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자영 Nov 27. 2024

버티는 것

요즘의 나는 일어서다가 넘어지기를 반복한다. 힘을 내서 앞으로 걸어가보려 하다가도 무서워서 가만히 자리에 머물러 있는다. 그러다보면 다시 고통이 찾아와 웅크린 채 버틴다. 나는 종종 삶을 ‘사는 것’이 아닌 ‘버티는 것’으로 묘사하는데, 그것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알고 있는 건, 내가 주체가 되지 않는 이상 삶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전처럼 ‘나는 혼자이니까 아무 도움도 필요 없어’는 아니다. 분명 친구들이, 치료자들이 도와주는 것이 있다. 그 도움을 받아들이되, 내가 해야 하는 것과 도움 받을 것을 구분하는 것이다. 아무리 주변에서 신경써 준다고 해도 내가 모든 걸 포기해버린다면 그건 의미가 없다. 그러니까 내가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은 ‘그럼에도 버티는 태도’와, ‘자살하지 않을 결심’이다.

치료자 앞에 앉아 “이유는 모르겠고 죽고 싶어요”라는 말만 내뱉던 날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3년동안 치료를 그만두지 않았다. 주 2-3회 씩이나 시간을 투자해 병원을 다니고 상담을 다니고, 약을 삼키는 일을 반복했다. 중간에 여러 번 위기가 있었지만, 결코 치료를 그만두지 않았다. 오늘 진료에서 “이제는 우리 치료의 장면에서 액팅 아웃을 하지 않잖아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내 치료의 단계가 바뀌었음을 확신했다. 그리고선 대답했다. 분명 나는 아직 우울하고 힘들지만, 그걸 온전히 마주하고 분석하고 이해해보겠다고.

확신은 없다. 나를 힘들게 하는 요인들을 이해하고 그걸 해결했을 때는 내가 살고 싶어질까? 이것에 대해서는 전혀 확신이 없다. 마이너스를 제거하는 것과 플러스를 만드는 것은 완전히 다른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내가 더 힘들어질 것 같기도 하다. 덮어두고 살았던 것들을 꺼내서 다시 바라보는 건 분명 고통을 수반하는 과정일 것이다. 내가 그걸 감당할 준비가 되었을 지는 미지수이다.

오늘 진료 시간에는 엄마에 대한 얘기를 주로 했다. 엄마와의 관계는 얽히고 설킨 관계이다. 나는 분명 엄마의 삶을, 엄마의 생각을 머리로는 이해한다. 엄마가 이혼을 하고 우리를 혼자 키워낸 것, 경제적으로 충분히 서포트를 해준 것 등에 대해서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걸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건 또다른 문제이다. 내가 원했던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나는 엄마가 내 마음을 살펴주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기 원한다. 감정적인 서포트를 원한다. 아니, 원했다. 이제는 그런 걸 받는 건 포기했으니까.

이틀 전 엄마와 대화를-싸움을- 나눴을 때 엄마가 이렇게 말했다. 대학도 잘 가고 취업도 잘 했는데, 그렇게 잘 키워 놨는데 그 후에 갑자기 이렇게 되었다고. 지금은 사춘기라고. 사춘기가 너무 오래 가는 거 아니냐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미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을 한번 더 닫았다. 자물쇠를 걸었다. 굳이 이곳에 구구절절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쓰지는 않겠다. 그저 나는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고, 우리는 각자의 입장만 말하느라 제대로 된 대화를 하지 못했다. 엄마의 통제와 억압 속에서 나는 어린아이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의사 선생님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쁜 생각인 건 아는데, 엄마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눈물이 흐를 뻔 했지만 참았다. 아, 나는 엄마가 싫다. 불편하다. 엄마가 있는 한, 나는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출근해서 일을 하는데, 엄마에게 카톡이 왔다. 어제 짐을 같이 옮겨줘서 고맙다고. 서울에 눈이 많이 왔는데 조심하라고. 그 카톡을 보고 엉엉 울어버렸다. 내가 너무 나쁜 딸인 것 같아서. 엄마는 나를 이렇게 생각하는데 나는 못된 생각만 하는 것 같아서.

나는 엄마가 불편하지만, 엄마에게 이해받고 싶다. 엄마 성격 상 그게 힘들 거라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그래도 나를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나는 분명 엄마로부터 독립하고 싶지만, 해야만 하지만, 그래도 이해받고 싶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방향을 잃었다. 갈등을 만들기 싫지만, 더이상 가만히 있고 싶지도 않다. 나도 내 의견이 있다고, 나도 내 입장이 있다고, 나도 내가 생각하는 삶이 있다고. 그걸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삶은 다시 ‘버티는 것’이 된다. 어릴 때부터 말뚝에 묶여서 자란 코끼리는, 그 말뚝을 뽑을 수 있을 만큼 자라서도 스스로 묶여 있길 택한다. 나는 나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우울의 늪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일 지도 모른다. 그럴 힘이 있어도, 굳이 힘을 내고 싶지 않다. 그저 늪에 빠져서 익사하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