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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연고 Mar 17. 2024

풍차를 지나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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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 현관을 나가 왼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몇몇 집들 위로 삐죽하게 솟아난 날개의 끝부분이 보인다. 그 날개는 보통은 멈춰있는데, 날씨가 화창한 휴일이면 빙글빙글 천천히 돌아가며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를 반복한다. 1800년대에 만들어진 풍차는, 그렇게 천천히 날개를 돌리며 동화가 있는 풍경으로 나를 한 번씩 이끌어준다.


내 집에서 그 풍차까지 가려면 집 앞 길게 뻗어있는 자전거 도로를 따라가다 짧게 놓인 구름다리를 지나야 한다. 사실 이건 빨강 머리 앤과 다이애나가 만나던 개울가에 놓인 구름다리는 아니다. 대신 내가 지나는 구름다리 밑은 자동차가 흐른다. 구름다리로 이어지는 길은 꽤 가파른 오르막길이기에, 자전거의 페달을 밟을 때 좀 더 긴장해 힘을 주어야 된다. 맞바람이라도 불어올 때는 숨이 차올라 헉헉 대기도 하지만, 다리의 정상을 지나 내리막길로 접어들 때는 그 상쾌한 기분이 가끔은 꿈같을 때도 있다.


꿈같을 때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힘 안 들이고 쉽게 내려가는 내리막길은, 고된 시간 끝에 짧게 맛볼 수 있는 달콤한 휴식을 준다. 꿈같은 기분을 느끼게 되는 또 다른 이유 중 하나는 눈앞에 펼쳐지는 그림 같은 풍경이다.


다리의 정상에서 짧은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왼편에는 하얀 풍차가 위풍당당하게 그 자태를 뽐내고 있고, 정면에는 둥근 타원형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있으며, 그 잔디밭의 가장자리를 따라 꽃들이 줄지어 심어져 있다. 이 풍차는 문화재로 등록된 지역 명소이기에, 그 주변에는 풍차보다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없다. 그러니 넓게 열린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하얀색 몸체와 파랑과 빨강이 조화롭게 배색된 날개를 지닌 풍차는 그 크기와 자태가 위풍당당하고 고아한 아름다움을 뽐낸다.


1800년대에 만들어졌으니 그 풍차를 지나는 시간들 속 풍경은 이미 많은 변화를 겪어왔을 거였다. 최근 들어서 풍차 주변의 빈 공간을 개발할 계획도 활발히 의논되고 있다. 초고층 건물이 주변에 세워지지는 않겠지만, 지금처럼 드넓게 열린 공간에서 혼자 위풍당당하게 자태를 뽐내는 풍차의 모습을 몇 년 후에는 못 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언제든 내가 앞에 서면, 18××년생 풍차가 그 모습 그대로 위풍당당하게 나를 반겨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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