무엇인가, 인간은 왜 싸우는가, 역사는 반복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며 스스로의 결론을 내려보고자 했던 사색의 즐거움이 기억에 남는데요.
그러나 그 모든 질문과 작품의 무게를 감안했을 때, 이 이야기가 끝내 내놓은 해답은 다소 작고 협소하지 않았나,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마지막에 느낀 허무함도 그에 비례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죠.
인간과 폭력은 뗄 수 없는 존재죠.
싸워. 싸우지 않으면 죽는다.
- 에렌
*본 글은 「진격의 거인」 애니메이션과 극장판 「진격의 거인 : 라스트 어택」을 토대로 작성된 게시글입니다. 스포일러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시놉시스
월 마리아, 월 로제, 월 시나. 인류는 세 겹의 벽 안에서 살아가는 새장 속 새가 되었다. 벽 밖에 대한 유일한 정보는 인간을 이유 없이 잡아먹는 거인들이 있다는 것뿐.
그러나 여느 문명처럼 벽 속 인류는 군사 · 경제 · 정치 등 국가적 요소들을 발달시켜 생존해 왔고, 100년간 이어져 온 평화에 사람들은 어느새 자신들이 벽 안에 갇혀있다는 것조차 망각하게 된다.
주인공은 시간시나 구에 사는, 언제나 벽 밖의 자유를 꿈꾸는 소년이자 '조사병단'에 들어가고 싶어 하던 에렌 예거. 언젠가는 자신을 가둔 벽을 무너뜨리고 자유를 만끽하길 바랐지만 에렌의 소망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만다.
100년 만에 나타난 초대형 거인이 벽을 부수고 거인들이 쳐들어오면서, 에렌의 운명의 시계는 돌아가기 시작한다. 스톱워치는 아니고 타이머로.
이야기의 초반부는 갑작스레 조우하게 된 식인 거인들로부터 도망치고 싸움을 벌이는 등 철저히 생존 호러의 장르로 시작하지만, 점차 거인들의 진실이 밝혀지며 후반부의 주된 화두는 인류 전체의 윤리와 선택의 문제로 확장됩니다.
절망적인 전투 속 동료애, 인간의 처절한 생존 본능과 입체기동 액션의 낭만으로 점철된 초중반부는 솔직히 그 어떤 애니메이션 작품보다 흥미진진하고 재밌었죠.
이어서 작품의 철학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후반부는 인간은 본질보다 존재가 앞선다며, 부조리한 세계에서 스스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실존주의적 철학과도 맞닿아 있는데요.
실존주의적 삶이란, 어떤 절대적인 진리나 확신을 갖고 사는 게 아니다.
자신의 확신조차 끊임없이 의심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 있는 선택을 해나가는 태도.
→ 그건 끝없이 유동적인 신념, 불완전한 자유, 영원한 불확실성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
등장인물들에게 의문투성이지만 적대적인 거인의 존재는 그 자체로 부조리합니다. 이는 벽 바깥에 대한 탐구심, 거인에 대한 적개심, 진리를 갈구하는 마음 등 인물 각자의 불확실한 선택과 유동적인 신념의 씨앗이 되어주죠. 인류의 승리라는 공통된 목표가 있었지만 각자의 목적은 모두 달랐던 것처럼요.
이후 실존주의는 진격의 거인의 핵심 정서로 기능하게 됩니다. 이는 지크와 아르민의 대화에서도 엿볼 수 있는데요.
왜 살아야 하지? 살아야 하는 목적 따위는 없어. 태어난 목적이라면 더더욱.
우리가 받는 고통은 '삶'에 묶여있는 거야. 살지 않으면, 고통도 없어.
지크
어릴 적 에렌과 미카사와 함께 언덕을 뛰놀았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문득 생각했어.
이러려고 살았던 게 아닐까.
아르민
이는 굉장히 중요한 지점입니다. 실존주의는 자신의 인생에 걸친 절대적인 목적이자 진리 따위는 없음을, 즉 우리가 태어나야만 했던 이유란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 고통이 따르는데요. 지크는 이러한 전제를 받아들였지만, 오히려 "그럼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극단적인 허무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아르민은 그렇지 않죠. 또 전투에서 생존하여 동료들과 살아가려던 모든 등장인물들도.
아무것도 의미가 될 수 없다면,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의미가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아르민이 독자에게 전달한 가치는 에렌이 주구장창 말하는 자유, 자유의지와도 연결됩니다. 절대적인 진리 또는 이유로 돌아가지 않는 세상엔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으니까요.
이는 역설적으로 작품 속에서 이념, 인종을 두고 일어나는 증오의 연쇄가 끊이지 않는 근거로도 작용합니다. 선악이 없다면 결국 내 편, 네 편의 문제가 되고 편 가르기 싸움이 끊이지 않는 인류는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인다'는 뼈아픈 법칙을 따르잖아요.
나아가 주인공 에렌은 그저 태어났을 뿐인 자신들(에르디아인)에 대한 전 세계의 혐오 역시 그저 흘러왔으며 흘러갈 뿐 이유와 목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생각하길 그만두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비유일까요. 따라서 오로지 의미를 갖는 '지금의 나'의 선택, 자유의지가 에렌의 유일한 동기가 되어주죠.
에렌 예거는 이러한 부조리한 세계의 중심에 선 인물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자유를 위해 싸우는 존재죠. 그 자유는 단순한 이상이 아니라,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는 처절한 실존주의적 몸부림이기도 합니다. 증오의 연쇄에도 그렇듯 우리가 태어난 이유란 존재하지 않으니, '살아남는 것' 자체가 중요한 세상이니까요.
에렌은 '자유'라는 가치를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자신이 일으키는 선택의 주체가 되길 원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시조 유미르라는 존재의 감정에 이끌려 자신조차 어쩔 수 없는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데요.
그는 스스로를 "자유의 노예"라고 자조합니다. 진정한 자유는 목적이 아니라 선택 자체에 있기에 '자유'를 위해 강행했던 수많은 행동들은 그의 본심이 아니었으니까요.
결국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거대 재앙인 땅울림을 발동한 그는, 인류 학살이라는 모든 결과를 감내하며 자신의 운명을 껴안죠.
이러한 설정은 꽤나 매력적인 비극으로도 보입니다만, 서사적 완성도 면에서는 한계를 드러냅니다. 초반부에서 쌓아 올린 수많은 인물들의 고뇌와 선택, 의지와 희망은 마지막에 이르러 '시조 유미르'의 개인적인 감정이라는 하나의 원인으로 환원되는 듯해서요.
이에 대해 운명을 알고 있음에도 진격할 수밖에 없었던 거인, 에렌의 서사가 더 비극적이어서 좋았다는 호평도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 결말이 그간 인물들이 감당해 온 무게와 사건의 복잡성을 축소시킨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나아가 그 과정에서 수많은 죽음과 희생은 감정적으로 해소되지 않은 채 지나가고, 관객은 ‘왜’에 대한 충분한 서사적 설득 없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을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죠.
실존주의가 말하는 ‘의미를 창조하는 인간’은, 이 작품의 말미에 이르면 ‘구조에 이끌려간 인간’으로 전락한 듯한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앞부분에서 전파한 "싸워야 이긴다", "혐오가 끊이지 않는 숲에서 나가야 한다" 등의 가치는 [결국 운명과 싸웠지만 이기지 못한 에렌]과 그럼에도 [숲을 나가지 못한 인류의 반복되는 폭력의 역사]로 부정당하죠.
조금 다른 얘기를 하자면, 실존주의 철학은 재밌게도 전쟁 영화에서 흔하게 볼 수 있기도 한데요.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담으며 개인은 이해할 수 없는 국가 간의 전쟁 속 인물들의 입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전쟁영화 명작 「라이언 일병 구하기」도 좋은 예시가 될 수 있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전쟁이라는 철저히 비합리적인 현실 속에서,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여러 사람이 목숨을 잃는 역설적인 명령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구조대의 지휘관인 밀러는 이 비논리적인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부하들의 원성과 지휘관으로서 덮쳐오는 죄책감에도 자신의 죽음이 누군가의 삶으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그의 마지막 말, "Earn this(이 목숨들이 헛되지 않게 살아줘)"는 이런 바람이 담긴 실존주의적 요청이죠. 결국 한 생명의 유언이 되었지만 이는 전쟁의 허무함 속에서도 인간이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희망의 문장이자 명대사로 남게 됩니다.
작품이 감정적으로 깊은 울림을 주기 위해서는, 그 철학적 구성이 서사의 흐름 속에서 납득 가능해야 합니다. 「진격의 거인」의 결말은 그에 비해 다소 건조하고 결과론적, 운명론적이라고 느꼈는데요. 의미를 부여할 여지를 남기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그 의미를 박탈해 버린 셈이기도 합니다.
결국 「진격의 거인」은 실존주의적 세계관을 구축하고자 했지만, 결말에 있어 그 철학의 온기를 유지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인간은 선택할 수 있는 존재이고, 그 선택의 무게를 스스로 감내해야 한다는 실존주의의 핵심 명제는 에렌의 최종 선택이 '자기 의지'가 아닌 시조 유미르의 성불쇼를 위한 '역할 수행'으로 묘사되면서 흐려지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시조 유미르가 개인적인 의의를 위해 후손들을 이용했다는 점은 변하지 않기도 하죠.
더욱 아쉬운 점은 작품이 초중반부 서사를 통해 분명하게 질문을 던진다는 점입니다. “당신은 이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진격의 거인」은 그 질문을 끝까지 밀고 가지 못했다는 점에서, 비극보다 더한 허무를 남깁니다.
분명 「진격의 거인」이 만들어낸 세계는 압도적입니다. 인간과 거인의 이분법에서 시작해, 결국은 '우리'와 '그들'의 경계마저 무너뜨리는 이야기 구조는 이 작품을 단순히 선악의 전투가 아닌, 인류의 역사 자체에 대한 은유로 확장시킵니다.
작가는 반복되는 폭력의 고리, 작 중 표현으론 '증오의 연쇄'를 제시하며, 그것을 끝내기 위한 선택이 어떤 희생을 요구하는지를 보여주죠. 이런 측면에서 「진격의 거인」은 분명 야심차고 철학적인 작품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필자 또한 그런 부분에 깊이 매료되었으며 나 자신부터 인류 전체의 모습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니까요.
그렇기에 이 작품은 여전히 이야기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우리가 이 작품을 통해 실망하고, 질문을 던지며, 감정적으로 혼란을 겪는다는 사실 자체가 그 영향력의 증거이기도 하니까요.
「진격의 거인」은 완벽한 작품은 아닐 수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비판하는 방식 역시, 실존주의적으로 살아 있으려는 노력의 일환이지 않나, 작품이 주는 또 다른 선물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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