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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이수 Jul 28. 2024

시간이 지났을지라도 우리 교차점에서 만나

이수기(3)



이수'기(記)' :: 이수의 일기




어릴 때부터 내 삶의 구심점은 가족이었다. 살아가는 데 힘이 됐다는 의미보다는 대체로 나를 가장 괴롭게 하고 그래서 늘 머릿속에 존재해 하나하나 곱씹어보며 슬프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아름다운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 가족은 내가 태어나며 대가족을 이루게 됐다. 당장 능력이 없는 아들이 덜컥 결혼을 하고 손녀를 만들자 할아버지 할머니는 기꺼이 자신들 집 한편에 자리를 내줬다. 아빠는 든든했겠지. 아빠는 능력 있던 할아버지에게 한평생 기대 살아왔던 만큼 삶의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그곳에 녹아들었을 거였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가정을 꾸리고 삶을 영위해 나가던 다른 형제들과 달리 아빠는 부모 울타리 속에 자신의 가정을 밀어 넣고 그대로 집 붙박이가 됐다. 그런 아빠를 대신해 할아버지와 엄마는 공동 가장으로서 집안 경제 상황을 도맡았고, 할아버지가 정년퇴직한 이후로는 엄마가 3대의 가장으로서 온전히 몫을 떠맡게 됐지만 아빠는 여전히 누워있을 뿐이었다.


정서적으로 쉽지 않은 10대였다. 아주 옛날엔 가족들이 다 같이 화목하게 앉아있기도 했던 거실 내 보라색 소파 위로 언제부턴가 아빠가 늘 시체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또는 방 안에. 술 먹고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3대가 사는 집이었는데도 집은 늘 고요했고 왠지 모를 절망감이 서려 있었다. 아마도 각자가 마음속에 담아 두고 있는 절망감 등이 온몸으로 퍼져 나와 집안을 잠식하지 않았을까.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어느 순간부터 아빠에게 일자리를 구하라는 등의 이야기하는 걸 체념한 듯했고, 나는... 가죽만 남은 것 같은 아빠를 보며 매일 마음이 무너졌고 어쩔 땐 망령 같다고 생각도 했다. 성불해 줄 수 있다면 기꺼이 해주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뭔가 해결이 된다면. 그때 엄마는 어땠나. 하루의 고단함을 등에 업고 돌아왔을 때 그 문 앞에서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엄마 얼굴이 어땠나 아무리 떠올려봐도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때의 우리는 그저 같이 살고 있을 뿐이었다. 엄마는 일을 마치고 집에 오면 며느리이자 엄마로서 최소한의 역할을 해야 했고 그건 보통 학원 숙제를 했는지, 들어가서 공부하라던지 등의 이야기를 하는 정도에 그쳤으니까. 나는 엄마에게 주어진 역할을 이해하면서도 늘 내가 필요할 때 부재했던 사실에 서운함을 토로하는 어린애였다. 내 결핍에 대해서만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때는 그랬다.


10대의 끝자락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년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셨다. 날벼락같이 벌어진 일로 아빠는 나이 쉰이 넘어서야 홀로 서게 됐다. 우리는 평생 살아온 할아버지 집에서 쫓겨나 파도에 밀려나듯 점점 더 멀리, 더 멀리 거처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가 사라지며 아빠에게 쌓여있던 내 감정도 터지기 시작했고, 우리는 또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다. 머리가 제법 컸다고 여태 차곡차곡 쌓아온 원망을 입 밖으로 터트리는 나로 인해 아빠와 엄마는 아마 다른 지옥에서 살았겠지. 집 안에 고성이 오고 가는 날이 많았다. 한 번 터지기 시작한 마음은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왔으니까.


그런 와중에도 변한 게 있다면 아빠의 동태였다. 시체처럼 퍼져 살던 사람이 밥을 짓기 시작했다. 예전이라면 할머니와 엄마의 분담으로 이뤄지던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할머니도 없었고, 엄마 또한 엄마만의 냉랭함으로 매일 아침 일터로 나서던 만큼 아빠는 본인 몫을 애써 찾아낸 것 같았다. 매일 장을 보고,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고, 어설프게나마 집안일을 하고 그 루틴이 아빠의 일상으로 자리 잡게 됐다. 여전히 아빠는 누워 있었고, 나와 고성이 오가기도 했고, 서로를 회피하는 날들이 많았지만 그 시간 속 벌어진 틈으로 아빠의 노력이 조금씩 묻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제법 지나고 생전 독립해 본 적 없던 나는 결혼으로 내 살림을 차리게 됐다. 벌써 일 년 반이 훌쩍 지났다. 아주 작은 집이지만 며칠 보지 않으면 먼지가 금방 쌓이고, 둘만 살아도 빨랫감은 넘쳐나며, 냉장고에 넣어도 곰팡이는 잘만 피고, 야채 별로 보관 방법이 모두 다르다는 등 기본적인 사실들을 늦은 나이에 처음 알았다. 요리할 때 간 맞추는 일이 쉽지 않아 맹탕을 먹거나 소금탕을 먹는 날도 초반에 여럿 있었고, 주말에 반찬을 만들겠다고 나섰다가 일만 벌이고 지쳤던 날도 꽤 있었다. 이십 대를 아르바이트로 채워 보낸 만큼 일을 못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집에서는 항상 엄마 아빠와 거리를 두고 방관하던 일이 이렇게 드러나는구나 싶었다. 남편과 둘이 살지만 남편이 늦는 날이 많아 혼자 집에서 밥을 준비하고 있을 때면 유독 아빠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가족 어느 누구도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집에서 그들을 위해 쌀을 씻고 밥을 안치고 반찬을 준비했을 사람이. 그러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지곤 했다. 야속하지만 그럼에도 집에 돌아올 우리를 기다렸겠구나. 본인이 오랜 시간 동안 하지 못했던 몫을 하려고 많이 애썼겠구나, 외로웠겠구나 싶어서. 갓 집을 떠나 엉망진창 살림을 꾸려 나가고 있을 내가 걱정돼서 필요한 반찬은 없을지, 집 걸쇠는 잘 걸고 자는지 본인이 할 수 있는 사랑을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아빠가 여전히 미운데 그에 못지 않게 고마워서, 메시지를 썼다 지웠다 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최근에는 어느 저녁, 회사를 마치고 엄마와 저녁을 먹었다. 감정을 다스리는 뇌의 어느 부분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한평생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살던 엄마가, 요 근래 들어 자신의 마음이 터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저녁의 주제였다. 아빠를 보면 울화가 치미는데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어서 본인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또, 너는 대체 왜 그렇게 엄마에게 서운해했으며 아직도 엄마에게 서운하냐고. 십 대때 부모님을 여의고 나를 낳을 때도 생각이 안 났던 자신의 엄마가 요새 들어 자꾸 생각이 난다고 말이다. 그런 엄마의 얼굴을 보자 아주 오래전 우리가 절망 속에서 버티던 시간이 떠올랐다. 내가 엄마에게 서운해했을 그 순간에도 엄마는 무너지지 않으려고 간신히 버티고 있었겠구나. 엄마는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내는 데 여념이 없어서 온갖 감정을 애써 무시하다 여기까지 왔구나. 엄마의 멈춰있던 마음과 시간이 이제야 밀려드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이제는 내가 온전히 모두 받아주겠다고 말하자 엄마는 지하철 한 복판에서 엉엉 울었다.


이제라도 늦게나마 엄마와 나의 교차점이 생겼을까.

그곳에 아빠도 서있을까.


여전히 우리는 서로를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지점들이 있을 테고, 서로에게 상처 준 순간들은 어느 날 문득 생각나 또 마음을 아프게 만들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지금까지와는 조금은 다른 시간들을 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이 새싹처럼 피어났다.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건 미안함이 뒤따르지만 제법 아름다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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