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진스와소속사 간 갈등이 연일 고조되고 있다. 뉴진스 멤버들은 소속사가 먼저 신뢰를 저버렸기 때문에 전속 계약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반면 소속사는 계약이 여전히 유효하므로멤버들의 독자적인 활동을 용인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한국매니지먼트연합과 한국연예제작자협회에서도 입장문을 통해 이번 사태가 케이팝 산업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한 사건이 될 수 있다며 우려를 표하고 있다.
뉴진스의 팬도 아니고 케이팝 산업과도 별 연관 없는 제3자의 눈으로 보았을 때, 뉴진스 사태는 케이팝이 글로벌화되고 시장 규모가 커지면서 겪는 성장통으로 보인다. 매니지먼트와 프로듀서, 그리고 아티스트 등 시장에 참여하는 구성원들 간에 거대해진 파이의 몫을 누가 더 많이 가져갈 것인가, 누가 더 파이를 키우는데 공헌하고 있는가에 대한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마치 정치 권력 투쟁과 같이 법률 소송, 언론 플레이, 여론전 등 동원 가능한 모든 수단이 각자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이제까지는 매니지먼트, 즉 소속사가 초기 투자 비용과 실패의 리스크를 떠안는 대신 결과물의 큰 몫을 가져갔다. 프로듀서나 아티스트는 일반인들 기준에서는 고액의 보상을 받긴 했지만, 매니지먼트의 소유주와 경영진에 비하면 작은 몫을 얻는 데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더 큰 몫을, 자신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준 매니지먼트의 보상을 뛰어넘는 몫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키워준 은혜도 모른다며 배신돌이라 비난하기까지한다. 그런데 지금의 사태와 유사한 일이 70년 전 실리콘밸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는 배신돌 대신 '8인의 배신자'가 있었다.
8인의 배신자와 페어차일드 반도체, 그리고 인텔
트랜지스터를 개발한 공로로 1956년 노벨상을 수상한 천재 물리학자 윌리엄 쇼클리는 성격이 괴팍하여 대인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몸담고 연구하던 벨연구소에서 연일 동료 학자들과 다투고 문제를 일삼았다. 그러다 결국 독립하여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를 설립하게 된다. 이 연구소에 쇼클리의 제자들이 다수 합류하는데, 여기에 고든 무어와 로버트 노이스 외 8인의 배신자들도포함되어 있었다.
쇼클리는 본인의 연구소에서도 자신을 믿고 따라온 제자들에게 횡포를 부리며 괴롭혔다. 견디다 못한 제자들은 하나 둘 연구소를 떠나기 시작했고, 무어와 노이스를 포함한 8명의 연구원들은 독자적으로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기로 결의한다. 쇼클리는 그들을 '8인의 배신자'로 낙인 찍고 맹렬하게 비난하였다. 8인의 배신자들은 군수업체를 운영하던 페어차일드의 투자를 받아 1957년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설립하고 직접 반도체 생산에 나서게 된다.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1만 2000명의 직원을 고용할 정도로 크게 성장했지만, 투자자인 페어차일드의 경영 간섭이 갈수록 심해졌다. 이에 반발한 고든 무어와 로버트 노이스는 1968년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다시 나와 벤처투자자 아서 록의 도움으로 새로운 반도체 기업인 인텔을 설립하게 된다. 인텔에서 이들은 투자자 간섭 없이 독자적인 경영권을 보장 받을 수 있었다. 동일한 방식으로 8인의 배신자들은 인텔 외 65개의 새로운 회사를 창업했는데, 이를 계기로 실리콘밸리는 전세계 반도체 산업의 중심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무형자산, 거인의 어깨, 해방자본
비록 시대는 다르지만, 뉴진스와 8인의 배신자는세 가지공통점을 가지고있다. 무형자산이 핵심 생산 요소인 산업에 속해 있다는 점, 해당 산업에서 큰 족적을 남긴 거인과 같은 선배 밑에 들어가실력을 키웠다는 점, 그리고 선배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해방자본을 제공할 투자자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토지나 공장 설비가 생산의 핵심 요소인 농업 또는 단순 제조업과는 달리, IT 산업과 엔터 산업에서는 기술과 노하우를 기반으로 한 무형 자산이 핵심 요소이다. 유형 자산이 중요한 산업에서는 토지와 공장을 소유한 경영자가 권력을 쥐고 고용된 직원들의 보상을 좌지우지 하기 쉽다. 반면 무형 자산이 중요한 산업에서는 기술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말과 글로 구체화하기 어려운 노하우를 습득해 독창적인 시도를 할 줄 아는 직원이 오히려 고용주보다 유리한 위치에 선다. 자신이 요구하는 조건을 회사가 들어주지 않을 경우, 머리 속에 저장된 기술과 노하우를 들고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쪽으로 가버리면 그만이다. 따라서 주도권은 경영자가아닌 창의적인 엔지니어, 발명가, 예술적 몽상가에게로 옮겨간다.
8인의 배신자들은 천재 물리학자이자 반도체 칩의 핵심 부품인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쇼클리의 제자였다. 그리고 쇼클리가 세운 연구소에서 일을 하며 반도체 관련 지식과 노하우를 쌓았다. 그러다 쇼클리를 '배신'하고 새로운 회사를 설립해 첨단 기술을 사용한 반도체를 생산하여 부와 자율권을 쟁취했다. 뉴진스는 세계적으로 대성공을 거둔 케이팝 그룹 BTS를 키운 하이브 계열 소속사의 연습생이었다. 데뷔 이후 BTS가 성공한 방식과 노하우를 따라 빠르게 성장하였으며, 하이브가 구축한조직과 네트워크를 활용해 순식간에 글로벌 팬을 확보할 수 있었다.그리고 이제 하이브로부터 배운 프로듀싱, 마케팅, 수익 창출 노하우와 열성적인 글로벌 팬덤이라는 무형 자산을 통째로 들고 나가 독립하여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려하고 있다.
뉴진스와 8인의 배신자들이 '배신'을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배경은 그들에게 자본을 기꺼이 투입할 용의가 있는 투자자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8인의 배신자들이 쇼클리의 연구소를 나와 회사를 설립할 때는 군수업자 페어차일드가 자금을 댔고, 무어와 노이스가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나와 인텔을 설립하려 하자 벤처투자자 아서 록이 도움을 주었다. 뉴진스의 경우에도 여러 상장사의 이름이 잠재적인 투자자로서 거론되고 있다. 투자자들은 이들이 보유하고 있는 무형 자산의 가치를 알아보고 향후 지분 가치 상승을 통해 얻게 될 수익을 기대하며 기꺼이 거금을 투자한다. 저널리스트 세바스찬 말라비는 저서 <투자의 진화>에서 이와 같은 해방자본의 시대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957년의 반란은 처음에는 모험자본이라고 불리던 새로운 형태의 금융 덕분에 가능했다. 이 자본은 기존의 은행 대출을 받기에는 너무 위험하고 가난하지만, 대담한 발명을 좋아하는 투자자들에게 엄청난 수익을 제공할 가능성을 약속하는 기술자들을 후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마도 8인의 반란자들이 설립한 페어차일드 반도체에 대한 자금 지원은 서부해안에서 일어난 이러한 모험의 첫 번째 사례가 될 것이고, 이것이 이 지역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이제 주도권은 아티스트에게 넘어간다
현재 케이팝 엔터 산업의 생산 방식을 보면, 거대 소속사가 수많은 연예인 지망생 중 일부를 연습생으로 선발하고, 다시 연습생들 중 극히 소수를 지명해 아티스트로 데뷔시키는 구조로 되어 있다. 소속사는 아티스트 양성에 많은 자원을 투입하는 대가로 아티스트 선발과 육성 방식, 데뷔 컨셉 등 전반적인 방향성에 대한 주도권을 갖는다. 그래서 아티스트의 의견이나 대중의 선호보다는 매니지먼트의 취향과 의도가 더 큰 비중으로 반영되기 쉽다. 또한 소속사는 투자한 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아티스트와 7년 간의 전속계약을 체결하고 각종 공연, 행사, 음반 발매, 방송 출연을 추진하여 이익의 큰 몫을 챙긴다.
이런 방식은 몇 가지 문제가 있다. 과연 이런 탑다운 방식으로 소속사가 대중의 다양한 취향을 모두 충족시켜줄 수 있을까. 아무리 뛰어난 제작자가 대표로 있는 소속사라 하더라도 모든 잠재적 대중성을 다 알아볼 수는 없다. 아이유를 놓친 JYP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리고 설사 대중성 있는 아티스트를 발굴하고 육성하여 데뷔 시켰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아티스트의 의견이 소외되는 게 맞을까. 아티스트는 그저 매니지먼트의 지시대로 따르는 인형 같은 존재에 불과한걸까. 고객인 대중과 가장 친밀하게 소통하고 퍼포먼스를 실제로 행하는 주체는 아티스트인데, 그렇다면 아티스트가 지시하는 방향이 주가 되고 매니지먼트의 의견은 보조적인 역할에 머무르는 게 맞지 않을까. 이제 대중이 원하는 건 주체적이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생각대로 행동하는 아티스트이지, 매니지먼트가 짜놓은 각본대로 연기하는 멍텅구리가 아니니까 말이다.
유튜브를 통해 소속사의 간택 없이도 '데뷔'하는 수많은 크리에이터처럼, 케이팝 아티스트들도 이제 더 이상 소속사의 노예가 될 필요가 없다. 마치 스타트업처럼 시작하여 본인이 향후 발생할 이익의 큰 몫을 우선 확보하고, 나머지 지분을 조금씩 떼주는 대가로 매니지먼트의 도움을 받는 게 시대의 흐름에 맞다. 그렇게 성공한 아티스트가 수 십, 수 백억이 아니라 수 천억, 수 조원의 인센티브를 챙길 수 있어야 전 세계적으로 뛰어난 인재가 유입되고 자금이 몰려들면서 산업이 지속 성장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다. 마치 미국의 실리콘밸리나 영국의 프리미어리그처럼 말이다.
누군가는 뉴진스의 '반란'을 두고 '돈을 밝혀서' 라고 비난하겠지만 뉴진스가 원하는 건 돈을 포함한 그 이상의 것이다. 창조적인 활동에서 주도권을 쟁취하는 것. 누구와 일할지, 어떤 방식으로 일할지, 또 어떤 환경에서 일할지 결정하는 건 매니지먼트가 아닌 아티스트가 되어야 한다. 이런 움직임은 뉴진스에서 끝나지 않고 앞으로 계속해서 여러 아티스트들로부터 나올 것이다. 그리고 수 천억, 수 조원의 부를 얻은 아티스트가 또 다시 독자적인 소속사, 투자회사를 세워 자신의 스타일과 맞는 후배들을 길러낸다면 케이팝 시장의 다양성과 역동성이 증대되는 선순환이 일어날 수 있다. 반대로, 만약 현재 기득권인 거대 소속사가 그들이 가진 힘을 총동원하여 이런 움직임을 진압하는 데 성공할 경우, 케이팝 엔터 산업은 잘해봐야 딱 현재 수준에 머물며 더 성장하기 어려울 것이다.
실리콘밸리를 사실대로 정의하는 것은 여유로운 창의력과 금전적 야망의 결합이었다. 바로 이것이 실리콘밸리가 자유로운 상상력의 나래를 펴서 사회와 문화를 형성하는 기업을 창출하는 곳이 되게 했다.
꼰대에서 개저씨로
역사는 돌고 돈다."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라고 기성 세대의 억압적이고 따분한 문화를 '꼰대'라 비판하면서 반항적이고 자유분방한 문화를 전파했던 이들. 딴따라, 잡주 취급을 받으면서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 케이팝 엔터 산업을 개척하고 글로벌 경쟁력을 가진 거대 소속사를 소유하게 된 이들. 그들이 이제 자신들 영향력 아래에서 성장한 아이들의 반란을 목도하고 있다. 자신을 '개저씨'라 일컬으며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 취급을 하니 참 당혹스럽다.
억울해 할 필요는 없다. 지금 반란을 일으킨 아이들 역시 큰 족적을 남기고 거인이 되면, 그 아래에서 자란 아이들이 그들을 또 어떤 무엇인가로 호칭하고 비난하면서 반란을 도모하는 장면을 보게 될 테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물은 고이지 않고 계속 흐르며, 산업은 신선한 활력을 얻기에 지속적으로 혁신하고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게 바로 인류가 진화해온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