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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주 May 15. 2024

(책) 냄비뚜껑 사용법_『나의 누수 일지』



"냄비에 상한 찌개가 있는데, 그걸 처리할 엄두가 안 나면 뚜껑을 덮으면 된다."

- 『나의 누수 일지』 53쪽, 김신회



나쁜 마음 먹었던 것 반성한다.


나는 타고 나기를 빠르게 달리지 못하는 사람으로 태어났다. (100m를 23초에 뛴다) 달리기 자체를 못 하는 것으로 알고 40년을 살다가 작년 봄, 안 빠르게 달리는 건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새벽 달리기를 하며 몸도 마음도 건강해졌다. 밥을 잘 먹게 됐고 스트레스 역치도 높아졌다.

인간들이 아직 침범하지 않은, 초록 생명들이 내어주는 산소를 폐 깊이 들이마시면 (진짜 맛있다!) 뛸 때마다 새 사람이 된다. 계절의 바람이 바뀔 때면 작은 새가 예쁜 음으로 지저귀고 꽃나무 이파리가 눈부시다. 오늘 하루 건강하게, 즐겁게, 반듯하게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에 든다. 좋다.


그런데 그건 내가 달리고 싶은 속도로 달릴 때의 이야기다.

이번주 일요일, 달리기 동호회의 릴레이런 대회가 열린다. 8명이 한 조가 되어 한 명당 3km 씩을 릴레이로 달려 13개 조가 승부를 겨룬다.

동호회 사람들로 말하자면, 오, 그들은 한 떼의 야생마 무리. 다다다다, 발소리만으로도 멋이 흘러넘친다. 하우스 노새 정도 될까말까 하는 나는 구경이나 가보려고 했건만. 빠른 사람, 느린 사람 과학적으로 섞어 모든 조의 평균 실력을 맞출 거라는 꼬임에 넘어가 그만... 7조의 러너가 되고 말았으니...


왜 한다고 했을까. 왜 그랬을까. 이렇게 느린데 어쩌자고, 어쩌자고.

'과학적'으로 통계된 러너들의 페이스 기록을 보고 좌절했다. 꼴찌야 꼴찌. 내가 꼴찌야. 우리 조 어떡할 거야. 나 때문에 우리 조 어떡하냐고...


7조의 러너들은 파이팅을 외치며 대회날까지 최고의 기량으로 끌어올리자 다짐들을 주고 받았다.

"제가 관건이에요." 내가 꼴찌라는 사실을 조원들에게 다시 한 번 주지시키며 나를 어느 순서에 둘 지가 큰 문제 아니겠느냐 물었다. 조장은 고민했고 결국 내가 첫주자가 되었다. "뒤에서 어떻게 해볼게요." 네... 정말 미안합니다...


대회가 다가올수록 도망치고 싶어졌다. 다쳤다고 할까, 그 날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할까. 오만가지 생각을 다 했다. 그렇지만 느리더라도 뛰는 것이, 뒤뚱거리더라도 나의 3km를 뛰어 다음 주자에게 바톤을 연결해주는 것이 조원들을 위하는 길이라는 게 너무나 명백했다.


어젯밤, 7조의 마지막 주자, 나의 느림을 과학적으로 상쇄해주는 최고 빠른 엘리트 러너가 다급히 단톡방에 메시지를 띄웠다. "죄송합니다. 제가 어제 마라톤 대회에 나갔다가 엄지 발톱이 들렸어요. 일요일까지 발톱이 새로 나지 않을 텐데 어쩌죠."


오, 하느님! 저에게 냄비뚜껑을 내려주셨군요!

"안 아픈 게 우선이죠. 대회는 신경쓰지 마시고 얼른 회복하세요." 조원들이 올린 답을 보며 슬며시, 아니 화알짝 웃고 말았다. 고마워요, 엘리트님. 제 손으로 차마 못 덮었던 뚜껑을 이렇게 한 방에 덮어주시는군요. 미안합니다. 좋아해서 미안합니다. 정말 좋아하는 중이랍니다.


다음 날 새벽, 모처럼 마음 편히 뛰었다. 시간 단축 압박 없이 바람을 즐기며, 곁을 지나치는 나무며 들플이며 가로등까지 모든 것을 만끽하며 즐겁게 달렸다. 마음이 편해서일까. 회사에서도 편안했다. 화나는 것도 없었고 커피도 맛있었다. 그리고 다시 맞은 밤, 단톡방에 엘리트님의 메시지가 떴다.


"병원 가서 발톱 뽑고 편한 러닝화 신고 뛰어봤더니 괜찮아요! 일요일에 최상의 컨디션으로 달리겠습니다!"


아... 다행이네요... 그래도 안 아픈 게 우선인데... 안 뛰시는 게...


하. 아무래도 냄비뚜껑은 이렇게 쓰는 게 아닌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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