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관자놀이가 쪼깨지는 통증에 놀라 잠에서 깼어. 그저께 더 쉬지 않고 내리 단편소설들을 읽은 탓인 것 같아. 한 때는 모든 조각시간마다 무언가를 하는 것이 내심 자랑이었는데 쉬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게 자랑은 아닌 것 같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배우고 익혀야 하다니, 나 잘 살아온 거 맞니?
한 편의 소설마다 하나의 혹은 그 이상의 세계가 담겨있다면 나는 그제 적어도 아홉 개의, 아니다, 내 본래의 것까지 열 개의 세계에 머리를 담가두고 있었어. 어떤 세계들은 강렬하게 또 어떤 세계들은 뭉근하게 남아 있어. 머릿속 이곳저곳에 눌러앉은 잔상들을 모두 걷어내면 두통이 깨끗해질 수 있을까.
김연수 작가의 <진주의 결말>은 시작부터 불안했어. 스릴러는 커녕 미스테리 소설에도 스트레스를 받는데 화자가 범죄심리학 교수였으니 범죄자와 밀고 당기는 서사의 전개가 조금 힘이 들었어. 그만 읽어야겠다고 마음먹는데 이런 구절이 나타났어.
"우리가 달까지 갈 수는 없지만 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는 있다고, 마찬가지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고."
달까지 간다는 건 무엇인지, 그럴 수 있다는 듯 걷는 것은 또 무엇인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어.
나는 지금 달을 향해 있기는 한 걸까, 생각해보다가 스물네 시간을 두통에 짓눌리고 있으려니 달 따위, 꼭 그것을 향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꼬운 마음도 드는 중이야. 하지만 달은 누가 뭐래도 예쁜 거니까. 아름다움에 등 돌리고 걷는 것은 심술만 끌어안은 미련 같아 영 별로인 것 같기도 해.
결국, 희망이 삶을 추동하는 원동력이라는, 너무나 식상해 멋져보이지 않는 명제를 인정해야 할까봐. 희망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듯 걸었던 의연함이 필요했던 때가 내게도 분명 있었으니 말이야. 깨끗이 인정할 테니 누가 이 두통 좀 거둬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