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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애희 Jun 17. 2024

[Book]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_정현주

김환기와 김향안의 러브스토리

도서관 책꽂이 먼지 청소를 하다 내 손길과 내 눈길이 멈 췄다. 무조건반사처럼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책을 꺼냈다.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_정현주

핑크색 겉표지, 초록색 글자들, 빨간색 작은 꽃은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어떤 책일까? 살롱드까뮤 샘들과 나눴던 프랑스와 유럽 이야기들이 생각났다. 그리고 프랑스에 다시 가고 싶어 하던 그녀들이 떠올랐다. 책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제목 하나만으로도 이 책을 빌리기에 충분했다. 집에 와서 책을 펼친 순간, 나는 보물 같은 책을 빌려왔음을 알았다. 다시 한번 겉표지를 봤다. 바로 김환기의 '전면점화'였다. 나는 환기블루의 '전면점화'에 익숙해져 있었다. '블루에서 핑크로 색만 바뀌었는데, 그걸 못 알아보다니!' 하는 생각과 함께 김환기 작가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김환기 & 김향안

(중략)

동림은 변 씨 성을 버리고 남편을 따라 김 씨 성을 쓰기로 한다. 새로 인생을 시작하는 김에 이름도 바꾸었다.

남편 김환기의 아호였던 '향안'을 받았다.

결혼을 통해 변동림은 김향안으로 다시 태어났다.

아호를 아내에게 주었으니 남편은 새로운 아호가 필요했다.

'수화'. 나무와 이야기한다는 뜻이냐고 세상 사람들은 의미를 궁금해했지만 굳이 정해놓은 특별한 뜻은 없었다. 그저 좋아하는 글씨들을 모아 단어로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는 나무와 이야기를 좋아했다.


인생의 제2장이 새로운 이름과 함께 시작되었다.


아내는 남편을 '그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것들을 모아 만든 이름'으로 불렀고, 실제로 남편의 남은 인생을 그가 꿈꾸던 좋은 것들로 채워주었다.


남편은 아내를 '한때는 자신의 것이었던 이름'으로 불렀다. 결혼 이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김환기에게 아내 김향안은 또 다른 자신이었다.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_정현주, p033


Whanki & Hyangan IN PARIS 1957

1957년 파리를 걷고 있는 그들의 사진은 드로잉 작품 속 모습과 같았다.


"나 파리에 가야겠다. 너도 데리고 가지."라고 말을 했는데 놀랍게도 향안은 다음 날부터 프랑스어 책을 사다가 혼자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영특하고도 야무졌던 향안은 한국전쟁이 일어나 부산으로 피난을 갔을 때도 프랑스어 책을 빼놓지 않았다. 전쟁 중에도 공부는 계속되었다.
(중략)
"도대체 내 예술이 세계 수준으로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향안은 긍정적인 사람들이 흔히 그러듯 심플하게 대답하였다.
"나가봐."
어떻게 말이냐고 수화가 되묻자 향안은 이번에도 간단히 대답하였다.
"내가 먼저 나가볼게."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_정현주, p039-040



1955년 멀리 파리에서 처음 성탄절을 맞이하고 있을 나의 향안에게 행복과 기쁨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진눈깨비 날리는 성북동 산 아래에서 으스러지도록 안아준다. 너를
나의 사랑 동림이~~~~~~~~~~~~ 수화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_정현주, p044~p045


'편지글마다 있는 드로잉, 꽃다발을 건네는 드로잉! 바로 이 그림이었구나.' 편지를 시작할 때마다 있던 작은 드로잉에 '예쁘다!'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작품을 마주하니 기뻤다. 이 간단한 드로잉 안에 사랑이 가득 담겨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김환기_집, 1956
김환기_성심, 1957
김환기_항아리,1958

파리 시절은 물론이고 서울에서도 뉴욕에서도 두 사람의 대화에는 피카소가 자주 등장했다. 피카소는 부부가 특별히 좋아한 화가였다.

"피카소의 존재가 나를 고무시켰고 내일에 박차를 가해줬고 오늘 의연히 그와 대립하여 의욕을 품게 되는 것은 그가 이끄는 힘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김환기, <피카소와 돋보기>, 1962. 11.

부부는 그림뿐만 아니라 피카소의 열정이 좋았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계속 전진해나가고 있는 것이 좋았다. 수화는 피카소가 있어 미술가들이 보다 자유롭게 표현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더 많은 사람들이 미술을 보는 법을 알게 되었다 여겼다. 그림 앞에 서는 피카소의 태도 역시 좋았다. 어느 날 수화는 나이 든 피카소가 벌거숭이로 춤을 추는 사진을 보았다. 피카소는 매일 아침 한바탕 신나게 춤을 추고 나서야 그림을 시작하곤 했는데 일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수화의 눈에 춤추는 피카소의 모습은 마치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투우소처럼 보였다. 투쟁의 몸짓 같았던 것이다. 투쟁하듯 치열하게 그림을 그리고 있던 당시의 수화에게는 피카소의 열정적인 몸짓이 특별한 울림으로 다가왔다.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_정현주 p.102-103


피카소_투우, 1934

피카소, 나에게 피카소(1881-1973)는 고흐나 로뎅, 칼 라르손처럼 나와 다른 시대를 살아간 예술가다. 하지만 김환기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은 우리 외할머니와 비슷한 시기를 살아간 분이시기에 좀 더 나와 가까운 시기를 살았던 예술가처럼 느껴진다. 그런 김환기 (1913-1974) 작가에게 피카소는 많은 영감을 준 작가였던 것이다. 덕분에 피카소가 좀 더 친근해지며, 궁금해졌다.
​이렇게 김환기 작가가 피카소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처럼 예술가들은 또 다른 예술가에게 영감을 받는 듯하다. 바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_1970 작품이다. 절친한 친구인 시인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한 구절을 따온 작품은 1970년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저녁에>

                                                       김광섭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_정현주 p.171


그리운 사람은 눈을 감으면 더 잘 보였고, 감은 눈 안에 떠오르는 얼굴을 그리며, 그들의 이름을 불렀을 수화.

밤하늘에 무수한 별을 찍어가듯 푸른 그림움으로 점을 찍은 작품, 김광섭 시의 한 구절을 제목으로 정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작품은 푸른 점으로 가득 찬 232 X 172 cm의 작품으로 세상에 나왔다.

김환기_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1970

수화 김환기를 보면서 생각해 본다. '우리가 살면서 이렇게 하나에만 몰두하며 살 수 있을까?'  뉴욕 시절 수화의 일기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로만 가득 차있었다.

찾았다! 핑크색 전면점화,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_정현주 p175
김환기가 편지 말미에 가득 적어둔 그 이름 '향안'
김환기_우주5-71#200

화제란 보는 사람이 붙이는 것.
서러운 생각으로 그리지만 결과는 아름다운 명랑한 그림이 되기를 바란다.

                                               1972년 9월 14일, 수화의 일기.



하루하루 커져가는 통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수화는 여전히 꿈을 꾸었고, 매일 몸의 고통을 이기며 그림을 그렸다. 몸이 약해지는 것을 느낄수록 오히려 마음은 더 쫓겼다. 죽기 전에 무언가를 남기고 싶고 원하던 곳에 도달하고 싶은 마음은 더욱 간절해졌다.
그러다 피카소의 소식을 들었다. 1973년 4월 8일, 피카소가 91세의 나이로 프랑스 남부의 무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중략)

수화와 향안에게 피카소는 커다란 산과 같은 존재였다.
높던 산이 하루아침에 무너진 것 같아 허무했고 마치 가장 아끼는 사람이 세상을 떠난 듯 공허해졌다. 두 사람의 생활 속에는 언제나 피카소가 있었다.

(중략)

끊임없이 피카소의 사망뉴스가 들려오는 가운데 수화는 멍한 얼굴로 앉아서는 말했다.

"세상이 적막해서 살맛이 없다."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_정현주 p178-179


엄마 아빠처럼, 가장 아끼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어떤 마음일까? 아직 부모님께서 살아계신 나는 그 마음을 헤아려보려 한다. 그리고 현재 췌장암 말기로 사랑하는 이들을 새기며, 하루하루를 살아내시는 아버님을 떠올려본다. 어느새 눈물이 맺히고, 눈앞이 흐려진다.


똑바로 선 채 그리운 사람들의 이름을 마음으로 부르며 점을 찍어갔다. 높은 빌딩에 촘촘히 켜져 있는 도시의 불빛이거나 밤하늘에 가득한 별을 떠올리며 푸르고 노랗고 빨간 점을 찍다 보면 아침에 시작했는데 어느새 밤이 깊어 있곤 했다.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_정현주 p182


김환기의 마지막 유작_7-VII-74, 1974

해가 환히 든다.
오늘 한 시에 수술.
내 침대엔 'Nothing by mouth'가 붙어 있다.
내일이 빨리 오기를 기다린다.

                                           1974년 7월 12일, 수화의 일기.


다음날 그는 목 뒤 척추 수술을 받았고, 이후의 일기는 적히지 못했다.

작년, 호암미술관에서 그의 작품과 글을 보았다. 환기블루로 날 반갑게 맞이했던 작품들은 뒤로, 뒤로 갈수록 내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었었다.

그리고 나는 나도 모르게 흘렸던 눈물을 닦았었다.

이렇게 책을 보며, 수화 김환기의 작품을 떠올리고, 그의 이야기들을 떠올리고, 그와 평생을 함께 해 온 김향안을 생각해 보았다.

평생을 그림과 함께 살아온 김환기.
그리고 수화와 함께 성장해 온 향안.

향안은 수화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단단해졌다.
향안은 그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고, 그것은 여전히 사랑하는 일이었다. 사랑으로 슬픔을 이기고 향안은 세상이 수화를 기억해 주기를 바랐다. 그의 가치를, 그가 그린 그림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이해하기를 원했다.

1975년 김환기 <회고전>_브라질 상파울루
1976년 환기재단을 설립  
1977년 2월 <김환기>전_뉴욕
1977년 8월 파리로

'그림은 사람하고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먼지를 쏘이며 생명체처럼 살아갈 때 비로소 광채를 발휘한다.'라고 향안은 믿어왔고, 보다 좋은 전시를 위해 수많은 미술관을 견학하고, 장소를 찾아 직접 전시를 기획하며 더 좋은 전시방법과 공간의 활용을 궁리했다. 그리고 스스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1984년 <김환기 10주기> 전_서울
1986년 파리 퐁피두센터에 다섯 폭 기증
1987년 5월 <김환기 뉴욕 10년> 전_파리
1992년 11월 5일 <환기 미술관> 개관
              김환기 20주기 전시
              결혼 50년이 되는 금혼 기념전

향안은 2004년 2월 29일, 수화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의 곁에 묻혔다.

수화와 향안의 러브스토리.

난 그들의 삶 속에서, 그의 작품 속에서, 그들의 꿈속에서 행복했다. 그리고 내 옆에 있는 KH를 떠올려본다. '사랑'이라는 씨앗에서 시작된 우리가 함께 성장해 온 시간들, 함께 걸어 나갈 시간들을 차분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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