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우주 May 18. 2024

인정사정 볼 것 없다_『현명한 투자자-해제』




"무엇을 채택해야 하는지, 즉 채택법보다는 무엇을 배제해야 하는지, 즉 배제법이라는 관점으로 투자할 종목을 선정하라고 조언하고 있다."

- 『현명한 투자자-해제』 16쪽, 신진오



나는 늘 오호라! 하는 영감이 탁! 떠올라 일필휘지로 글을 촤라락 써내려가...지 못한다. 


새하얗게 비어있는 화면에 없던 활자를 찍어 단어를 써넣고 문장을 만들고 문단을 엮는 것은 퍽 막막한 일이다.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을 텐가 혹은 기가막힌 소재를 가져다 어떻게 뻔한 스토리로 망가뜨려놓을 것인가, 그런 생각을 일단 한다. 

아무렴 어때. 무궁무진한 나의 가능성을 알아봐줄 묘령의 편집자를 염두에 두고 쓰는 글도 아니고 (어디 계신가요!) 백만 구독자를 향해 쓰는 것도 아닌데. (백명 구독자가 봐주시는 그 날까지!) 

나는 내 글을 쓰겠어! 실력 대신 호기를 가득 채운 채 몇 자를 적어넣다보면 어느샌가 주저리주저리 문장들이 달라붙는다.


진짜 실력은 여기서부터. 

기껏 불러낸 문장들의 일부를 (어쩌면 전부를) 얼마나 잘 잘라내느냐가 좋은 글을 만들어내는 진짜 능력이다. 그것의 어려움은 불필요함의 기준을 세우는 것에도 있지만 합격인지 불합격인지 갈라내는 객관적인 냉철함과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매의 눈을 갖추어야 하는 데에 있기도 하다. 


살아가면서 맞게 되는 걱정과 고민과 불안의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MBTI를 떠올리는 것보다 조각가로의 빙의가 필요한 듯 하다. 필요한 것을 더 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않아도 되는 것, 불필요한 무엇을 쪼개내는 작업.  


어제는 금요일이었고 퇴근 후 밖은 깜깜한데 부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저녁 늦게 미안하지만 자신도 사장님에게 지금 막 전화를 받았노라고, 새로운 사업을 하고싶어지신 모양이니 관련 내용을 정리하고 추진방안을 제시하는 보고서를 만들어야겠다고, 오늘 아침까지. 


오늘은 봄 중 토요일. 내가 원하는 건 잔잔한 마음으로 하루를 평안히 보내는 것. 긴 악몽 끝에 깨어나 정신없이 뛰는 심장을 가엾이 여기며 내가 해야하는 것은 품어봐야 소용도 없고 상황도 바꾸지 못할뿐더러 심장만 더 자극하는 감정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 담담히, 그것들을 잘라내는 것.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앉아 보고서를 만들었다. 무얼 써야 하나 눈 몇 번 꿈뻑이다 관련된 자료들에 있던 키워드들을 적어넣자 이내 한 꼭지씩 만들어졌다. 죽 늘여써놓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없어도 될 만한 것들, 없는 것이 외려 나은 것들을 지웠다. 사장님에게 이 모든 정보가 필요한 게 아니야. 많이 알게될 수록 많이 하고 싶어하실걸?

사장님, 다른 건 다 필요없고요, 우리가 할 수 있을 법한 건 이 세 가지고요, 그 중 우리가 해야하는 건 바로 이것 하나입니다!

이만하면 보고서답구나. 멈추었다. 필요 이상으로 공을 들이는 것도 잘라내야 할 일.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나는 오늘 하루를 이렇게 보냈다. 

소용없어서 불필요한 분노와 화를 잘라냈다. 과해서 불필요한 보고의 문장들을 잘라냈다. 이 일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고민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칼질을 하는 중이다. 계속해서, 도려냄의 장인이 될 때까지. 

작가의 이전글 (책) 냄비뚜껑 사용법_『나의 누수 일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