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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주 May 26. 2024

패배자의 승리기_『강신주의 장자수업 1』



"오히려 패자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한 좋은 출발점에 서 있게 되죠."

- 『강신주의 장자수업 1』 29쪽, 강신주



이우주! 이우주! 와!!!!!

150명이 좌우로 도열해 두 팔을 높이 들고 내 이름을 외쳤다.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왜? 내가 릴레이런 첫주자들 중 꼴찌로 들어왔으니까.



동호회의 봄 축제로 릴레이런이 열렸다. 한 조에 8명. 1명이 3km씩을 이어 달리는 대회에 15개조가 출전했다. 이제 고작 1년 즈음을 달렸을 뿐인데다 타고나길 느린 발이어서 당연히 안 뛸 생각이었는데 훈련부장님의 '모든 조의 평균속도를 비슷하게 맞춘다'는 회유에 홀랑 넘어가버렸다.

매일 후회했다. 대회가 가까워질수록 점점 더 크게 후회했다. 각 조마다의 주자 순서가 공개되고 그들의 최고 페이스 기록이 떴을 때, 하! 내가 아주 미쳤구나, 이 야생마처럼 달리는 사람들이랑 달리기를 하겠다고 내가...


대회 조별 미션이 있어 모월모일 새벽에 다같이 모여 뛰고 인증사진을 찍기로 했다.

나로 말하자면 고3 시절에도 스스로 일찌감치 일어나 아침 먹고 커피 마시고 신문까지 보고 학교에 갔던 인간이다. 늦잠?그런 거 해본 적 없다. 그런데 이 날, 밤새 달리기 악몽에 시달리던 나는 집합시간인 5시 30분에 눈을 뜬 것이다. 달리기도 못하면서 지각까지 하고 평일 새벽에 바쁜 사람들 기다리게 하고... 내가 미쳐가지고.


일주일에 네 번씩 새벽마다 열심히 뛰었다. 3km를 내 딴에 가장 빠르게 뛰어보려고 보폭을 늘려봤다 좁혀봤다가, 웜업을 안 해봤다가 500미터만 해봤다가 1키로를 해봤다가, 전 날에 연이어 달려봤다가 하루 쉬고 달려봤다가, 뛰기 전에 꿀 한 숟가락을 먹어봤다가 안 먹어봤다가...


"우주님,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재밌자고 뛰는 건데요, 뭐." "제가 더 빨리 뛰어볼게요. 우주님은 마음 놓으세요." "다른 조도 뒤에 느린 사람 있어요. 괜찮아요."

착한 조원들의 진심을 알면서도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문제아 같았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조원이었더라면 우리 조는 정말 재밌자고 뛸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때문에, 나여서' 이런 생각들로 마음이 굳어갔다.



D-1.

막상 출전의 날이 닥치차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속도를 끌어올리려 뭘 더 해볼 시간도 없었고, 부담 갖지 말라는, 순위에 연연하지 말자는 조원들의 말들도 믿기로 했다. 그렇게 대회를 맞았다.


첫번째 주자들이 스타트 라인에 섰고 150명이 외쳤다. 5, 4, 3, 2, 1, 출발!

알고 있었다. 내가 가장 늦게 뛸 거라는 걸. 그래도 다른 주자들이 시야에 있을 줄 알았다. 이렇게 확연히, 그들의 꽁무니가 내 눈에 전혀 보이지 않을 만큼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보면서 쫓아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래도 나 잘 뛰었다. 그동안 새벽 연습을 하며 죽을둥살둥 뛰어도 3km를 뛰는 데 18분이 걸렸었는데 이 날, 릴레이런에서는  무려 15분(59초!)만에 골인했다. 같이 출발한 사람들로부터 아주 뚝 떨어진 저기 멀리에서 뛰었지만 오버 페이스 되지 않도록, 그러면서도 평소보다는 조금 빠른 속도를 유지하며 잘 뛰었다. 잠깐, 지름길로 가로지르고 싶은 욕망이 욱욱 솟긴 했다. 이렇게 차이나게 꼴찌로 들어가는 게 창피하기도 하고, 남들 다 떠난 뒤 홀로 오래 서있을 우리 조 2번 주자한테도 미안하니까 지름길을 가로지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당겨진 기록을 우리 조 누구도 원치 않을 테고, 나도 평생을 두고 후회할 테니 그냥 묵묵히, 열심히 뛰었다.

다른 주자들이 바톤터치 라인에 들어섰는지 저 멀리에선 환호가 터졌고 나는 마지막 오르막길을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오르막길 끝, 그 끝에 조원들이 나와있었다. "파이팅!" "잘 하고 있어요!" "다 왔어요!" 하... 저 사람들 왜 저렇게 착한 거야. 이러면 곤란하다고요, 내가.


골인 지점에 들어섰다. 사람들이, 150명의 그 모든 사람들이 꼴찌주자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팔을 높이 흔들며 환영하고 환호하고 사람 환장하게 열렬히 응원해주었다. 이럴 땐 어떤 표정을 짓는 거지? 웃어? 이 악물어? 바톤을 넘겨주고 털썩 주저앉았다. 여기저기서 고생했다는 말, 멋있었다는 말 그리고 포카리스웨트가 가듣가득 내게로 왔다.


내가 이렇게 망쳐놨음에도 우리 조는 마지막 주자가 2위로 들어왔다. 한참 뒤 "마지막 조 들어와요! 다같이 응원해주세요!"하는 운영진의 알림에 모두가 골인라인으로 모였다. 조금 뒤 마지막 주자가 얼마나 열심히 뛰었는지 시뻘게진 얼굴로, 죄다 흐트러진 폼으로 헉헉 거리며 나타났다. 우리는 외쳤다. 그의 이름을. 온 마음으로, 각자의 힘을 전해주려고 그의 이름을 크게, 아주 크게 외쳤다. 몇몇은 커다란 동호회의 깃발을 들고 그의 뒤에서 옆에서 함께 뛰어주었다. 첫번째 순서 첫번째 주자가 끊었던 골인 라인을 마지막 순서의 마지막 주자가 다시 끊었다. 그렇게 릴레이런이 끝났고 150명 모두가 박수를 쳤다.



"패자라는 절망을 딛고 꿋꿋하게 살아가다 보면, 생존과 경쟁의 가치 외에 삶의 다른 가치가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 29쪽


『강신주의 장자수업 1』을 읽으며 이 부분만큼은 동의할 수 없다며 밑줄 그어두었던 문장을 그날 밤 떠올렸다. 꼴찌를 했고, 공황장애와 광장공포증과 사회불안증으로 사람 많고 소란스러운 곳을 이겨내기 어려워함에도 이 날 내가 얼마나 즐거워했고 많이 웃었고 기운 찼는지 말로 다 할 수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 문장에 두 손 든 것은 아니다. 다만, 패배가 생각만큼 잔혹하지많은 안다는 것, 그러니 미리 겁에 질려 있을 필요 전혀 없다는 것, 패해도 내 곁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 어쩌면 승했을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더 진실한 마음으로 내게 있어주는 지도 모른다는 것, 꼴찌였으니 달것기를 그만두는 것이 아니라 다시 달릴 수 있도록 어서 다음 날 새벽이 와주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는 것을 내가 알게 되었다는 것 정도는 말해두고 싶다.


내년 릴레이런에서는 한 명쯤은 제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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