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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간의 사진, 나는 왜

by 라피


아기가 태어나고 매일 사진을 찍습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아기를 본 후에도 잠자기 전에는 아기 사진을 봅니다. 하루에도 동영상과 사진 수십 장이 쌓입니다. 그러다 보니 휴대폰 500기가도 꽉 차버리고, 드라이브 200기가도 꽉 차버렸습니다. 드라이브 1 테라를 대여하느냐 고민 끝에... 일단은 사진을 한 번 정리해 보기로 했는데요.


처음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시작한 2010년 무렵부터 있더군요. 그 어마어마한 양에 열었다 닫았다만 여러 번을 하다, 겨우 마음을 먹고 매일 밤 아기를 재운 후 없는 시간을 쪼개 사진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분명 내가 찍어 내가 보관한 사진들인데, 정리하다 보면 수없이 많은 의문들이 떠오릅니다. 모르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사진도 많습니다. 그나마 요즘 스마트폰이나 드라이브가 똑똑해져서 흔들리거나 영수증과 같이 중요도가 낮아 보이는 사진은 따로 모아주기도 하고, 사람 얼굴이나 찍은 위치로 묶어주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 사진을 많이 찍었을까?




제일 먼저는 그렇습니다. 저보다도 다른 사람들 사진이 많았습니다. 저는 사진 찍히는 걸 별로 안 좋아했지만, 다른 사람들 사진은 많이 찍어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대학교 때 잠시 사진과를 기웃거리며 수업을 몇 개 듣기도 했고, 또 언젠가 슬프지만 제가 찍었던 사진이 급작스러운 헤어짐에 영정사진으로 사용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저런 이유들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그렇게 다른 사람들 사진을 찍어줄 필요가 있었나, 정작 내 사진이나 가족사진들은 별로 없는데, 그런저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찍어서 주고 나면 지우면 될 것을 왜 또 저장해 두었을까요? 사실 귀찮아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합니다. 사진을 열심히 찍었지만, 다시 보지는 않는 편이었던 것 같거든요. 디지털 공간은 무한하고, 가볍고, 저렴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막상 늘어나고 늘어나다 보니 그렇지 않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됐나 봅니다.






이런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을까?




그러다 중간중간 제 사진이 나오면 정말... 노트북을 덮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민망해집니다. 어린 날의 치기였을까요. 대체 왜 저러고 사진을 찍은 거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배경이 멋져 보이게, 조금이라도 나아 보이는 표정을 지으려고, 또는 무심하게 보이려고, 흔히들 말하는 감성샷을 찍으려고.... 그랬을 것 같긴 합니다만, 이제 와서 보니 그저 눈만 지그시 감게 됩니다.


이제 그냥, 환하게 웃자. 사진을 찍으려거든 그러자 마음먹었습니다. 결국에는 그런 사진만 남겨두게 되더라고요.






이런 것들을 찍었을까?





음식이나 여행지에서의 풍경, 당시에는 의미 있다고 느꼈을지도 모를 물건들.... 다양한 것들 가운데 기억이 나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었습니다. 기억이 나는 건, 십여 년 전의 사진인데도 그때의 감정이 희미하게 떠올랐다고 해야 할까요? 또 어떤 것들은 특별한 경험이었던 것 같기는 한데, 이제는 그 감정도 상황도 잘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몇 백장씩 선택을 하다 보면 기억나지 않는 사진들은 모두 휴지통으로 들어갔습니다. 사실 물건이나 풍경, 음식 같은 것들의 사진은 기억이 없다면 검색엔진에서 볼 수 있는 무수한 사진들과 다를 바 없을 테니까요.


이제 나와 가족 등 사람이 나오거나, 혹은 정말로 10년 뒤에도 기억날만한 것만 사진으로 남겨두자 했습니다.





멀어진 것일까?





사람 얼굴로 묶어주는 기능을 보는데 아, 내가 지난 십여 년 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지나쳤구나 싶었습니다.


그저 지난 시간처럼 자연스럽게 지나간 사람도, 사연이 기억나는 사람도, 사연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저 싫은 감정으로 남아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꽤나 가까워서 사진도 많이 찍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연락을 안 한 지도 오래...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지금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됐습니다. 안 그래도 나이를 먹으며 '시절인연'이라는 말에 공감이 되던 차에, 그저 현재 함께하는 사람들과 적당한 선과 거리를 잘 유지하며 아쉬움 없이 지내보자... 하는 생각으로 연결되더군요.


그럼에도 고민은 있었는데요. 몇 안 되지만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같이 찍은 사진은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다 지울까 생각도 했지만, 그냥 제가 잘 나온 사진 한두 장 정도는 남겨두기로 했습니다. 뭐 따지고 보면 싫긴 하지만, 그렇다고 철천지 원수 같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아서요.








사실 아직도 5년 치 밖에 정리를 못했습니다. 아직 십 년 치가 남았는데, 그래도 십 년 전은 좀 더 가깝게 느껴져서.... 잠시 쉬어가는 기분으로 오래간만에 기록을 남겨 봅니다.


물건만큼이나 사진도, 디지털 기록도, 앞으로도 미니멀하게 관리해 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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