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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 Paloma Dec 28. 2023

눈 내리는 밤

1월 1일이었다. 


남포동 국제시장에서 산 (아마도 버버리 흉내를 낸 듯한) 브라운 체크무늬 이민가방과 배낭여행용 백팩에 1년 치 옷가지와 짐들을 구겨 넣어 집을 나섰다. 


나의 여정은 김해공항에서 김포공항으로, 또다시 김포공항에서 런던 히드로공항으로 가는 것이었다. 보딩패스를 끊어주던 매끈한 인물의 항공사 직원에게선 전날 회식을 한 모양인지 희미한 술냄새가 났다. 출발 게이트 앞에서 아버지와는 늘 그렇듯 어색한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유니온잭의 빨강 파랑 리본이 그려진 '브리티시 에어웨이즈'를 보는 순간 난생처음으로 혼자, 13시간을 날아 집보다 9시간 느린 곳으로 간다는 두려움과 흥분됨으로 심장은 쿵쾅거렸다. 


기내에서 몇 번이고 펼쳐 보았던 하숙집 주소가 적힌 종이를 손에 꼭 쥐고 입국심사를 하고 나오니 픽업 나온 아저씨들이 보였다. 집주소가 가까운 학생들 세네 명씩을 함께 라이드 해주는 것 같았다. 서울에서부터 함께 온 다른 학생들과 자동차에 올랐다. 오른쪽에 운전석이 있었다. 맞다! 여기 영국이구나. 심지어 '마일'로 표시가 된 속도계기판이라니. 분명 바늘은 80~90 언저리에서 흔들리고 있는데 자동차는 왜 이렇게 빠른 것인가?  


남쪽으로 2시간을 내리 달렸다. 분명, 나를 제일 먼저 데려다주겠다고 했는데, 가깝다던 우리 집은 아무리 돌아도 나오지 않고 아저씨는 늦어지겠다며 다른 친구들부터 하나 둘 내려주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 안에는 이제 이 영국아저씨와 나만 둘이 덩그러니 남았다. 갑자기 차는 방향을 바꾸어 휴게소처럼 보이는 곳으로 들어섰다. 

이 상황은 뭐지?

집을 못 찾겠다고 아무 데나 내려주는 건가? 

캄캄한 밤중에?

오싹 한기가 느껴졌다. 


흔들리는 내 동공과 불안한 표정을 읽은 아저씨가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말라고, 주유 좀 하고 너네 집 다시 찾아보자고, 꼭 데려다줄 테니 안심하라고... 

새하얀 눈이 솜이불처럼 두껍게 쌓인 언덕길을 한참 달려 드디어 붉은 벽돌집 앞에 차가 멈추었다. 드디어 찾은 하숙집이었다. 2채의 이층 집이 사이드를 맞대어 붙어있고 마당에는 나무 울타리가 있는 세미 디태치드 구조의 평범한 영국집이었다. 


정신없이 짐을 내리고, 집주인 가족들 그리고, 함께 방을 쓰게 될 일본에서 온 학생과 인사를 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도톰한 살구색 카펫이 깔려있는 계단을 지났다. 하얀 레이스커튼이 걸린 창문 아래 미지근한 라디에이터가 있는 방이 이제부터 내가 지내게 될 곳이었다. 침대에 걸터앉아 긴 한숨을 쉬고 시간을 계산해 보니 여전히 1월 1일이었다.  


눈 오는 날이면, 종종 떠올리게 되는, 눈을 감으면 아직도 선명한 습기 가득했던 서늘한 공기와 처음 만난 사람과의 어색함과 사과향 시세이도 샴푸냄새가 생경했던 길고 길었던 그 겨울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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