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로 코엘료, <11분>
사실 별로 구미가 당기는 책은 아니었다. 성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싶지도 않았고, 굳이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책을 읽을까 말까 고민하다가 들었던 생각은, 대체 왜 상담 선생님은 잊을 만 하면 한번씩 사랑에 대한, 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었다. 나에게 있어 이성 간의 사랑은, 특히 성에 관련된 부분이 있어서는, 부정적 감정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20대 초반의 첫경험은 남자의 자기만족으로 끝났고, 그 후에 만났던 다른 남자들도 나에 대한 배려보다는 본인의 성욕을 채우는 데 급급했다. 짐작건대 그들은 여성의 몸을 배려하는 방법따위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나를 위해 밥을 사주고 선물을 사주는 등의 행동을 하다가도, 잠자리를 가질 때면 욕구 충족을 위해 이기적으로 구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아프다고 하면 그래도 참으라고 했고, 피임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매일 같은 시간에 경구 피임약을 삼켜야 했다.
그러니까, 상담 선생님도 결국 남성이니까, 여성이, 특히 한국 사회에서 자란 여성이 느끼는 성에 대한 부정적 관념을 이해하지 못하시겠지. 무엇보다 우리는 사회적으로는 N번방 사건을 겪었고, 나 개인적으로는 대학 시절 우리 과에서 일어났던 단톡방 사건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소비하는 곳에서, 사랑이나 성은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없는 게 나은 것이다. 책이나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황홀한 것이 아니라, 불안과 고통, 그리고 상실인 것이다. 그런데도 사랑이 정말 필요한 것일까?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지도 모른다. “네 남성관이 왜곡된 거야. 모두가 그렇지는 않아.”, 또는 “어릴 때 아빠가 없었으니까 그래. 정상적인 사랑이 있는 가정을 경험해보지 못했잖아?” 어느 정도는 사실일 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는 분명 진정한 사랑을 찾아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애초에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을 찾기 위해, 에너지를 소비해가며 노력을 하고 싶지 않다.
그럼에도 나는 책을 펼쳐들었다. 반쯤은 반항심이었다. 이 책의 모든 걸 부정해주겠다는.
책을 다 읽고 들었던 생각은, ‘그럼 그렇지’였다. 창녀인 주인공이 진정한 사랑을 찾아내는 동화같은 이야기. 마지막에 남자 주인공이 눈앞에 짠 나타났을 때는 전형적인 클리셰를 보는 느낌이었다. 성에 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다루었다는 점 말고는, 책에서 장점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이제 깨닫는다. 내 영혼에 와 닿은 사람들은 내 육체를 일깨우지 못했고, 내 육체를 탐닉한 사람들은 내 영혼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을.
지금까지 4번의 연애를 하며 단 한번도 상대와 ‘영혼이 닿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이 문장을 쓰며 영화 굿 윌 헌팅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평생 그런 식으로 살면 아무도 진실하게 사귈 수 없어.”라는 대사가. 내가 생각하는 진실한 관계는 육체적 관계보다는 정신적 관계이다. 하지만 내가 만났던 남자들은 모두 나와는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첫 남자친구는 성관계를 망설이는 내게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야?”라는 말을 하며 죄책감을 유발하기도 했다. 나는 정신적 교류를 포기한 채 육체적 관계만 가져야 했다. 상담 선생님은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것 같다고, 정신적인 쾌락까지 바라는 거냐고 말씀하셨다. 그 두 개를 다 가져가지 못한다면, 아무도 만나지 않는 게 낫다.
“하룻밤? 마리아, 과장을 해도 정도껏 해야지. 그건 사십오 분 정도에 불과해. 아니, 옷 벗고, 예의상 애정 어린 몸짓을 하고, 하나마나한 대화 몇 마디 나누고, 다시 옷 입는 시간을 빼면, 섹스를 하는 시간은 고작 십일 분밖에 안 되잖아.”
11분. 겨우 11분을 축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었다.
여담으로, 7분은 너무 짧은 것 같아서 제목을 11분이라고 지었다는 작가의 말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자신감 과잉 아닌가?
누구나 사랑할 줄 안다. 그것은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하는 법을 다시 배우고 기억해내야 한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 지나간 감정들의 불길 속에서 활활 타오르고, 기쁨과 고통, 추락과 회복을 다시 살아내야 한다. 새로운 만남들 뒤에 존재하는 운명을 알아볼 수 있을 때까지.
온갖 부정적 경험과 감정을 털어놓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책에서 내 눈길을 잡아끈 건 이 구절이었다. 이 중에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하는 법을 다시 배우고 기억해내야 한다는 것이. 생각해보면 나는 단 한번도, 정말 단 한번도 사랑을 배워야하는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어렸을 때는 운명적 사랑을 믿었고, 성인이 된 후에는 진실된 사랑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으니까. 연애나 결혼도 영원하지 않고,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 변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작가는 ‘새로운 만남들 뒤에 존재하는 운명’이 있다고 했다. 소설 속 마리아는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을 모두 얻게 된다.
사랑은, 진정한 사랑은 나의 모든 것을 내어줘도 괜찮은 것 아닐까. 하지만 나는 텅 비어 있어서 타인에게 내어줄 것이 없다. 나는 정신적 교류를 원한다고 하면서도, 사실 스스로가 그 통로를 차단하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나를 이해할 사람은 없다라는 높은 벽을 세운 채. 내 삶에 동화는 없다. 남은 건 소진된 육체와 공허함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