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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니 Oct 03. 2023

알바탈출기

신촌의 호프집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 비좁고 냄새나는 미로를 뚫고 양손에 거머쥔 열두 개의 500cc 잔을 테이블 위에 턱하고 놓으면 “우와!” 하는 환호성과 박수가 터졌다. 훗! 연약한 사내들 같으니라고! 하루도 쉬지 않고 7시부터 12시까지 시간당 2천원을 받고 일하던 그때, 힘들어도 그 호프집을 그만두지 못한 건 삼십 분 일찍 가면 먹을 수 있었던 주방 아저씨의 특별 석식 때문이었다. 너무 배가 고픈 시절이었으니까.


계속되는 불운에 연속으로 얻어맞아 점점 더 넙치가 되어가던 시절이었다. 엄마의 갑작스러운 죽음, 아버지의 사업실패, 이사, 더 작은 집으로 이사, 더더더 작은 집으로 이사, 아버지의 공황장애와 우울증까지. 중2 때부터 찾아온 불운의 여파로 대학시절의 모든 나날들은 알바(아르바이트)로 점철되어버렸다. 대학은 어찌어찌 입학 장학금으로 들어갔어도 당장 일하지 않으면 교통비가 없어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한 달에 6만원, 월세 내는 날은 어찌  그리 빨리 돌아오던지. 거기다 물세, 전기세, 주민세도 내야 했고 내 점심값도 있어야 했다.  아버지 약값에 쌀이며 라면이며 세제…. 살아가는데 뭐가 그리도 많이 필요하던지. 호프집 말고도 커피숍, 솜사탕 노점, 액세서리 노점, 방청객, 방송보조출연도 했고 캐러비안 베이로 알바하러 가자는 친구 꼬임으로 다단계 판매조직 설명회에 갔다가 의자에 가방을 놓고 몰래 소지품만 챙긴 채 화장실 창문으로 탈출하기도 했다.  


가장 꿀은 방청객 알바였다. 같은 방송국 알바라도 보조출연은 귀가 떨어져 나갈 만큼 추운 겨울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며 꽁꽁 얼어버린 호숫가에 홑겹 치마저고리만 입고 몇 시간을 서 있게 될 때도 있었다. 하지만 방청객은 무조건 실내 녹화였다. 팀장의 손짓에 맞춰 ‘오호!’, ‘그렇구나!’등의 추임새를 넣고, 손바닥이 빨갛게 박수를 쳐야 해서 눈치가 빨라야 했다. 자칫 잘못해서 추임새 손짓에 박수라도 치면, 다음 녹화에는 절대 불러주지 않기 때문에 집중력도 필요했다. 종종 연예인도 볼 수 있었다. 정말 좋았던 점은 맛있는 방송국 구내식당을 이용할 수 있었다는 것! 1식 3찬에 국도 나오는데 맛이 훌륭했고 가격은 쌌다.  


강의 없는 시간엔 각종 서류들을 초벌 번역했다. 커피숍에서 일할 때 내가 영어책을 들고 있는 것을 보시곤 “너 영어 좀 하냐?”라고 물었던 번역 사무실 사장님께서 일거리를 주셨다. 번역한 것을 보시더니 장당 만 원씩 쳐줄 테니 금요일마다 사무실로 들러 서류를 받아 가라 하셨다. 오호, 웬 떡? 사전을 샅샅이 훑고 영어책들을 참고하고 그래도 어려우면 번역을 의뢰해주신 사장님께 여쭤가며 정성껏 일했다. 그런데 한 서류에 유독 눈길이 갔다. 외국항공사 기내승무원직에 지원하는 사람이 의뢰한 이력서와 지원 서류였다. 나와 같은 나이의 긴 머리 아가씨가 똘망 똘망 한 눈으로 이력서 증명사진 속에서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취업이라…. 나도 졸업반인데….  


‘취업하면 월급이 나오는 거잖아? 매월 정해진 날에 돈이 생기는 거야. 그러면 월세 걱정 안 해도 되고 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항공사라면 여행도 맘대로 할 수 있겠지. 맨날 잡지에서만 보던 꿈같은 곳에 내가 서 있게 되는 거야.’ 라고 내 맘 속이 말을 걸 때, ‘나도 지원하거든? 너도 해 봐. 같이 합격해서 입사 동기가 되는 거야.’ 라며 이력서 사진 속 아가씨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사진 속 그녀가 용기를 건넨 이상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번역 사무실을 나가는 길에 그 외국항공사 사무실에 들러 지원 서류를 받아오고 헌책방에서 영어면접요령에 관한 책도 사 오고 지하철역에서 자판기처럼 생긴 자동 증명사진 기계로 사진도 뽑았다. 서류심사 통과 후 면접 날, 긴장을 많이 해서 온몸에 진땀이 흘렀지만 끝내 합격 봉투를 손에 쥘 수 있었다. 다들 힘들다는 승무원 일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생맥주잔을 열두 개씩 한꺼번에 나르며 단련된 체력 때문이었을까? 시차도 느껴지지 않았고 호텔방도 편하고 조식도 너무 맛있었다. 번역사무실에서 익힌 실전영어로 업무에도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첫 월급을 타고 가장 먼저 아버지의 치아를 치료해드렸다. 의료보험이 없어 치아가 많이 상하셨는데도 치료를 못하고 있었는데, 당당한 직장의료보험 가입자로서 아버지의 상한 치아를 빼고 임플란트를 열 개나 박아드렸다. 직장인 전세 대출도 받아 월세를 전세로 돌리고 몇 년 후에는 작은 아파트도 살 수 있었다. 길고도 긴 알바 생활에서 탈출한다는 것은 끈적하게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깊고 어두운 웅덩이에서 빠져나오는 것과 같았다. 빠져나와 시원하게 샤워를 하는 기분. 절대 끝날 것 같지 않았지만 어쨌든 지나갔고 이제 내 삶의 한 부분으로 남았다. 이것은 나의 알바 탈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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