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말죽거리 잔혹사는 단지 한 시절의 학교폭력 드라마가 아니다. 이 작품은 이후 등장한 수많은 ‘학원 폭력물’의 서사적 원형이 되었고, 주먹이 곧 권력이던 교실의 암묵적 질서를 가장 생생하게 그려낸 출발점이다. 강남개발이 한창이던 1978년 말죽거리(현 양재동)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억압적 시대와 폐쇄된 학교문화 속에서 질식하던 청춘들의 숨결을 밀도 있게 담아낸다.
그러나 말죽거리 잔혹사가 진정 빛나는 이유는 단지 그 ‘원형성’ 때문만은 아니다. 시인이자 감독인 유하가 쓴 각본은 시대를 관통하는 언어적 리듬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엉터리 수업 속에서 흘러나오는 7080식 죽은 지식들, 머리를 빡빡 깎은 채 부글부글 끓는 성적 욕망, 교사의 폭력과 위선 아래 숨죽인 채 순응하던 모범생들의 초상은, 당시를 살아낸 이들에게는 생생한 자화상이자, 지금 청춘들에게는 낯설지만 강렬한 유산이다. 19금 대사조차 그저 자극적이라기보다 그 시대 청춘들의 억눌린 분출로 받아들여진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4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영화가 환기하는 감정은 퇴색되지 않는다. 무력 앞에 비굴했던 순간, 부정 앞에 눈감았던 기억은 아직도 꿈결처럼 떠오른다. 시대가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누군가에겐 교실은 계급투쟁의 무대요, 권력의 모의실험장이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단지 과거를 묘사하는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성장의 진실을, 뼈아프게 상기시키는 청춘의 기록이다.
하지만 어두운 시대의 기억이 꼭 아픈 것만은 아닐터. “대한민국 학교, x까라그래!”라는 단말마의 외침은 단지 분노의 표출이 아니라, 억눌린 시대를 박차고 나가는 청춘의 진혼곡이자 카타르시스였다. 너무 좋아해서 속마음을 보일 수 없었던 우리들의 첫사랑은 오랜 시간 기억 속에서 힘을 주는 동력이었다, 그리고 또 있다. 햄버거. 그 친구 하나만 있어도 세상이 덜 무서웠다. 어떻게든 빠져나가고, 어떻게든 웃기고, 어떻게든 살아남는 그 능청스러움. 우리는 모두 햄버거가 되고 싶었지만 결국 햄버거가 되지 못하고 어른이 되었다. 대신, 햄버거 같은 친구를 하나쯤 곁에 두고 살았다. 그는 각박한 사회 속에서도 살아남을 지혜와 여유를 보여주는 귀한 단서였다.
폭력과 불의, 억압이 뒤엉킨 교실이었지만, 그곳에도 분명 웃음과 설렘, 우정과 성장의 흔적이 있었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바로 그 복합적인 기억을 한 편의 영화 속에 오롯이 담아낸다. 그것이 이 영화가 세대를 뛰어넘어 사랑받고, 회자되는 이유다.
이제는 중년이 된 우리는, 때때로 꿈속에서 그 시절로 돌아간다. 말죽거리 골목길을 지나, 수업을 땡땡이치던 공터로 가고, 운동장 한편에서 쌍절봉을 휘두르던 현수의 몸짓을 떠올린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과거를 회상하게 만드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지금의 우리에게 묻는다. 그 시절의 우리는 어디로 갔는가?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