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거스 Mar 25. 2024

혼자 다녀온 홍콩

※ 드라마 <주재원 Expats>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2년 3개월 21일을 만난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언제부턴가 싸우는 일이 잦아졌는데, 기리가 말하길 더 노력하고 싶지 않다는 걸 인정하자 마음이 떠났다는 걸 알았다고 했다. 그는 1년 넘게 고민했다지만, 나에겐 단 몇 분 만에 사건처럼 발생한 이별이었다. 그와 헤어져서 혼자 남는 것보다 그가 죽어서 혼자 남는 게 더 현실적인 걱정으로 느껴졌는데, 그는 살아있고 나는 혼자 남았다.


기리는 여행을 좋아했고 그래서 나도 여행을 좋아하기로 결심했었다. 3월의 홍콩 여행도 같이 가기로 한 거였다. 내가 좋아하는 니콜 키드먼이 나오는데다(이 배우의 출연작은 나의 강요로 거의 다 같이 봤는데, 이상한 걸 많이 찍는 분이라 힘들었을 것이다.) 마침 홍콩이 배경인 <주재원>이라는 드라마도 같이 보기 시작했다. 여기서 니콜 키드먼이 분한 마가렛은 야시장에서 6살 난 막내아이를 잃어버리는 사람이다. 그 후로 1년이 지났는데 찾지도 못하고, 상실을 겪었지만 혹시 몰라 애도할 수도 없는 그런 사람.


여행이 2주도 안 남은 시점에 헤어지는 바람에 그가 예약했던 비행기도 내가 예약했던 호텔도 다 급하게 취소해야 했다. 그러고 며칠 뒤에 (비로소 울지 않고 혼자 있는 게 가능해졌을 때) <주재원>을 마저 봤다. 마가렛 부부는 남은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본국인 미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는데, 비행기에 타기 직전에 마가렛이 말한다. 못 하겠다고. 도저히 못 떠나겠다고. 그래서 가족을 미국으로 보내고, 혼자 다시 홍콩 거리로 발걸음을 돌린다. 희망이라고 하기엔 너무 희미하지만 미련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는 마음으로 언제 나타날지, 과연 나타나기는 할지 모르는 답을 찾아서 한 걸음, 한 걸음.


내 상태를 마가렛의 상태와 완전히 동일시했던 건 아니고 지금 이 글을 쓰면서는 더더욱 안 닮았다는 걸 알겠어서 민망하지만, 마지막 장면을 보고 나서는 나도 마가렛처럼 혼자서라도 저 땅을 밟아야겠다는, 거창하지만 필요성까지 느꼈던 것 같다. 기리와 당연히 함께할 거라고 여겼던 미래를 잃어버렸으니, 함께하기로 약속했던 3박 4일 정도는 대충 비슷하게나마 가질 자격이 있는 것 같았다. 이러한 사연으로 집 밖을 잘 나가지도 않고 특히나 외국은 거의 나가본 적도 없는 사람이 혼자 홍콩에 다녀온 것이다.




그러나 마음만 거창하게 먹었지, 나라는 인간의 게으름은 나라가 바뀐다고 쉽게 바뀌는 게 아니었다. 얼리 체크인을 하고 그라인더를 켜봤는데 100m 거리에 있는 썩 괜찮은 남자와 바로 마음이 맞아서 섹스를 한 판 떴고 그래도 3시밖에 안 돼서 와 원래대로면 이제 체크인할 시간이다 피곤하니 잠깐 눈 붙여도 되겠다 했던 게 오판이었다. 눈을 떠보니 저녁 7시가 다 되어버린 것이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오전이었는데 어째서...


그래도 홍콩까지 왔는데 이렇게 하루를 날릴 수는 없다, 호텔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기리와 같이 가기로 했었던 성완에 있는 게이바로 향했다.


구글에 따르면 '홍콩 최고의 게이바'인 Zoo Bar는 투룸 남짓한 크기로 아주 조그마했고 손님이 없었다. 카운터에 앉아 바텐더한테 말이나 걸어볼까 했는데, 바텐더는 나에게 여기 말고 저기 있는 테이블에 앉으라 했고, 나는 괜히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며 혼자 칵테일 잔을 비웠다. 그러다 꽤 취해버렸는데 갑자기 한꺼번에 십수 명이 몰려들어 바를 채웠다. 특이하게도 한 절반은 백인이었다(다들 구글에서 홍콩 최고의 게이바를 검색한 걸까?).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살다가 얼마 전에 뉴욕으로 이사했고 지금은 홍콩에 있지만 내일은 일본으로 떠난다는 멕시코 남자가 말을 걸었다. 우리는 꽤 길게 대화했고, 몇 번 키스했고, 클럽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뒤로는 잘 기억이 안 난다. 클럽의 무거운 공기, 멕시코 남자와 안았던 것, 어설프게 몸을 흔들었던 것, 화장실에 갔던 것, 벽에 좀 기대 있었던 것. 여기까지가 이날 기억의 끝이다.




정신을 차렸을 땐 다행히도 길거리가 아니라 내 호텔방이었다. 침대에는 클럽에서 인사를 나눈 기억만 어렴풋이 나는 싱가포르 남자가 있었다. 내가 너무 취해서 데려다줬고 불편해 보여서 옷을 벗기긴 했지만 섹스는 하지 않았다고 했다. 머리가 깨질 것 같고 죽고 싶은 기분이라서 미안하지만 혼자 있고 싶다고 양해를 구했다. 몇 번을 잠들었다 깼다 반복하다 겨우 좀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졌을 때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3시였다. 오늘 도착한 사람들이 체크인할 시간.


속이 거북해서 먹을 걸 넣지는 못하겠고 그 와중에 딴사람한테 넣고는 싶어서 그라인더를 켰다. 홍콩에 와서 깨달은 게 있다면 한국인 버프란 실재한다는 것이었다(적어도 게이들 사이에서는). 이날 나는 호텔을 거의 벗어나지 않고 세 명의 로컬 남자와 연달아 잤다.


첫 번째는 한국 드라마를 즐겨보는 남자였다. 요즘은 골드 마스크라는 드라마를 보고 있으며 남자 주인공이 마음에 든다고 사진을 보여주는데 이현진이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예전에 게이 캐릭터를 연기한 적이 있다고 알려줬더니 너무 좋아하길래, 영화를 보고 나서도 그렇게 웃고 있을지 두고 보자고 했다.


두 번째는 한국 군대에 관심이 많은 남자였다. 그는 한국 군인들은 에브리바디 게이라는데 사실인지 물었고, 해병문학이라도 읽었느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무슨 뜻인지 설명하다가 망할 게 뻔했기에, 한국은 징병제이기 때문에 한국 남자가 다 게이가 아닌 이상 그럴 리는 없다고 답했다. 그래도 많은 게이들이 군대에서의 섹스 경험이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더니 그는 역시, 라고 말했다.


세 번째는 굉장히 잘생기고 굉장히 몸이 좋은 남자였다. 그는 한국인처럼 생긴 로컬 남자친구가 있는데 가끔 한국인들과 바람을 피운다고 했다. (섹스 도중에 본인이 말을 꺼냈다. 널 보니 누구 생각이 나는지 알아? 내 남자친구.) 이 무렵에는 나도 힘에 부쳐서 오래 못 했고, 신경을 안 쓰기에는 그가 너무 잘생겼기에 내가 오늘 너무 힘들었고 아무것도 못 먹었고 앞서 몇 명 만나기도 했고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았고 그럴수록 더 꼬무룩해졌다. 그는 충분히 좋았다고 해줬고(잘생긴 게 말도 예쁘게 하지) 어서 뭔가를 먹으라고 재촉했다. 어서 남자친구에게 돌아가라고 응수했더니 말없이 웃었다.


낮에 첫 번째 남자와 섹스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있을 때, 어째서 홍콩에 혼자 왔는지가 궁금하다고 했다. 이 글의 첫 단락을 영어라서 조금 더 횡설수설하며 들려줬더니, 지금 기분이 어떠하냐고 물어봤다. 아무한테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된 것 같다고 했다. 그날 밤 자기 전에 그에게서 You are important❤️ 라고 메시지가 왔다. 고마워야 하는데 공허하게 느껴졌다.




홍콩 여행 3일차. 인간적으로 오늘은 밖에 나가야 한다. 내가 아무리 찐따라도 오늘도 호텔에만 있을 수는 없다. 남들은 그냥 하는 건데 결심씩이나 하고 알람에 맞춰 일어나 일찌감치 호텔을 나섰다. 오늘의 목적지는 단 두 곳이었다. 낮에는 마가렛이 국수를 먹고 춤추다 현타 맞았던 음식점. 밤에는 마가렛이 아들을 잃어버린 야시장. 남는 시간은 그때그때 발길이 닿는 대로 채울 생각이었다.


Cheung Sing Restaurant은 드라마에선 야식을 먹는 곳으로 그려졌지만 실제로는 저녁 6시 반까지만 영업하는 가게였다. 다행히 파는 메뉴는 비슷한 것 같았고, 나는 니콜 키드먼이 먹었을 법한 국수를 시키고(자세히는 안 나와서) 볶음밥도 시키고 콜라도 시켰다. 그런데 좀 지켜보니 여기서는 식사에 밀크티를 곁들이는 게 국룰인 것 같았다. 가게는 좁아도 스무 명은 족히 있었는데 곁눈질로 세어봤더니 밀크티를 안 마시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보였다. 알못 외국인 같으니.


식사를 마치고 목적지 없이 한참을 걸었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리를 걸었고, 사람이 아주 많은 거리도 걸었고, 학교도 보고 병원도 보고 관공서 건물도 봤다. 여행은 일상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거라는데 일상의 감각이 되돌아오면서, 기리 생각이 났다. 12년을 함께하면서 서로에게 붙인 온갖 상징이 곳곳에서 나타나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존재감을 알렸다.


북경오리 때문인지 홍콩 사람들은 오리에 진심이었다. 홍콩 어딜 가도 오리가 있었다. 내가 기리를 부르는 애칭 중 하나가 오리였다. 눈치덕이라는 캐릭터를 보고 닮았다고 한 게 시작이었는데, 생긴 것도 비슷하고 엉덩이도 오리궁뎅이고 마침 기리와 글자도 하나 같아서(애초에 '기리'도 애칭이지만) 이보다 절묘할 수 없다고 느꼈다. 나에게 오리는 최고로 귀엽다는 상찬이었는데, 기리는 가끔 자신이 너무 오리 같다며 자기 비하의 표현으로 썼다. 예쁜 사람이었는데 그 사실을 마지막까지 실감시켜주지 못했다. 그 생각을 하면 슬프고, 내가 연인으로서 실패했다고 느낀다.


걸을 만큼 걸은 것 같아서 눈에 보이는 버스를 아무거나 탔다. 그런데 이 버스는 또 기리의 초성을 닮아서 의미를 부여했던 숫자인 72번 버스의 뒤를 몇 정거장이나 바짝 쫓았고, 그 버스와 마침내 갈라서는 순간에는 가슴이 찌릿했다.


다시 무작정 걷다가 예쁜 정원이 있어서 들어갔다. PMQ라는 곳의 앞뜰이었고, 6층짜리 상가 건물이 한 쌍인데 호실 하나하나가 다 로컬 디자이너들의 상점 또는 작업실이었다. 여기서만 2시간 넘게 있었던 것 같고, 100달러씩 쓰다 보니 어느덧 100만원이 넘는 금액이 긁혀있었다. 이제 야시장에 갈 시간인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안드레아보다도 더 많은 쇼핑백을 들고 있었고 이 상태로는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는 물론이거니와 시장의 좁은 통로를 물리적으로 통과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우버를 불러서 호텔로 돌아갔다.


방에 돌아와 짐을 풀고, 또 짐은 미리미리 싸야 안심이 되는 성격이라 캐리어에 옮겼더니, 밤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구글맵을 켜보니 야시장까지는 가는 데만 40분. 오늘 꼭 가기로 했던 곳이 딱 두 군데였는데 그것조차 달성을 못 하다니 참 나답다, 정신과 의사가 들으면 자책을 위한 자책이라고 평할 만한 자책을 하며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도저히 용납이 안 됐다. 이대로 끝내면 나 자신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해답을 찾는 정도까진 아니어도 나름대로 마음의 가닥을 잡겠다고 홍콩까지 온 것 아니었나. 나는 본성을 거스르고 침대에서 박차고 일어나 노스포인트까지 뛰어가서(그 와중에 나 자신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연기하는 배우 같다고 의식하며) 지하철을 한 번 갈아타고 몽콕에 도착하여 마가렛이 아들, 그러니까 거스를 잃어버린 야시장을 향해 달려갔다.



시장은 거의 파장이 되어 있었다. 그나마 불이 켜진 상점마저도 자리를 정리하고 있거나 물건을 팔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나는 거스가 사라졌던 지점, 마가렛이 혼자 남아있었던 지점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눈을 감아보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단히 드라마틱한 무언가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미련을 버릴 수 있거나 차라리 더 슬프기라도 했으면 쉬웠을 것 같은데,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허무했다.


현대인으로서 기록은 남겨야 하기에 사진을 몇 장 찍었고, 그 와중에 구도가 성에 안 차 맞은편에 있는 육교에 올라가 몇 장 더 찍었고,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다음날 체크아웃을 하고, 돈을 너무 많이 썼기에 회사를 열심히 다녀야겠다고 다짐하며 공항에서 회사 사람들 줄 선물을 사느라 돈을 더 썼고, 그럴수록 주변에서 광둥어를 쓰는 사람이 줄어들었고, 영어를 쓰는 사람도 줄어들었고, 비행기에 타려고 줄을 섰을 땐 앞뒤로 한국어를 쓰는 사람밖에 없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 시작하자 그제야 울음이 터졌다. 나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서. 그런데 기리는 변한 게 야속해서. 이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다는 게 사무쳐서.


닦아도 닦아도 흐르는 눈물을 감추고 있는데, 승무원이 승객들에게 기내식 뭐 먹을지 물어보며 다가오는 게 보였고, 그 와중에 닭고기와 비빔밥 중에 무엇이 더 먹고 싶은지 생각해보고 닭고기를 골랐다.




1. <주재원>은 홍콩이 배경이고 홍콩에서 로케이션으로 찍었지만, 정작 홍콩에서는 볼 수가 없다. 아마도 우산혁명을 다루기 때문인 것 같다. 코로나바이러스가 극심할 때 홍콩 정부가 제작진의 격리 의무를 면제해줘서 논란이 됐었는데, 홍콩 정부도 시놉 사기를 당한 모양이다.


2. <주재원> 촬영지를 검색하면 문제의 시장이 Ladies Market이라고 하는 곳도 있고 Temple Street Night Market이라고 하는 곳도 있다. 영상 매체의 특성상 여러 군데서 따와서 한 장소처럼 보이게 편집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적어도 거스가 실종된 장소는 Ladies Market도 Temple Street Night Market도 아닌 Fa Yuen Street Market이다.


3. 이하 홍콩에서 찍은 사진들.


Zoo Bar


Cheung Sing Restaurant




이걸 봤을 땐 거의 코믹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영화도 이렇게 상징이 과하면 욕먹는다.


PMQ


호텔 뷰


방에서 너무 안 나가서 청소하시는 분에게 팁을 좀 많이 남겼더니 답장이 왔다.


4. 프로필 사진은 왜 그 모양이냐. 기리와 헤어지고 프로필 사진을 바꾸려고 핸드폰 사진첩을 뒤지는데, 남이 찍은 걸 저장한 사진과 일 때문에 찍은 사진과 어떤 식으로든 기리와 연관이 있는 사진을 다 배제하고 나니 이게 제일 최근 사진이었다. 내 오른쪽 시력을 기억하려고 2021년 5월 28일에 찍은 사진.



keyword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