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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주 May 07. 2024

당신 여행은 어때요?

『열하일기』_책 읽는 마음


"하늘엔 온통 별이 총총하다. 손을 뻗치면 그냥 닿을 것만 같다."

- 『세상 최고의 여행기 열하일기』上, 55쪽, 박지원


경자년 경진일, 그러니까 1780년 7월 4일엔 밤새도록 비가 왔습니다. 하여 박지원과 일행은 청나라 황제를 찾아가는 일정을 하루 더 지체하게 되었습니다. 


전설처럼 말로만, 제목으로만 들어오던 『열하일기』를 고미숙, 길진숙, 김풍기 선생이 엮은 본으로 드디어 읽어보았습니다. 

박지원이 풍채 좋은 호걸상이었다는 것, 우울증을 겪었다는 것, 우울의 세월 끝에 중원대륙을 유람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 그리하여 그 길 위에서 날마다 날씨가 어떠하였는지, 무엇을 보아 어떤 생각을 하고 누구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를 기록한 활자에 순도 100%의 설렘과 진중을 함께 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죄인에게 형벌을 집행하는 자를 군뢰라 불렀는데, 단촐해야 효율적일 사절단에 이들까지 포함되었다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생각해보니 황제에게 선물할 귀중품을 지니고 이역만리를 이동해야 했으니 규율을 엄히 지키는 분위기를 만들 필요가 있었을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박지원의 눈에 띄고 말았습니다. 이 군뢰가 지체 높은 분의 호령을 듣고도 일부러 못 들은 체하는 것이요. 부르는 동안 구시렁거리다 10번쯤 불렀을 때에야 처음 들은 것처럼 큰 소리로 대답하고 곤장을 들고 뛰어가더라나요? 사람이 사람을 벌하는 일의 난처함, 참으로 곤란했던가 봅니다. 


"조심히 가십시오. 늦더위가 워낙 심하니 부디 설익은 열매와 찬 음료수는 들지 마십시오." 165쪽 

여행길을 잇느라 단지 하룻밤 묵었을 뿐인데 그 연을 소중히 여긴 청나라의 한 집주인은 사절단의 무사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헤어지기 전날 밤, 박지원의 사주를 묻고는 그 기운에 맞춤한 기도로 무탈을 바라줍니다. 

명나라를 치고 황국을 세운 청나라와 그들을 오랑캐로 여겼던 조선. 양국의 치열한 기싸움과 눈치전쟁이 어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에는 따듯한 정이 가득합니다. 


'손바닥에 손가락을 세운 듯, 연꽃이 반쯤 피어난 듯, 하늘 끝 여름 구름인 듯, 빼어난 산봉우리를 도끼로 깎아 놓은 듯'한 봉황산을 보며 박지원은 조선의 도봉산과 삼각산을 자랑합니다. 높기는 봉황산이 높으나 빛과 기운은 우리의 산들이 더하다고요. 

하지만 우리의 것이 모두 빼어나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조선 선비들의 수동적이고 관습에 틀어박힌, 확장하지 못하고 성장하지 못하는 배움의 자세를 꾸짖기도 하는데요, 문장들을 읽으며 저의 외국여행이 떠올랐습니다. 


때는 스물한 살을 맞던 겨울. 자칭 어른이 된 지 1년, 세상사 알만큼 안다고 착각한 잘난척 시절을 보내고 난 뒤의 겨울이었습니다. 가진 돈, 번 돈 모두 긁어모아 백만 원을 마련해 친구와 함께 태국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여행을 어떻게 즐겨야하는지 알지 못했던 저는 덥고 습하고 욕심만큼 깨끗하지 않은 환경에 지치고 짜증이 나있었습니다. 잔뜩 인상을 쓰고 제 시간에 도착하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백인의 중년 여성 둘이 옆자리에 와 앉았습니다. 잘난척 시기였던 지라 영어 좀 써보려 말을 걸었고 몇 마디 대화를 하다 그만... 

  "안녕. 어디서 왔어요?"

  "독일이요. 당신은?"

  "남한이요. 여기 너무 덥고 끈적이네요. 버스도 너무 안 오고요. 당신 여행은 어때요?"

  "Beautiful!"

창피하고 부끄러웠습니다. 


백인들은 유럽만 여행하는 줄 알았습니다. 하얀 백사장에 파라솔 펴고 앉아 칵테일을 마시며 에메랄드빛 바다를 감상하는 게 그들의 여행이라 생각했습니다. 동남아의 타는 듯한 태양을 눈부시다 말하고, 누추한 정류장 낡은 의자에 앉아 늦어지는 버스를 기다리는 것을 여유로 즐길 거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협소한 관념 안에서 살아왔던 저는 그들의 행복한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습니다. 불만으로 가득 차있던 저의 찌그러진 눈코입을 이제와 갑자기 활짝 펴도 되는 건지 무안했습니다. 


고미숙 선생은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흔한 여행기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질적인 대상들과의 뜨거운 접속의 과정, 침묵하고 있던 말과 사물 들이 살아 움직이는 발굴의 현장, 예기치 않은 담론들이 범람하는 생성의 장'이라고 말합니다. 


이제는 저도 그 비슷한 여행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낯선 것을 새로워하고, 전에 없던 생각과 상상을 한껏 뻗어내는 그런 여행을 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앞으로도 또, 여러번 또 배워나가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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