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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필 Feb 25. 2024

[가족] 나의 살던 우리 집 이야기 10


집은 백수에게 더욱 중요한 존재다. 집을 나가서 딱히 갈 데가 없다는 것.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이 만큼 비참한 일도 없다. 어디 아픈 데도 없고 사지 멀쩡하고 놈이 말이다. 그러니 세상 밖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고, 내가 거리를 걷는 것, 내가 어느 건물에 들어서는 것, 내가 누구를 만나는 것 등 모두 다 죄스럽고 뭔가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은 커져만 갔다. 세상은 나의 세상이 아니라 남의 것이었고 나는 그저 눈치 보며 빌붙어 사는 처지로만 보였다.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저 여동생이 주는 용돈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처지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세상과 떨어져 나만의 숨을 쉬며 살기엔 집 만한 것이 없었다.


자격시험에 합격을 했지만 앞날은 여전히 막막했다. 이래서들 사법고시니, 행정고시니, 회계사니, 변리사니 공부들을 하는 거였다. 1년을 그저 이리저리 부대끼며 허송세월만 한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은 더욱 나를 짓눌렀다. 소중한 2년 중 1년을 보냈는데 앞이 안 보이니 어둠은 더욱 짙어져만 가는 듯했다.


그래도 작은 성공이라는 소기의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목표는 달성했지만 그냥 거기까지였다. 취미삼아 한 거라면 가볍게 또 다른 목표를 찾아 해 보면 되겠지만 시간이 경과함에 따른 불안감이 가미된 상태에서 새로운 목표를 찾아야 했다.

자연스레 또 다른 보험 관련 자격시험을 준비했고 그 역시 보장된 삶은 없고 막연한 기대감으로 그저 다른 할 게 없으니 하는 것에 불과했다. 이제 두 번째 자격증 준비이니 별로 어렵지는 없었다. 나도 어느 정도 보험의 이론적 원리는 대략 이해했던 모양이다.


이러한 현실에 내가 의지할 만한  ‘지푸라기’라고 생각한 것은 실무수습 과정이었다. 나는 시험 공부를 하면서 정말 가고 싶은 회사가 있었다. 실무수습을 신청하면서 1 지망으로 나는 그 회사를 지목했다. 자격증을 관리하던 당시의 ‘보험감독원’은 내가 신청한 대로 그 회사를 지정해 줬다. 그 회사에는 학원에서 공부할 때 봤던 회사원들도 몇 명 있었다. 2~3달에 한번 정도 일정한 리포트를 작성해 제출하기 위해 회사를 방문해야 했다. 나는 이 회사에 입사하는 게 이제 꿈이 되어 버렸다. 제발.. 제발.. 여기서 내가 공부한 해상보험을 가지고 일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과거에 대한 회한이나 콤플렉스를 털어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실 돌아보면 정말 지긋지긋하게 나를 따라다녔다. 다 내가 만든 것이지만.


나는 여동생이 아침마다 내 방에 놓고 가는 3천 원으로 하루를 살아야 했다. 학교 도서관까지 교통비 하고 커피 먹고 담배 먹고 점심 먹고 땡이었지만 그건 너무도 소중한 돈이었다. 도서관에서 공부를 할 때도 이번엔 작년과 달랐다. 짙어진 어둠을 어찌 헤쳐 나가야 할지.. 이젠 시간이 없다는 생각에 조바심까지 생겼다. 해결책은 그냥 공부하는 것. 자격증 두 개를 따고도 들어갈 회사가 없다면.. 일단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보험 공부는 여유가 생겨 이제는 토익도 시험 삼아 보기도 하고 유사한 자격증을 둘러보기도 했지만 딱히 해결책은 없었다.

공부하다 머리를 식힐 겸 산악부에 가서 선후배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삶이 있었다. 나랑은 다른. 선배들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들은 백수가 아니었다.


한 번은 너무 배가 고팠다. 배가 고프다고 생각하니까 더더욱 배가 고팠다. 산악부에 갔더니 아무도 없었다. 나 혼자라고 생각하니 미칠 듯이 배가 고팠다. 누구한테 연락해서 밥 사달라고 하려다 보니 너무 비참하다는 생각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배가 고프니 그럴 용기마저 없어졌다. 쓰러질 듯 배가 고팠다. 배가 고픈데 우울함까지 밀려와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과거 역사에서 굶어 죽었다는 사람들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냥 교정 어디에 처박혀 굶어 죽어야 하나, 하고 생각했다.

순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침착함을 되찾고 생각해 보니 생각이 떠올랐다. 산악부 모임 때 졸업하신 나보다 10년 위의 형이 학교 앞 호프집에 후배들 쓰라고 10만 원 이상의 돈을 예치해 계산해 놓은 게 생각났다. 나도 졸업한 입장이었지만, 지금 이것저것 따질 일이 아니었다. 더 가다가는 이성을 잃을지도 몰랐다. 살려면 최소한 이 정도의 용기는 내야 했다. 대낮에 호프집 문을 용기 있게 밀고 들어가 사정 얘길 했다. 배가 너무 고프니 먹을 것 좀 달라고. 그때 그 돈을 쓰면 된다고. 비참했다. 주인 내외분은 내 얼굴을 기억하는지 친절하게 오징어덮밥을 풍성하게 만들어주셨다.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그 밥을 깨끗이 먹어치웠다. 나는 다시 살아났다. 과도하게 무너졌던 자존감도 주렸던 배도 살아났다. 감사 인사를 하고 나왔다.

당연히 생명의 은인한테 입사 후 나는 후배들과 함께 이 집은 무조건 갔다. 지금 생각하면 연극 같지만 당시는 실제 상황이었다. 배고픔이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어쨌든 또다시 다른 종류의 보험 관련 시험을 봤고 나는 다시 1차 합격. 2차 시험 준비를 하게 되었다. 이제 보험의 기본은 잡힌 느낌이 들었고 대략 논리의 흐름에 대한 감도 오는 듯했다. 2차 시험까지 합격하면 - 왠지 당시는 합격에 자신감이 있었다 - 나를 쓸만한 보험회사나 손해사정업체를 돌아다닐 생각이었다.

사실 그 해만 해도 IMF 금융위기의 영향이 가시지 않은 때였다. 내가 실무수습을 신청해 놓은 회사에서는 벌써 2년째 신입사원을 뽑지 않고 있었던 것. 뽑는다고 되는 건 아니지만 어디라도 딱히 지원할 만한 데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나는 아직 부족하니 내공을 쌓고 기회를 엿보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은 시간이 있으니. 우선은 두 번째 자격시험 합격이 중요했다.


그러다가 뜻밖에 실무수습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처음 연락된 것은 연초쯤 산악부 동기 통해 구입한 자동응답 전화기를 통해서였다. 휴대전화는 물론 ’삐삐’도 없으니 그냥 하나 마련해 두자고 한 게 중요할 때 역할을 했다. 나보고 출근을 하라는 뜻밖의 전화 음성 메시지. 만사를 제쳐놓고 가야 했다.

그때 자격시험을 하나 더 준비하고는 있었지만 백수 생활도 지쳐가고, 취업의 가능성도 왠지 없어 보여서 시간은 가고 마음은 초조해 진로를 고민하기도 했다. 공부를 하며 증권맨 선배회사에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실무수습 회사에서 백수인 나를 통해 증원을 하고자 설계사 시험을 봐달라 해서 봐주기도 하며 살았지만 나만의 길은 잘 안 보였다.

그러던 중 재학시절 초모랑마(에베레스트) 등반 시 나를 눈여겨보던 옆 팀의 선배로부터 등반팀 합류 제안이 와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 형이 도전하려던 산은 히말라야 8천 미터급 산이었는데 이후로도 많은 시도를 한 것으로 안다. 아예 전문 산악인으로 진로를 바꿔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즈음 전화를 받은 것이다. 사실 그 형은 내가 보험 팔러 형들을 찾아다닐 때 만난 선배 중 한 명이었다. 나의 형편없는 영업력에도 불구 보험 상품을 사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등반가가 되었다. 나는 초모랑마 등반 시 이 형의 선한 심성과 강력한 체력을 선망하기도 했다. 정말 멋진 분이다. 그래도 난 입사를 포기할 수 없었다. 산을 직업으로 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여전했던 모양이다. 등반대에는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전화받고 채 일주일도 안 돼서 출근을 했던 것 같다.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과 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함을 안고 광복절 다음날 회사로 갔다. 이제 더 잃을 게 뭐가 있겠는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지 못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들은 내가 절박하게 취업을 원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나는 아르바이트 신분이었고, 갑자기 퇴사를 하는 직원이 있어 그 자리를 메꾸기 위해 내가 지목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내가 그렇게 하고 싶었던 일이었다.

나에게 정식 직원이 아니라서 미안하다는 식으로 나중에 공채 시 정식 입사하길 바란다며 달래듯 말했지만, 나는 이게 더 좋았다. 내가 일을 할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고 자신감도 없던 터라, 내가 미리 일을 해보고 나서 입사를 시도하게 된다는 것이 나에겐 더욱 맘에 들었다. 잘할 줄 알고 입사시켰더니 엉망이더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았고 남에게 민폐 끼치고 싶지 않은 생각은 그때도 강했다.

그렇게 나는 출근을 하고 일을 시작했다. 남은 자격증의 2차 시험은 포기했다. 회사 적응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기로 결심했다. 그때 난 시키면 시키는 대로 모든 일을 다했다. 팩스정리, 복사, 각종 심부름, 모든 종류의 클레임 업무, 선배 중 휴가라도 가면 대체업무까지. 더불어 술 먹으라면 술 먹고 밥 먹자면 먹었다. 한 번도 내 개인 약속으로 응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또한 나는 일이 너무 재미있었다. 1년 전에 공부한 것으로 실무를 하는데 그렇게 감격스러울 수가 없었다. 뼈가 부서져라 일하고 싶었다.


그러한 나의 일에 대한 진심을 선배들은 조금씩 알아주기 시작했다. 긍정적인 얘기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빈 말(?)을 곧이들을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나도 남들처럼 정식 직원이 되어야 하는데.. 그게 과연 될까. 그들보다 훨씬 적은 월급이었지만 그리고 그걸로도 먹고살기는 충분했지만 평생을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나는 이 회사에 제대로 취업을 해야 했다. 유일한 희망이었다. 더부살이의 삶, 2 지망의 삶, 눈칫밥의 삶, 민폐의 삶도 끝내야 했다. 그렇게 난 정말 열심히 했고, 기회는 왔다.

IMF이후 내가 지원할 수 있는 공채가 있었고, 지원을 하고 합격도 했다. 꿈같았지만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제 한숨은 돌렸다. 그러나 내가 공부한 해상보험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불안함은 여전했다. 이공대생으로서 다른 분야로 간다면 아무것도 못할 것 같았다. 확실하기 전까지 안심을 못하던 나의 노파심은 대단했다. 결국 원하는 대로 부서배치도 받았지만. 나는 아르바이트 신분이 아니라 정식 직원으로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신입사원 연수의 마지막은 금강산 여행이었다. 남북관계는 여전히 좋았고, 내가 금강산 가이드로 활동하려던 그 배를 타고 나는 여행을 가게 된 것이다. 여행 가기 전날, 시골 첫 번째 우리 집에 불이 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금강산 여행은 당연히 취소. 나만 열외가 되어 동기들이 금강산에 갈 때 나는 동생과 시골로 내려갔다. 뭔가 아슬아슬한 상황의 연속 혹은 결정적 순간에 생기는 사고의 연속 같은 느낌이 들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또 뭐가 잘못될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그나마 취업을 하고 나서 이런 사고가 터져 차라리 잘 되었다고 해야 하나? 삶 자체가 살얼음판 같았다.

다행히 어머니도 아버지도 안 계신 상황에서 전기합선으로 불이 났고 다친 분은 없었다. 그래도 30년이 훌쩍 넘은 목조 건물이니 홀라당 다 타버렸다. 두 분에게 정신적 충격이 적진 않았다. 그렇게 나의 첫 번째 우리 집은 없어졌고 그 안에 있던 추억들도 같이 타버렸다. 삶을 리셋하라는 의미일까?


부모님은 동네 이웃이 내어 준 빈 방에서 임시 거주를 하며 겨울을 보냈고, 그 방에는 군에서 주는 이재민용 구호품이 있었다. 나도 회사 동기들의 성금을 받으며, 다가오는 삶의 악순환을 그냥 그저 받아들이기로 했다.

첫 번째 우리 집이 다 타 버린 곳에 아버지는 대출을 받아 조립식 건물을 짓기로 했다. 차라리 잘 되었다며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기로 했다. 그리고 몇 개월 만에 새 집에서 부모님이 살게 되었다.


그래도 어쨌든, 나는 취업이 되었고, 내가 공부한 것으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밥벌이는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걸 단순히 나의 노력과 나의 능력으로 단순화해서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왜 그런지 모르는 일들, 운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그런 거 하나하나 모아져 이런 결과가 되었다. 그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기회, 이 소중한 기회라는 것인데, 이건 어떤 노력으로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나는 그저 운이 좋게 기적적으로 취업이 되었다.

그럼 누구에게 감사해야 하나. 나를 입사시켜 준 회사 임직원? 회사 설립자? 나를 알바로 뽑아주기로 결정하신 분? 나를 좋게 보신 분들? 내게 오징어덮밥을 만들어 주신 분? 아니 그 돈을 예치한 선배? 해상보험을 가르쳐 주신 학원 강사? 그 학원? 아니 더더더 가서 부모님? 조상?


인생 자체가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그냥 세상 모든 일이 운과 관련되어 있고 로또 혹은 재수인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는 그중에 하나를 얻었고 그걸로 먹고 사는지도. 그러니 나는 세상에, 주변에 항상 감사해야 한다. 겸손함을 유지해야 함은 말할 것도 없고. (악필, 2024.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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