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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악필 Mar 16. 2024

[가족] 나의 살던 우리 집 이야기 11

종종 힘든 삶을 회상할 때는 많은 사연들과 많은 불행, 그리고 극적인 일들이 집중되는 시기다 보니 정말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되고 할 말도 많아지게 된다. 그러나 명확한 진실은 그 시간도 다른 어떤 지루한 시간과 똑같이 흘러간다는 것. 그 지나간 세월은 어느새 과거가 되고 현재에 이른 후에는 현재의 삶이 당연한 듯 자연스럽게 적응을 해간다. 과거의 그 복잡한 상황은 이제 그저 과거일 뿐. 그 힘든 과정이 언제 있었냐는 듯이 새로운 삶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기본 전제가 된다.


나는 내가 간절히 원하던 회사의 정식 직원이 되었고, 내가 바라던 일을 하게 되었다. 감사하고 또 감사한 일이어서 어떻게 말로 표현을 못하겠는데, 한편으론 그 감사의 크기만큼 내가 부족한 것이기에 그럴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일종의 콤플렉스라 할 수 있겠다. 다른 동기들처럼 대학 졸업 후 지원해서 사뿐하게 직원이 된 경우에 비해 나는 너무도 처절하게 들어온 것이어서 내가 아직은 이 회사에 제대로 자격이 있는 직원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은 계속 떠나지 않았다. 그들의 사뿐함 이전에 어떤 노력과 처절함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일도 재미있었고 선배들도 좋았기에 신입사원 시절은 즐거운 시절로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인지 한 동안 콤플렉스는 잠시 접어두고 회사생활을 즐길 만은 했다.

더욱이 매달 받는 월급은 말도 못 하게 고맙고 기쁜 일이었다. 나는 이제 동생을 케어할 수 있는 오빠로서의 위치에 서게 되었고 시골의 부모님께도 면을 세울 수 있었다. 나는 돌봄을 받는 존재에서 이제 확실히 가족을 돌봐야 하는 위치로 전환한 것이다.


신입사원 연수가 끝나고 부서 배치를 받은 후 그 달에 첫 월급을 받았는데 미처 예상 못한 금액이라 무슨 돈벼락이라도 맞은 기분이었다. 그에 흥분한 나머지 나는 용산 전자 상가쯤으로 기억하는데 거기서 300만 원이 훌쩍 넘는 노트북 컴퓨터를 덜커덩 사고 만다. 대학 시절 컴퓨터는 정말 부자들만 있는 것으로 알았고 컴퓨터뿐 아니라 인터넷도 대중화가 많이 된 시절에도 내게 컴퓨터는 언감생심이었다. 더욱이 노트북을 들고 다니는 동기들을 보면서 나도 돈 벌면 컴퓨터를 사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과했던지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당시 웬만한 중고차 가격의 NEC노트북을 아멕스 카드로 시원하게 긁었다. 24개월 할부. 그 뒤로 채 두 달도 안되어 부실한 보안의 우리 집에 노트북을 놓고 회사를 간 사이 도난을 맞고 말았다. 방음이 안 되는 우리 집에서 이웃 중 누가 듣고 알았는지 아니면 창문 틈사이로 보이는 노트북이 손에 닿아 충동적으로 도난을 한 건지알 수 없지만 어쨌든 내 노트북은 없어졌다. 20 개월이 넘는 할부금만 고스란히 남긴 채.

나는 아마 이때의 커다란 실망감으로 착실한 돈관리를 위한 멘탈이 무너졌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노트북도 없어지고 그에 대한 돈만 꼬박꼬박 나가는 현실이 싫어 또다시 음주에 심취하게 되었다. 바른생활도 멘탈이 단단해야 되나 보다.


취업을 했다고 해서 집을 바로 바꿀 수는 없었다. 이제야 마이너스 인생에서 플러스로 간신히 밥벌이를 하게 되었다지만, 동생과 나는 이 도시에 자리 잡기 위해 모든 생필품을 하나하나 마련하고 그동안 돈이 없어 못했던 이런저런 인간다운 삶을 위한 일들을 하다 보니 돈 드는 일이 그렇게도 많았다. 특히 시골의 첫 번째 우리 집을 짓기 위해 받은 대출을 갚아야 했고(집 보증금을 아버지가 마련해 줬으니 그리고 취업한 자식으로서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동생에게 생활비 주고, 산악부 후배들에게 술도 사주고. 그리고 회사에서 만난 친구들과 만신창이 되도록 술 먹고 회사 선배들과 술 먹고.. 술 먹고.. 술 먹고..

적금 하나 든 게 재테크의 전부였고, 그 마저도 마이너스 통장과 카드 대출 등까지 감안하면 남는 게 별로 없는 씀씀이였다.

동생은 어느새 직장을 바꿔 서울 시내 신사화 매장에서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있었고, 동생 또한 거친 도시 생활에 적응해 가며 그리고 20대의 갈등과 방황을 달래 가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내가 버스를 타고 회사에 출근하며 서울 중심가로 들어가면서는 마치 도시 개발의 변화를 보는 것처럼 느껴졌고 나의 생활도 빈티가 많은 삶에서 출근하면 부자라도 된 듯 씀씀이가 큰 회사원의 삶이 되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올 때는 그래도 지친 몸을 쉴 곳이니 편안하고 좋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부실하기 짝이 없는 집이었다.


번호키가 없던 시절, 깜빡하고 열쇠를 놓고 갔다가 퇴근을 하고 집에 왔는데 동생도 없고 집에 들어가질 못한 적이 있었다. 날은 너무 춥고 몸은 피곤하고 짜증이 극에 달해 있었다. 더구나 배가 고프면 분노 수치까지 올라가던 시절이라 속으로 늦게 들어오는 동생 욕도 하고 나의 허술함에 짜증이 한참 나있기도 했다. 참다못해 세면실 쪽 창이 없는 창문 구멍으로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2미터가 좀 넘는 높이였는데 다행히 담이었는지 옆집 벽이었은지가 통로 옆에 있어 암벽 타는 실력을 한껏 발휘에 집에 들어갔었다. 그러다 창문에 난 못에 고급 양복바지가 찢어져 울화통까지 터져 버렸었다. 참으로 젊고도 막무가내적인 삶을 살던 시절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차가 막혀 버젓이 서 있는 버스가 - 정류장이 아니어서 - 문 안 열어준다고 버스문을 발로 차 박살 내 버린 일도 있었으니 뭔가 민감하고 화가 많은 시절이었던 거 같기도 한다.


그런 집도 살아온 지가 벌써 4년이 되어갔다. 점점 너무너무 벗어나고 싶은 집이 되어가고 있었다. 백수시절 못 내던 얼마 안 되는 월세는 점점 보증금에서 까여 가고 있었다.

후배들과 산에도 다니고 술도 마시고 했지만 백수 생활을 끝냈다는 축배만 들기엔 현실은 냉혹했고 또 다른 삶에 점점 적응해 나가야 했다. 이제는 나의 삶도 하나씩 돌봐야 했다. 거주 환경의 개선이 절실했다.


입사 후 1년이 지나자 회사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그 대출을 한껏 활용해 새로운 집을 찾기로 했다. 마침 결혼하는 친구가 알아봤던 집을 추천해 줘서 그냥 가서 알아봤다. 기존 집과는 달리 너무 세련되고 깔끔한 집이라 맘에 들었고 젊음을 믿고 과감히 가기로 했다. 기존 집주인이 전세가 안 나간다고 보증금 반환을 안 하고 버티는 바람에 기존 집에는 더더욱 있기가 싫었다. 나는 돈은 나중에 받기로 하고 그냥 이사를 해버렸다.

결국 쌓인 월세도 까고 집 수리비도 까고 집 전세가 나간 뒤에야 거의 반에 반토막이 난 전세금을 받을 수 있었다.


힘든 과거는 결코 추억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할 때다. 미련 없이 던져 버리고 떠나는 걸 더 좋아할 때였다. 나는 동생과 이사 준비를 하면서 최소한의 짐만 챙기고 다 버렸고 다 새로 준비하자 했다. 그게 20대 중반이었고 촌놈끼도 산꾼끼도 안 빠진 때였으니, 사회화가 되고 다른 친구들처럼 정상적인 세상살이를 느끼기에는 아직 갈 길이 먼 때이기도 했다. 그래도 분명히 나는 조금씩 발전된 모습으로 한 단계 올라가고 있었다. (악필, 2024.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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