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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자영 Nov 28. 2024

흐릿함이 색채가 될 때까지

이제는 조금 흐릿하다. 칼을 집어들어 허벅지를 긋던 순간이, 남은 약을 모조리 뜯어 한번에 삼키던 순간이,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한없이 아래를 쳐다보던 순간이. 별로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고 겨우 두 달 조금 넘게 지났지만, 벌써 기억에서 흐릿해졌다. 나는 그 순간들을 잊고 싶어하는 걸까. 나도 나 자신을 이해하지 못했던 나날들을. 나는 진정으로 한 걸음 나아간 걸까, 아니면 그 순간들을 무의식적으로 지워버리는 걸까.

의사 선생님은 내가 여전히 치료의 경계선을 왔다갔다한다고 말씀하셨다. 빈 종이에 직선을 그으며 설명하시는 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나는 저 선에서 얼만큼 더 나아가야 하는 걸까. 생과 사의 경계선을 벗어나려면 얼마나 더 오랜 시간이 걸릴까. 치료 초반에 선생님은 5년을 말씀하셨는데, 나는 아직 선생님을 만난 지 2년이 안 되었는데. 그렇지만 내가 치료자와의 관계에서 떨어져 좀 더 오리지널한 관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나의 과거 경험을 추적해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 달라졌다고 하셨다.

내가 액팅 아웃을 했던 이유는, 나를 해치는 것이 가장 손쉽게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이성으로 억누르고 있을 뿐, 내가 행하는 다른 대체 방법들보다 자해를 하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다. 죽고 싶을 때에도, 무료함을 견딜 수 없을 때에도, 사람들에게 짜증이 날 때에도, 나는 여전히 나를 괴롭히고 싶다. 그럼에도 이제는, 하지 않는다. 과거로 돌아가는 게 무섭기 때문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성장하는 존재라고 했던가. 나는 분명 예전과는 달라졌다. 의사 선생님은 나를 만난 초반에 감정 수용과 지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살면서 받아보지도 못한 것을 스스로 하라는 건 억울한 거죠. 하지만 충분히 감정을 수용받는 경험을 한다면, 분명 언젠가는 스스로 그 기능을 할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선생님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나를 수용해주셨다. 진료실에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선생님의 탓을 하고 투정을 부려도, 힘든 얘기를 해도, 좋은 얘기를 해도. 그러다보니 최근에 깨달았다. 이제는 나 스스로가 내 감정을 수용하고 있다는 것을.

물론 감정을 안전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아직도 흘러나오는 부정적 감정을 감당하지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분명 달라진 것은, 이제는 내 감정을 무시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느끼는 것이 숨겨야 할 감정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내 인생에 있어서는, 내가 느끼는 것이 곧 정답이다. 숨기는 데에 급급해 감정을 무시하거나 자학적인 방법으로 처리하지 않고, 때로는 가만히 마음을 들여다본다.

그러니까, 언젠가 이 기능이 더 발전한다면, 흐릿해진 기억들을 다시 되짚어야 할 것이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죽으려 했는지, 지금은 왜 여전히 살고 싶지 않은지. 엄마와의 관계, 치료자들과의 관계,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 무의미감과 무료함, 삶의 목적 등에 대해 스스로의 답을 찾아나가야 할 것이다. 흐릿함이 강렬한 색채를 뿜어낼 때까지. 멈춰설지언정 뒤돌아가지는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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