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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비 Aug 13. 2024

식당에서 발견한 시간

사史적이고 소소한 이야기

8월 초에 방학을 맞아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역사 수업을 맡게 되었다. 장소는 부산근현대역사관.


수업이 있던 날은 날씨가 너무 더워서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날이었기에, 오후 수업이었음에도 일찍 나가서 역사관 근처에서 수업 준비를 했다. 일찍 장소에 가서 수업을 준비하고 가는 게 땀도 좀 덜 흘리고 마음의 여유가 생길 것 같아서 말이다.


11시쯤 국제시장 앞에 도착. 와.. 땡볕이다.. 얼른 시원한 곳으로 들어가야 해..

(BGM : Rain - 태양을 피하는 방법)


평소 눈여겨봤던 바게트 샌드위치 브런치 가게로 들어갔다. 1층은 이미 만석이라 2층으로 올라갔다. 계단이 무척 가파른 것이 아무래도 지어진 지 오래된 건물인 것 같다. 하긴 중앙동, 광복동 일대에는 아직 일제강점기 때 건물들도 많이 남아있으니 이 동네에서 이렇게 가파르고 좁은 계단이 낯설진 않다.


2층에 앉아서 기다리면서 강의 준비. 이번 강의는 한국전쟁(a.k.a. 6.25).

한국전쟁은 남과 북이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서로 땅을 빼앗겼다, 되찾았다 하던 전쟁. 내전으로 시작을 했지만 연합군의 참전으로 국제전으로 발전한 전쟁. 휴전협상 기간 중 너무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전쟁. 내가 생각하는 한국전쟁의 중요한 시사점은 민간인 학살이지만, 공교육을 배우고 있는 학생들에게 중요한 건 전쟁의 과정과 결과다. 그래서 몇 년도 며칠에 무슨 작전을 펼쳤고, 며칠에 서울을 되찾았고 다시 빼앗겼는가가 중요하다. 그런데 나는 날짜 외우는 게 그렇게 어려워서 계속 보고 또 보고..


외운 날짜 까먹은 건 아닌가 하며 점검하고 있을 때쯤, 내가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고 진동벨이 울린다.


내가 주문한 음식은 당근라페 샌드위치.


라페가 가득 든 샌드위치를 앙~ 하고 물었더니 당근이 떨어질 것 같다. 그래서 고개를 뒤로 져쳤더니 이런 글귀가 눈에 뙇! 들어온 것.


기둥 위에 올린 상량에 쓴 글귀 같은데, 뭐라고 적은 거지? 하며 고개를 돌려가며 읽어보았다.


룡 단기 4291년 4월 26일 오시 상량 귀

그러니까 단기 4291년, 1958년 4월 26일 11시~13시 사이에 대들보에 상량을 올리면서 그 날짜를 적어둔 것. 와.. 이렇게나 오래된 건물이라니. 당근라페 덕분에 이 건물의 시작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짧은 한 문장에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전쟁 끝나고 5년 정도 지나서 지은 건물이네. 전후 복구가 시급했던 때에, 부산은 전쟁의 피해가 적었던 것과 당시의 부동산과 관련이 있을까..


1950년대에는 연도를 쓸 때 '단기'로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단기'로 적힌 것이 진짜로(?) 그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걸 인증해 주는 것 같다. 더불어 시간의 단위도 지금처럼 몇 시 몇 분이 아니라 12간지로 나눈 시간 단위를 썼다는 것도 알 수 있고 말이다. 다만 저 날짜가 음력일지 양력일지 궁금하네. 저 상량 안에 상량문이 들어있을까도 궁금하고.


처음에 저 한자를 읽으면서 맨 마지막 글자가 뭔지 몰랐다. 익숙한 글잔데 도저히 모르겠네.. 하고 한참을 들여다봤는데, 거북 귀자를 뒤집어서 써놓은 것. 그러니까 '축> 건축 <하' 이런 느낌으로 쓴 거라 마지막 '귀'자를 뒤집어서 쓴 것 같다. 용과 거북은 영험한 동물로 취급되고 있었기에, 그런 영물이 새로 짓는 건물을 잘 보살펴 달라는 의미로 쓴 것일까? 그 집주인의 바람대로 이 건물은 여전히 건재하고, 건물에서 장사하는 가게는 성업 중이다. 이 브런치 가게 빵맛이 무척이나 맛있어서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 


오래된 동네에서 이런 오래된 시간을 발견하는 것이 무척 흥미롭고 재밌다. 

아무래도 이 가게 자주 오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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