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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영 Jul 24. 2024

과거가 그렇게 중요하다니 일단 얘기해보겠습니다

‘주 1회, 45분, 15만원’ 등 정신분석적 치료의 세팅을 정한 후 우리는 내 과거 이야기를 하는 세션을 가졌다. 여기서 과거란 즉 내 성장과정을 말한다. 꽤 오래 외래 치료를 받으며 어느 정도의 배경은 공유한 상태였지만, 선생님은 더 깊은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하셨다.


성격이 형성되는 유년기에 나는 방임 및 정서적 학대를 받았다. 내가 기억하는 내 생애 첫 기억은 세탁기 위에서 울고 있는 나의 모습이다. 엄마와 아빠는 큰 소리로 싸우고 있었고, 아무도 나를 달래주지 않았다. 부모님은 곧 별거를 시작했고, 엄마는 일을 하러 서울로 떠났다. 나는 친가 사람들과 경주에 남겨졌다.


사실 초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올라오기 전의 기억은 거의 없다. 나는 내 의견을 내지 않고 항상 가만히 있었지만 눈에 보이는 차별이 이어졌다. 사소하게는 내가 먹고 싶은 것만 사주지 않던 할머니부터, 내 앞에서 대놓고 엄마 욕을 하던 친척들까지. 남자 사촌동생과의 차별은 일상적이었고, 언니와도 친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존재했을 뿐인데, 내 존재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나름 좋은 대학에 합격해 얼굴을 보러 갔을 때는 스무살짜리 학생에게 용돈을 달라고 말했으며, 어릴 때 입양 보내려 했다는 말을 하며 웃었다. 이런 말과 행동들은 아직까지 내 마음에 콕 박혀있다.


이러한 성장 배경을 가진 나는 조용하고 존재감 없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나 말고 타인 위주의 삶을 살았고, 내 감정이나 생각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자책은 일상이었고 우울증이 심해졌을 때는 자해도 했다. 항상 스스로를 미워했고, 현재도 미워한다. 주변에서 아무리 자신을 소중히 여기라고 말해도, 나는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어서 할 수 없다.


나는 과거 얘기를 마무리한 후 이렇게 말했다.


“상담 처음 시작할 때는 이런 얘기 하면 울고 그랬는데 이제는 좀 담담해진 것 같아서, 그러니까 거기에서 온 결핍같은 것들을 이제는 좀 중시하지 않게 되는 느낌이에요. 그냥 과거에 있었던 일이고 지금은 괜찮아요.“


선생님은 잠시 나를 쳐다보시더니 말씀하셨다.


“그런 과정이 있었군요. 이야기하신 걸 들어보면 그런 느낌이 조금 있는 것 같기는 해요. 지금은 괜찮아. 옛날에 있었던 일이고 지금은 담담해졌다, 이렇게 얘기하셨지만 약간 좀 neglect하는 느낌을 솔직히 받기는 했어요.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저는 좀 그렇게 느꼈는데 좀 어떠신가요?”


“근데 그런 일들이 있었다고 해서 지금 뭐가 바뀔 수는 없는 거잖아요. 이미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냥 좀 묻어두는 게 나에게 편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있는 것 같아요.“


“묻어두지 않으면 좀 괴로울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 같아요. 그냥 이제 쓸모없는 무언가가 되어버리는 거죠. 어릴 때의 그 경험 때문에 나는 지금도 혼자야, 이런 생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없어졌어요.“


나는 이제 괜찮아졌다고 언급하며 대화를 마무리하려 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말을 이어나가셨다.


“만약 방치라고 하면 방치를 한 사람이 잘못이지 방치를 당한 사람이 잘못한 건 아니잖아요.“


“어렸으니까요. 생각도 성숙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게 다였으니까. 물리적으로도 혼자였으니까 앞으로도 혼자이겠지.“


“성인이 되고 나서도 그런 생각들이 드신 거죠? 최근에도 그런 일들이 좀 있었나요?”


“충동이 들 때.. 근데 그럴 때 응급실에 가기는 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순간들이 오면 항상 혼자인 느낌이에요.“


‘혼자’라는 단어는 참 슬프다. 나는 치료자와의 관계에서도 혼자이기를 택했다.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았다. 잠시 더 이야기를 하다가 상담이 끝났다.


과거의 얘기를 꺼내는 건 여전히 힘들었고, 나는 진료실을 나오자마자 내 유년기의 기억들을 꽁꽁 묶어 다시 마음 속으로 숨겨버렸다.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없었던 시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힘들다니, 정말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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