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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도 Dec 09. 2024

IT시대의 유교문화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문득 지난 학창 시절의 시간들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생계에 대해 아무런 걱정 없이 공부하고 토론하고 세상과 부딪치며 다양한 경험을 해볼 수 있었던 시기에 좁은 책상에 앉아 하루 종일 시험문제 풀이에 열중했으니 말이다. 일단 좋은 대학만 가면 된다고, 또 좋은 회사에 취업하면 인생의 고민들이 해결될 거라고 말하던 어른들. 그 말이 틀렸다는 걸 서른 넘어서야 깨달았지만, 이미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 없으니 원통하다.


세상은 그야말로 미친 속도로 바뀌고 있다. 몇 십 년 사이 인터넷, 모바일에 이어 AI혁명이 일어났고 일상과 업무, 관계, 질서 등 모든 영역의 기반이 무너지거나 흔들리고 있다. 어제 정답이 오늘은 틀리고, 오늘의 영웅이 내일의 악당으로 전락할 수 있다. 하지만 학교는 이런 변화에 무심한 듯하다. 학생들은 오늘도 여전히 'would가 맞는지 could가 맞는지', '쌍봉사 철감선사 승탑과 정림사지 오층 석탑 중 무엇이 먼저 만들어졌는지' 문제를 놓고 1번과 5번 사이 정답을 찾기 위해 밤을 새워 공부하고 있다. 평생을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며 운명을 좌우할 대학 타이틀이 시험 한두 문제 차이로 갈릴 수 있다는 사실에 벌벌 떨면서 말이다.


물론 영문법이나 역사적 유물의 건립 시기를 아는 건 중요하다. 하지만 인생의 향방을 결정지을 만큼 중요한지, 오답노트를 쓰고 또 쓰며 젊은 날의 소중한 시간을 갈아 넣어야 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보다는 'AI가 우리 일상에 미칠 영향과 이에 따른 위기 및 기회' 같은 주제를 놓고 관련된 책을 읽거나 반 친구들과 토론하면서 직면한 세상 문제에 대해 자신만의 주장과 논리를 펼칠 수 있는 교육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적어도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6천 달러가 넘고, 글로벌 선진국의 일원이라 자부하는 나라의 인재를 육성한다면 말이다.


농업, 제조업 중심사회거쳐 첨단 디지털 인프라를 활용해 무형자산과 데이터로 부를 창출하는 시대를 맞이했지만, 교육을 포함하여 한국 사회 전반의 제도, 문화, 사상 곳곳에는 과거에 만들어진 정신적 유산이 강고하게 뿌리 내리고 있다. 생산 수단과 방식을 구성하는 물질적 토대인 하부구조가 바뀌었음에도 문화와 제도 같은 상부 구조는 예전 그대로인 것이다. 그 이유는 현 체제를 유지하는 게 이득이 되는 사람들과 평생을 옳다고 믿어온 신념을 갑자기 바꾸는데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변화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두고 경제사학자 조엘 모키르는 서유럽과 중국의 경제가 18세기 이후 크게 벌어진 원인을 분석한 저서 <성장의 문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람들은 제한된 인지 능력으로 인해 새로운 정보와 논리를 비틀고 왜곡함으로써 기존의 문화적 신념을 확증하려 한다. 따라서 문화적 혁신은 언제 어디서나 저항에 맞닥뜨릴 것이며, 이런 저항은 비단 경제적 이해관계에 의한 것뿐만 아니라 기존의 신념이 붕괴하는 것을 막으려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조엘 모키르가 위에서 언급한 '기존의 신념' 중 한국 상황에 대응되는 대상은 유교 문화일 것이다. 그동안 유교 문화는 근면성실, 학습, 집단에 대한 헌신 등의 가치를 강조하며 한국의 경제 성장에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게 사실이다. 하지만 IT 시대에 와서는 그 가르침과 내용이 현실과 괴리되는 부분이 많아 오히려 지속적인 혁신과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시대에 뒤떨어진 대표적인 세 개의 사상이 있다. '장유유서', '사농공상', '단일민족'의 사상이다.



'장유유서', 어른 말씀에 토 달지 마라


한국 아이들은 어른들 말씀을 참 잘 듣는다. "시험 공부 열심히 해라", "좋은 대학에 가라", "의사가 되어라". 어른들은 인생의 확고한 정답을 알고 있기에, 아이들은 군말없이 충실히 따르는게 옳다. 의문을 제기하거나 반항적인 태도로 경로를 이탈하는 순간 '나쁜 아이'가 되어 사회적 압박에 시달린다. "네가 아직 세상을 몰라서 그렇다", "나중에 커서 후회하지 마라". 응원과 지지보다는 우려와 비난이 쏟아진다.


어린 아이들을 만나보면 하고 싶은 게 각양각색이다. 우주에 가고 싶고, 공룡이 되고 싶고, 유니콘을 타고 싶다. 그러다 학교에 입학해 네모난 교실의 네모난 책상에 앉는 순간부터 시험지 속 정답을 찾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신세가 된다. 본인의 개성과 주장을 고집하면 점수가 깎인다. 내 생각보다는 주어진 답을 받아들이고 암기해야 긍정적 피드백을 얻을 수 있다. 옆자리 친구는 같이 놀고 생각을 나누는 동반자가 아니라 더 높은 점수로 눌러버려야 하는 경쟁자가 된다.



주희를 비롯한 성리학의 아버지들은 암기 학습을 지적 능력의 수양에 쓸데없는 것으로 비판했지만, 과거 시험은 유교 사상에 대한 주희의 해석을 반복적으로 암기하는 것이 되었다. 야망을 가진 소년과 청년은 성리학 서적을 외우면서 어린 시절을 낭비해야만 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도 어른들의 정답 가르침은 계속된다. "요즘 젊은 애들은 끈기가 없어", "회사 그만두고 뭐 얼마나 대단한 거 하려고 그래", "그게 되겠어? 인생은 실전이야". 높은 연봉을 주는 안정적인 직장에 취업했음에도 업무에서 성취감과 의미를 찾지 못하고 퇴사하는 젊은이들을 철부지 취급하며 나무란다. 나 때는 이보다 더했다고, 버티면서 모은 돈으로 집도 사고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살아야지 왜 쓸데 없는 짓을 저지르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말이다. 그래서 많은 젊은이들이 이게 정말 맞는지 의문을 품다가도 어른들도 다 그렇게 살았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무기력하게 출근한다.



데이비드 흄은 과거에 뛰어난 성과를 남긴 중국의 과학과 기술 그리고 세련된 문화를 인정했다. 하지만 중국의 과학 발전 속도는 유럽에 비해 현저하게 느려졌다고 꼬집었다. 그 이유는 명백했다. 중국에서 위대한 스승의 권위는 제국의 방방곡곡에 쉽게 퍼졌고 "그 누구도 대세에 감히 저항할 용기를 갖지 못했으며 후세들은 조상이 보편적으로 물려준 것을 반박할 만큼 용감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지나온 시대에는 모두에게 통용되는 정답이 존재할 수 있었다. 대량 생산의 시대였고, 개성 있고 튀는 인재보다는 반듯하고 실수하지 않으며 군말없이 조직을 위해 야근할 수 있는 인재가 다수 필요했다. 하지만 무형자산과 아이디어, 특허권, 고부가가치 상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독창적인 사고와 과감한 실행력, 도전과 실패의 경험으로 본인만의 스토리와 가치를 만들어내는 인재가 필요하다. 누구나 따라할 수 있는 단순하고 뻔한 작업은 알고리즘과 로봇으로 대체하거나, 외국의 값싼 노동력을 활용해 적은 임금을 주고 처리할 수 있다.


이렇게 시대가 완전히 뒤바뀌었는데, 젊은이들은 학창시절을 통째로 낭비하고 시험 푸는 기계가 되어 사회에 내던져진다. 자기 주장을 펼치는 방법도 모르고, 변화에 대응하는 능력과 스킬을 쌓지도 못한 채 완벽하게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 버렸다. 스펙은 화려하지만 현재 기업에 필요한 인재상과는 동떨어진 상황. 취업은 되지 않고 지속적인 거절에 자괴감이 들어 우울증에 빠지기 십상이다. '어른들 말씀대로 문제도 안 일으키고 착하게 살아왔는데, 왜 나는 사회에 하등 쓸모 없는 사람이 되었을까 (혹시 서울대를 가지 못해 그런걸까)' 의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사농공상', 변화는 안정의 적이다


유교 사회는 안정을 최우선의 가치로 두었다. 사회에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은 구성원을 천시하고 사회의 변두리로 밀어냈다. 그 결과물이 사농공상의 질서다. 신기술을 개발하여 전에 없던 도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장인과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새로운 상품과 문화를 전파하는 상인을 사회 하층민으로 취급했다. 반면 예측 가능하고 통제가 쉬우며, 논밭에 꼼짝없이 묶여 타지역으로 이동(또는 도망)하기 어려운 농민은 천하의 근본으로 삼았다. 그리고 질서의 최상단에는 옛 성인들의 고귀한 가르침을 줄줄 외는 선비들을 올려놓았다.


수백 년 유교 질서의 통치를 거치며 사람들 머리 속에는 강한 신념이 자리잡았다. 사회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직업은 선하고, 사회에 변화를 불러오는 직업은 악하다. 새로운 기술은 필요 없고, 이미 있는 기술만으로도 생활을 영위하기에 충분하다. 태어날 때부터 계층은 고정되어 있으며, 주어진 신분에 맞게 주제 넘지말고 맡겨진 역할을 수행하면 된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고 뱁새가 황새를 따라 잡으려 하면 가랑이가 찢어진다. 노예로 태어났으면 노예로 살고, 흙수저로 태어났으면 흙수저로 사는 게 미덕이다. 세상은 성리학의 질서 속에 조화롭고 아름답기에 현재 상태를 보전하고 지키면 될 일이지, 쓸데없이 변화를 일으켜서 혼란만 초래하는 자들은 부적응자, 사회 안녕의 적이다.



상인과 장인에 대한 존경을 분명히 한 부르주아 문화의 부상은 근대적 경제 성장의 기원에 관한 매클로스키 주장의 핵심이다. 만약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는 부르주아의 문화와 근면함을 생산적 방향으로 활용한다면 경제 성과가 향상될 것이다. 그러나 혁신과 생산성의 향상을 동반하지 않고 오로지 협력에만 호소하는 성장은 결국 점점 사라질 것이다.



최근 들어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고는 있지만, 아직까지도 학생들에게 장래에 희망하는 직업을 조사하면 의사, 공무원, 선생님, 전문직, 공기업 등 변화나 혁신과는 거리가 있는 안정지향적 직업이 상위권에 자리한다. 반면 플랫폼 기업의 대표나 신기술을 활용한 각종 테크 스타트업의 창업자들은 종종 서민들의 삶을 붕괴시키는 탐욕적이고 악한 존재로 묘사된다. 그래서 사회는 합심하여 이들에게 의심의 눈초리와 함께 규제의 방망이를 휘두르며 성장의 싹을 밟아버리곤 한다.


사회 안정은 중요하다. 경찰관과 소방관, 선생님, 공무원 분들이 있기에 우리가 안전하고 평화롭게 지낼 수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위치에서 자신의 몫을 다하는 태도도 중요하다. 모두가 책임감 없이 맡겨진 일을 내팽겨치고 나몰라라 한다면 사회 기능이 마비될 수 있다. 하지만 이에 못지 않게 주어진 사회적 신분을 뛰어넘고자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고 신기술 분야에 과감하게 도전하는 사람들도 필요하다. 도전의 이유가 금전적 야망일지언정, 그들이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기 때문에 혁신과 생산성의 향상이 일어나고 경제가 한 단계 도약한다. 혁신으로 인해 기존의 여러 일자리가 사라지겠지만, 글로벌 경쟁력이 강화되고 경제 영역 확장되면서 새로운 분야에 양질의 일자리가 더 많이 창출될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변화를 일으키는 직업의 선호도가 높아질수록 사회 계층간 이동이 활발해진다. 비록 흙수저로 태어났어도 성장 잠재력이 있는 영역에 초기에 뛰어들어 전문성을 쌓고 창업을 하거나 선두 기업의 핵심인재로 합류하면 큰 부자가 될 수 있다. 새로운 혁신 산업은 그야말로 미개척지이기 때문에 모두에게 출발선은 똑같다. 반면 기성 산업에는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지배 집단이 있기에 높은 보상 또는 이익을 거둘 가능성이 낮다. 만약 변화가 사회적으로 저지되고 새로운 혁신 산업이 태동할 수 없다면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하나 밖에 남지 않는다. 지배 집단 아래로 들어가 주어지는 봉급에 만족하며 분수껏 사는 길 말이다. 우리 조상님들이 살아왔던 방식대로.



'단일민족', 이단은 낙인 찍어 탄압한다


개인적으로 외국에 거주하고 일하면서 현지인들로부터 다양한 종류의 차별을 받아본 경험이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외국인 노동자에게 가하는 차별에 비하면 양호한 수준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국만큼 배타적인 공동체가 또 있을까. '우리'와 다른 외모, 역사, 사상, 전통, 성장배경, 환경을 가진 개인 또는 집단에게 낙인(짱*, 똥남*, 양*, 검머* 등)을 찍고는, 머리 속에 박힌 고정관념과 편견을 각각의 낙인에 매칭시킨 후 더 이상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우리 중 누군가도 외국에서 살다 왔다고 하면 마치 순수하지 못한 것처럼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이 놈 외국물 들었네'하며.


외부에서 한국으로 유입되는 외국인들도 문제지만, 밖으로 빠져나가는 한국인들에게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낸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 해외 취업이나 이민을 선택한다고 하면 "가서 외노자 취급 당하며 한번 잘 살아봐라", "한국이 얼마나 안전하고 살기 편리한 나라인 줄 모르네", "나이 들어서 의료보험 받으려고 돌아오지나 마라". 한국 사회가 왜 저들을 품지 못했을까 생각하기보다는 떠나는 이들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반응하기 일쑤다. 한국 사회의 문화와 제도는 아주 뛰어나고 우수한데 왜 떠나지? 그건 저들이 사회 부적응자이거나 무능력해서 그렇다.


떠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한국 사회의 경직성과 단일성에 숨이 막힌다고 한다. 한국 사회는 좀처럼 삶에 다양한 방식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좋은 집, 좋은 차, 좋은 직장, 좋은 학교, 좋은 외모, 좋은 옷 등 생활 대부분 영역에서 모두에게 적용되는 단일한 기준에 따른 우열이 적용된다. 그리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내가 다른 사람보다 우위에 있는지 확인하고, 열등한 존재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끝나지 않는 경쟁을 지속해야 한다. 단일민족의 사상이란 곧 '우리'에 속하는 구성원이라면 이 단일한 기준을 받아들여야만 하고, 다른 기준을 들이대는 자는 이단으로 여긴다는 사상이다.


사실 한 집단이 가진 놀라울 정도의 균질함과 동등함이 장점이 되는 경우도 있다. 단일대오를 이뤄 적들에 맞서 싸우는 군대를 조직하거나, 커다란 공장의 제조시설을 가동하는 대규모 인력을 운영하는 데 있어서는 많은 도움이 된다. 모두가 비슷하기에 서로 의견 다툼이 생길 일도 적고, 구성원 간에 커뮤니케이션도 원활하다. 아 하면 어 하고,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을 수 있다.


문제는 IT 시대에 와서 점점 개인주의와 창의성, 독창성이 중요해지고 있는데, 한국 사회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동질성을 강요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시대에 부합하는 우수한 인재일수록 한국 사회와는 맞지 않을 수 밖에 없다. 남들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너무 당연한 점을 지적하여 문제 삼고, 습관과 언행이 이하여 당최 이해하기 어렵다. 대다수의 눈에, 특히 기득권들에게 이들은 불편하고 성가신 존재다. '이상한 애'로 낙인 찍고 험담하고 따돌리면서 괴롭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단자에게 남은 선택지는? 개성을 포기하거나 탈조선 뿐이다.



보수 세력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단과 혁신은 날로 번창했다. 분열, 방랑 지식인 그리고 인쇄술의 확산으로 인해 기득권은 문화적 사업가들이 만든 불온하고 이단적인 새로운 믿음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한 국가가 사상가들을 탄압하려는 움직임을 보일 경우 다른 곳으로 도망치면 그만이었다.



단일민족 사상은 양방향으로 작동한다. 안으로는 다수의 의견과 다른 독창적인 생각을 하는 구성원을 찍어 누른다. 밖으로는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상식에 벗어나는 아이디어와 행동 패턴을 들여혼란을 초래할 수 있는 분자의 유입을 차단한다. 그럼으로써 내부에서 일어날 수 있는 혁신도 가로막고, 외부에서 혁신을 수입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없애 버린다. 80억 인재 풀을 스스로 포기하고 5천 만으로 축소한 것도 모자라 그나마 가지고 있는 5천 만의 잠재력도 제대로 활용할 수 없도록 셀프 제한한다.



변화를 거부하는 대가는 누가 치르는가


최근 들어 점차 변화의 흐름이 보인다. 개인 블로그나 유튜브 등을 통해 퇴사 브이로그를 올리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실행력으로 경로에서 벗어난 삶도 행복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학생들은 안정적인 직업보다는 크리에이터,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웹툰 작가를 꿈꾸며 각종 플랫폼을 통해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한다. 대도시 일부 지역과 지방 중소도시에 외국인 커뮤니티가 활성화되고, 한국인과 외국인 노동자가 업무적으로나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얽히면서 교류의 빈도가 잦아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 전반에는 보수적인 유교 문화의 영향력이 강하게 남아있다. 본인들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기존의 신념을 버릴 수 없다는 이들도 많고, 변화가 필요한 건 알고 있지만 본인 은퇴하고 나서 하라며 속도를 늦추려는 이들도 많다. 그만큼 혁신은 더디게 진행되고, 경제 성장은 정체되고, 산업 발전의 주도권을 점점 더 많이 다른 나라에 빼앗기게 된다. 그렇다면 그 대가는 누가 치뤄야 하는가. 결국 젊은이들의 고통으로 지불할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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